009. 임금의 묘호에 관한 이야기

in #history6 years ago (edited)

역대 임금의 묘호는 조와 종으로 끝난다.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이는 조선도 마찬가지고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태조 왕건)
그러나 황제국이었던 고려가 원나라에 지배를 받을때는 충을 붙여서 이름(충열왕)이 사용되었지만
예기의 나와있는 내용에 따라 당시 아시아권이 사용하였다.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나라를 창업한 군주는 조를 사용한다.

2. 직계로 계승된 왕은 종을 사용한다.

3. 세자가 아닌 사람이 계승하면 조를 사용하고, 세가가 왕위를 계승하면 종을 사용한다.

4. 공이 있는 임금은 조를 사용하고 덕이있는 임금은 종을 사용한다.

우선 창업한 군주는 태조라는 묘호를 사용하게 된다.
(고려의 창업 군주는 태조 왕건, 조선은 태조 이성계, 명나라는 태조 홍무제)
이후의 임금은 대부분 종을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공이 있으면 조, 덕이 있으면 종을 쓴다는 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당시 임금은 상왕인 아버지의 묘효에 대한 평을 좋게 하고 싶었었나 보다.
그래서 임금은 상왕에게 조를 붙이고 싶어 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신하들과 대립을 하게 된다.

신하들은 예종의 상황(세조)의 묘호를 신종, 예종, 성종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예종은 상왕이 나라를 세운 공덕이 있기 때문에 세조로 하자고 하자고 하고 이를 추진하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당시 장면을 살펴보자.


예종 즉위년 9월 24일 (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대행 대왕의 존호와 시호를 속히 정할 것을 전교하다.

원상(院相) 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과 도승지 권감(權瑊)에게 전교하기를,

"대행 대왕의 존호(尊號)를 미처 올리지 못하고 갑자기 승하하시니, 추도(追悼)하는 마음이 망극하여 이제 시호(諡號)를 속히 올리고자 한다. 예전에는 달을 지나서 시호를 정하였는데, 이는 비록 아들이 그 어버이를 죽은 것으로 하지 아니하는 뜻이나 이미 염빈(斂殯)을 하였으니, 이제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속히 존시(尊諡)를 올리는 것이 태비와 나의 지극한 소원이다."

하니, 최항이 대답하기를, "옛 제도를 상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그것을 속히 의정부 당상과 일찍이 정승을 지낸 이와 육조(六曹)의 참판 이상을 불러서 회의하라."

하니, 드디어 의논하여 계달하기를, "묘호(廟號)는 신종(神宗)·예종(睿宗)·성종(聖宗) 중에서, 시호는 열문 영무 신성 인효(烈文英武神聖仁孝)로, 혼전(魂殿)은 영창(永昌)·장경(長慶)·창경(昌慶) 중에서, 능호(陵號)는 경릉(景陵)·창릉(昌陵)·정릉(靖陵) 중에서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보고 권감으로 하여금 묻게 하기를, "승천 체도(承天體道) 네 글자는 본래 존호(尊號)인데, 내게 이르기를 그대로 한다고 하였다가 이제 없앴으니, 이는 나를 꾀는 것이다. 저번에 내가 한계희(韓繼禧)에게 이르기를 자수(字數)를 제한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제 여덟 자로만 제한하였으니, 내가 어리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하는가?"

하니, 좌우에서 모두 삭연(索然)하여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좌의정 박원형(朴元亨)이 아뢰기를, "승천 체도 네 글자는 헛된 것 같기 때문에 신이 참으로 의논하여 없앴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행 대왕께서 재조(再造) 한 공덕은 일국의 신민으로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묘호(廟號)를 세조(世祖)라고 일컬을 수 없는가?"

하니,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 등이 아뢰기를, "여덟 글자는 신 등이 감히 제한한 바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 조종(祖宗)의 시호가 모두 4자·6자·8자에 그쳤기 때문에 이를 모방하여 의논한 것입니다. 세조는 우리 조종에 세종(世宗)이 있기 때문에 감히 의논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때에 세조가 있고 또 세종이 있었는데, 이제 세조로 하는 것이 어찌 거리낌이 있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이는 신 등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한계희가 재차 신 등에게 이르기를, ‘어찌 여덟 자로 한정할 것인가?’ 하였으나, 상교(上敎)라고 전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성상의 뜻을 알지 못하였으니, 대죄(待罪)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한계희가 또 아뢰기를, "신이 명백하게 전하지 못하였으니, 신도 대죄하겠습니다."

하였다. 한참 있다가 중관(中官)에게 술을 대접하도록 명하고 다시 의논하여 고쳐서 계달하게 하였다. 시호를 ‘승천 체도 지덕 융공 열문 영무 성신 명예 인효 대왕(承天體道至德隆功烈文英武聖神明睿仁孝大王)’으로 하고, 묘호는 ‘세조(世祖)’로 하여 권감이 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인효(仁孝) 위에 의숙(懿肅)을 더하고, 능호(陵號)는 태릉(泰陵)으로, 전호(殿號)는 영창(永昌)으로 하라."

하고, 인하여 대죄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결국 세조로 결정되고 임금의 묘호에 조의 사용이 시작되기 시작한다.
이후 광해군때 상황의 묘호에서 다시한번 조의 사용이 언급된다.
이때는 예종때와는 달리 신하들의 반발이 있었어서 선종으로 결정하였으나 나중에 어찌된 이유로 선종의 묘호를 선조로 바꾸게 된다.


광해 즉위년 2월 23일 (1608년 명 만력(萬曆) 36년)
예조에서 대행 대왕의 묘호를 종이라 하는 것이 의당하다고 아뢰다.

예조의 〈낭청이〉 대신들의 뜻으로 아뢰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묘호(廟號)에 관한 〈일에 대한 비망기에 ‘이는 막중한 일이니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나의 의견은 전에 이미 모두 하유했으니 경들이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라.
이런 내용으로 대신들에게 이르라.’고 전교하였습니다.
당초 간관(諫官)이 청하고 재신(宰臣)이 차자를 올린 것은 모두가 선유(先儒)들이 이미 정해놓은 의논에서 나온 것입니다. 역대 제왕들을 조사하여 보건대 비록 성대한 공렬이 있다고 해도 계체(繼體)이면서 조(祖)라는 호칭을 일컬은 때는 있지 않았습니다.

사리에 의거 헤아려 본다면 대행 대왕의 묘호는 종(宗)이라고 일컫는 것이 윤당(允當)합니다.

신들이 반복하여 상의해서 재삼 진계(陳啓)하였으므로 이제 감히 다른 의논이 있지 않습니다.
이에 의거 정탈(定奪)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광해 8년 8월 4일 (1616년 명 만력(萬曆) 44년)
빈청이 의논하여 선조와 두 비의 추숭 존호 단자를 입계하다.

이비가 아뢰기를,

"다시 물어서 아뢸 일로 전교하셨습니다. 영의정 기자헌에게 물었더니, ‘신들의 두 번 아룀에서 이미 모두 진달드렸는데, 다시 하문을 받들었기에 신이 복상했던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아서 아룁니다.
좌상이 복상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혹 말을 전해듣기는 하였습니다만,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오직 상께서 참작하여 처리하시기에 달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판서를 뒷 정사에서 차출하도록 하라."

하고, 정사를 그대로 시행하였다.
빈청이 모여 의논하여, 선종 대왕(宣宗大王)의 추상 존호를 계통 광헌 응도 융조(啓統光憲凝道隆祚)라고 하고,

묘호를 선조(宣祖)라 하고,

의인 왕후(懿仁王后) 추상 존호의 망(望)에 현숙(顯淑)과 장숙(莊淑)과 명덕(明德)이라 하고, 공성 왕후(恭聖王后) 추상 존호의 망에 현휘(顯徽)와 정순(貞順)과 명순(明順)이라고 하였다.
단자를 입계하였다.


임금의 요구다 보니 신하들의 반발이 거세지는 않았었다.
효종이 상왕을 인조로 정하려고 할 때 대신 심대부는 묘호를 조로 정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강하게 상소를 하게 된다.
그러나 효종의 대답은 예로부터 총행하던 전례이기 때문에 개인의견을 고집하지 말라고 하고 결론을 내버리게 된다.
이후에는 조와 종에 대한 경계가 무너지게 되고 고종때 많은 임금의 묘호를 종에서 조로 변경하게 된다.
결과 조선 시대의 임금 중에 묘호에 조로 끝나는 임금이 많아지게 된다.


효종 즉위년 5월 23일 (1649년 청 순치(順治) 6년)
인조의 묘호와 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다.

대행 대왕의 묘호(廟號)를 개정해서 올리기를 인조(仁祖)라 하고, 시호를 헌문 열무 명숙(憲文烈武明肅)이라 하였다.

효종 즉위년 5월 23일 (1649년 청 순치(順治) 6년)
심대부가 묘호가 적당치 않음을 간하였으나 논의하지 않다.

응교 심대부(沈大孚)가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대행 대왕의 묘호를 조(祖)자로 의정(議定)해 올려 이미 품재(稟裁)를 거쳤다고 합니다. 신자(臣子)의 숭배해 받드는 생각에서는 진실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바가 없어야 하는 것이고 보면 이 조자로 의정한 것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마는 혹시 의리에 맞지 않고 정론에 부합하지 않는 바가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대행 대왕의 성대한 공덕으로 볼 때 이 명호(名號)를 받으신 데 대하여 아마 비의(非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들은 바는 이와 다름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조(祖)와 종(宗)의 칭호에 우열(優劣)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창업한 군왕만이 홀로 조(祖)로 호칭되었던 것은 기업(基業)을 개창(開創)한 1대(代)의 임금이어서 자손이 시조(始祖)로 삼았기 때문이었으니, 역대의 태조(太祖), 고조(高祖)의 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선대의 뒤를 이은 군왕들은 비록 큰 공덕이 있어도 모두 조로 호칭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깨뜨릴 수 없는 정리(定理)입니다. 오직 한(漢)나라의 광무(光武)는, 먼 종실(宗室)의 후예로 왕망(王莽)이 찬역(簒逆)한 뒤 도적떼가 봉기한 때에 난리를 평정하고 잃었던 나라를 광복(光復)하여 한나라를 하늘에 배향(配享)해 제사지내어, 이름은 비록 중흥(中興)이지만 실지는 창업과 같기 때문에 위로 압존(壓尊)되는 바가 없어서, 스스로 대통(大統)을 전하는 시조(始祖)가 되어 조(祖)로 호칭하였으니, 그 이치 또한 실로 당연합니다. 저 명나라의 태종(太宗)같은 이도 비록 건문(建文)의 난리를 평정하였으나 실은 고황제(高皇帝)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라고 호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가정(嘉靖) 17년에 와서 성조(成祖)로 추호(追號)하니 당시에 식자들의 비난이 많았습니다.

우리 나라의 세조 대왕은 친히 노산(魯山)의 선위(禪位)를 받아 위로 문종(文宗)의 계통을 이었는데도 오히려 묘호를 조(祖)라고 호칭한 것에 대해서는 신의 견문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는 나라를 빛내고 태평을 이룩한 치적(治績)이 하늘에까지 알려진 큰 공이 있었으되 묘호를 의논하던 날에 조자로써 의정(擬定)하려 하자 윤근수(尹根壽)가 의례(義例)가 없다는 이유로 차자를 올려 그 의논이 중지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허균(許筠), 이이첨(李爾瞻) 등의 무리가 없는 사실을 엮어 만들어 공을 나라를 빛낸 공에 비기어 존호(尊號) 올리기를 광해(光海)에게 청했습니다. 광해는 혼자 담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다시 조로 호칭하는 의논을 일으켰는데, 당시에는 문헌(文獻)에 밝고 경력이 많은 사람으로서 나라를 위해 말을 다 하기를 윤근수처럼 할 만한 자가 없었으므로 드디어 그 의논이 시행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의리로 보아 옳지 않은 일입니다.

신은 일찍이, 당시의 군신들이 의리에 밝지 못하여 한갓 숭배해 받드는 것만이 높임이 되는 줄만 알고 위로 성대하신 덕에 누를 끼침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서 전례가 없는 이런 예를 만들어 낸 것에 대하여 가슴 아프게 여겼습니다.
저 오대(五代) 남북의 임금들 중에는 혹 아들로서 아비를 잇고 아우로서 형을 이은 자들까지도 대부분 조라고 호칭하여, 예를 더럽히는 혐의는 생각지 않고 구차하게 일시의 호칭만을 분에 넘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지러운 세상에서 함부로 한 일에 대하여 논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선대를 이어받은 임금은 비록 공덕이 있어 영원히 체천(遞遷)하지 않는 묘가 된다고 하더라도 모두 종(宗)이 되는 것이지 조(祖)가 되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은 창업하여 대통(大統)을 전했는데도 단지 세실(世室)만을 만들었을 뿐이니 이것이 곧 종이 된다는 증거이며, 당나라 태종은 집안을 나라로 만들었으되 묘호를 종이라 칭하였으니 이것이 곧 조가 될 수 없다는 증거입니다.
한 문제(漢文帝)는 여씨(呂氏)의 난리를 평정하고, 당 현종(唐玄宗)은 위온(韋溫)의 난리를 평정하였으며, 진 원제(晋元帝)와 송 고종(宋高宗)은 혼란한 뒤에 나라를 부흥시켰으니 역시 한 시대를 중흥시켰다고 할 만한데도 그 신하들이 모두 감히 조(祖)의 호칭을 쓰지 않은 것은 의례(義例)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무(尤袤)가 ‘고종이 비록 중흥한 공이 있지만 아들로서 아버지인 휘종(徽宗)의 대통을 이었으니 묘호를 종이라 칭해야 마땅하지 광무(光武)와 같이 조로 칭해서는 부당하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다만 당시의 정론(正論)일 뿐만 아니라 만고(萬古)의 정론(定論)으로 고종의 성덕(盛德)에 훼손되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차례로 지난 역사를 상고해 보면, 그러한 흔적을 징험할 수 있으니 이른바 공이 있으면 조라 칭하고 덕이 있으면 종이라 칭합니다만 그 뜻이 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함께 체천하지 않는 종묘에 모셔진 것이라면 종이라 해서 조보다 낮아지는 것이 아니고 조라고 해서 종보다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태종(太宗)·중종(中宗)·세종(世宗)·고종(高宗)은 묘호를 모두 종이라 칭하였으나 체천하지 않는 묘가 되는 것은 진실로 같습니다.
그러니 어찌 예를 어기는 혐의를 무릅쓰고 계통(繼統)의 의리를 어지럽히면서 호칭해서는 안 될 조(祖)의 호칭을 쓴 뒤에야 비로소 체천하지 않는 종묘가 되어 성대한 덕에 빛을 더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우리 대행 대왕께서는 탄생하신 처음부터 유달리 귀여워하시는 성조(聖祖)의 사랑을 많이 받아 나라를 부탁하여 맡기려는 뜻이 이미 이름을 지어주시던 날에 드러났습니다.
마침내 화란을 평정하여 다시 윤기(倫紀)를 바로잡고 자전의 분부를 받들어 드디어 왕위에 오르시어 낳아주신 부모를 추존하는 전례(典禮)를 이미 거행하셨으니, 아들로서 아버지를 이은 계통이 절로 있는 것입니다.
묘를 체천하지 않고 묘호를 종이라 칭하는 것이 어찌 성상께서 어버이를 드러내시는 효도와 신하들이 임금을 높이는 의리에 부족한 바가 있겠습니까.
만약 지금 의리도 헤아리지 않고 옛것을 본받지 않고서 예(例)를 무시한 전례를 따라 그대로 조(祖)의 호칭을 사용한다면 일이 경(經)에 의거한 것이 아니어서 예의 뜻과 크게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원종(元宗) 이상 열성(列聖)의 묘에 대해 능멸하고 억압하는 혐의를 면할 수 없어 하늘에 계시는 대행 대왕의 혼령께서 저승에서 불안해 하실까 두렵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높이고 드러내는 것이 다만 대행 대왕께 비례(非禮)를 씌워 백세의 비난을 부르는 것이 될 뿐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중종 대왕께서는 연산(燕山)의 더러운 혼란을 깨끗이 평정하시고 다시 문명의 지극한 정치를 열으셨으되 조라고 호칭하지 않고 단지 종이라 호칭하였으니 이것이 오늘날 우러러 본받아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미천한 신은 식견이 고루하여 관직도 낮고 말도 천박한데 상께서 상중(喪中)에 계시는 이때에 이미 결정된 막중한 의논을 재론하여 주제넘게 말씀을 올렸으니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빈전(殯殿)에 책명(冊命)을 올릴 날이 머지 않았는데 이때를 놓치고 말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되면 선왕(先王)께 보답하고 전하께 충성할 직분을 시행하지 못하여 평생 한(恨)을 안게 될 것이니, 외람되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미안함이 되는 정도일 뿐이 아닐 것입니다.
며칠 동안 상소문을 올리려 하다가는 다시 말곤 하였으나 끝내 말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예로부터 통행하던 전례(典禮)이니 자신의 소견만을 고집하여 함부로 망령된 의논을 내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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