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의 회상, 이사

in general •  2 years ago

우리집 살림이 어려워졌던 것 같다. 시멘트로 만든 집에서 살다가 영선시장통 한가운데로 이사갔다. 모두가 다 판자집이었다. 그러나 판자집에도 엄연히 위아래가 있었다. 우리는 큰길에서 한칸 정도 떨어진 두칸짜리 판자집으로 이사갔다. 큰길에서 멀수록 방값은 쌌다. 어머니께서 큰길에서 가게가 보이면서도 방값은 싸서 좋다고 하신말이 기억난다. 방하나 그리고 가게겸 부억으로 쓰는 공간이 있었다. 어린나이였지만 시멘트집에서 판자집으로 이사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잘 기억하고 있다. 시멘트집에서는 그래도 내심 뻐기는 생각도 들었는데 판자집으로 이사하면서 괜히 힘이 빠졌다. 누가 말해주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알았다.

어머니는 삭월세 나가는 돈이 줄어드는 것을 다행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우리집 옆은 큰길에서 한칸 더 들어와 있었다. 옆집은 큰길가였고 철물점인가 그랬고 시장에서도 잘 사는 집이었다. 우리 앞집은 잡화점을 하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어렵고 힘든 때니 사람의 냄새가 없이는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난 좁은 시장 골목길을 열심히 뛰어놀았다.

그때는 친구를 동무라고 했다. 아니 동무란 말이 친구로 바뀌어가고 있었던 듯 하다. 내 친한 동무는 이화용과 김영국이었다. 화용이네 집은 육소간을 했다. 그 집에가면 간혹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한참을 놀다보면 화용이 어머니가 밥을 차려주었는데 간혹 소고기도 있었다. 우리집에는 김장김치와 더운물에 말은 찬밥덩이가 전부였다. 그래서 나는 주로 화용이집에서 놀았다. 이리 저리 하다가 밥먹을 시간까지 화용이 집에서 왔다갔다 했다. 그러면 화용이 어머니가 밥먹고 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까지 지다렸다. 어머니는 내가 화용이집에서 밥을 먹고 오면 혼을 내셨다. 난 내가 왜 혼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조선중기의 거유 회제 이언적 선생의 후손이셨고 평생 양반의 행실을 지키고 사셨다. 난 어릴적에 길가에서 음식을 먹고 다니면 큰일이 나는줄 알았다. 길가에서 음식을 사먹어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비굴하게 빈대붙어서 밥읗 빌어 먹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맛있는 소고기 냄세는 나의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고작 8살짜리에게 무슨 의지며 자존심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내 어머니는 평생 자존심으로 세상을 사셨다.

영국이집은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국이 아버지가 무슨 직장을 다녔는지 어머니도 집에서 살림만 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그 시절에 우리는 매우 절친했었나보다. 우리가 친한 동무였다는 것을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도 주변 어른한테 들었으니 말이다.

우리 앞집에는 김윤국이라고 나보다 2살 많은 형이 살고 있었다. 그집은 아버지가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서 팔았다. 윤국이 아버지는 그 어린 살림에도 항상 머리에 기름을 발라 단정하게 빗고 다니셨다. 아이스크림을 만들다가 잘 못해서 소금물이 들어간적이 있었다. 윤국이네 아버지는 그 큰 한통을 모두 버렸다. 동네 꼬마들 차지였다. 아이스크림이 짭짤했지만 그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한숨쉬는 윤국이 아버지를 보았다. 어린 나이지만 마냥 좋지만 않았다.

그때는 물한컵도 귀할 때였다. 매일 아침 물차가 배달을 했고 양동이와 바케츠를 들고 물을 받았다. 윤국이 집은 제일먼저 아버지가 세수를 하고 그 물로 윤국이가 다시 세수를 하고 나면 윤국이 어머니가 다시 그물을 받아 씻고 빨래를 했다. 우리는 모두 가난했지만 윤국이네 처럼은 하지 않았다. 윤국이 어머니는 가난 정도는 우습게 생각하는 단호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가난에 기를 꺽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다. 중학교에 들어간 윤국이는 공부를 잘했다. 시험을 치고 성적을 받아 오면 윤국이 어머니 눈에서 빛이 났다. 어릴 때지만 난 윤국이 어머니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 내가 고생하지만 그리고 너네 들이 나를 우습게 보지만 난 아들이 있어"
"너 네들 내 아들이 얼마나 잘 났는지 알아?"

윤국이와 나는 2살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친구처럼 놀았고 그는 내말을 잘 들어주었다. 나중에 영선시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서 간혹 간혹 윤국이 생각을 했다. 그 윤국이가 커서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잘 되었으리라. 어머니의 그 형형한 눈빛을 윤국이가 어찌 외면할 수 있었겠는가.

시장통 한가운데로 이사간 후 지금까지 기억나는 주변 친구들이다. 서울에 와서도 간혹 생각이 났다. 그러나 지금껏 한번도 만난적이 없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것은 어릴적 추억의 힘이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하는 싯구도 있다. 그러나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추억의 힘이었다. 어려웠을 때의 기억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어머니는 영선시장의 삶을 추억하기조차하기 싫어했지만 나는 그 추억의 힘으로 살아왔다. 그 당시의 삶은 처절하다할 정도로 어려웠다. 피난민들이 모여 만든 판자촌이 어찌 처절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난 어렸지만 삶이 만만하지 않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새벽에 들으면 감성 터지는 노래라고 합니다.
http://m.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249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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