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kr-fiction_쉘터_14화 낙관

in #fiction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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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은 박사와 작별한 뒤로도 아주 오랜 시간을 떠 있었지만 아직도 터널의 끝은 아주 멀게만 보일 뿐이었다.

777은 이제 가만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에도 꽤 적응이 되었다. 혹은 그들이 모종의 ‘무기력’ 약물을 더 투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다 뭐랄까?

쉘터를 거쳐 방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현실감각이라는 있었다. 공기와 사물들, 인간의 기척을 인지하고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터널 안은 그러한 감각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었다. 현실이 아닌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777은 박사가 남긴 이야기를 다시 곱씹어 보았다.

따지고 보면 박사가 했던 말들을 모두 믿을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아마도 터널 끝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터였다. 그의 이야기는 그가 말했던 대로 가설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허나 777로선 그의 가설을 반박하는 것이 그의 가설을 인정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이미 777은 778의 허무한 소멸도 목격했고, 776이 아무런 경고나 제재 없이 처참히 강간을 당하는 것도 목격했다. 적어도 그들이 인간의 생명과 희로애락, 감정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게 777은 박사의 말이 옳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 구원, 인류를 위한 터전, 노아의 방주, 짝, 그리고 남녀의 사랑, 모두 허튼소리에 불과했다. '그들'은 그저 안정적으로 그들이 필요로 하는 자원을 채취하고 싶었을 뿐이다. 인간이 고기를 얻기 위해 소, 돼지를 사육하는 것이나 다를 것 없는 일이었다. 박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777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영문도 모르고 감금된 채 먹고 싸고 번식만을 하는 한 마리 가축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느니 이렇게 있다가 죽어버리는 편이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살처럼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냥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그럼 뻥! 하고 끝이다. 쉬운 일이다. 고통도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물론 842와 같은 자는 가축이 되어 사육되는 편이 어울리겠지만 말이다.

777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불현듯 잠시 잊고 있었던 776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그녀도 곧 이곳에 오게 되겠지. 그녀는 수치를 아는 사람이니까. 어쩌면 이미 와 있는지도 몰라....... 그럼 박사님처럼 돌아서서 조금 속도를 늦춰볼까? 그녀를 다시.......'

그러나 이내 777은 도리질을 치며 그런 생각을 지웠다. 다시 그녀를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위로라도 할 셈인가? 아니면 박사에게 들었던 참혹한 진실을 알려줄 셈인가? 이대로 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어차피 다시 만날 수 있을 리도 만무하다.

777은 자신의 손에 죽은 여자의 모습도 떠올렸다. 박사의 말대로 영혼이 존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지만 그녀의 영혼만은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다. 그럼 조금이나마 죄책감이 덜 할 것 같았다. 허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떻게든 죄책감을 덜어보려는 이기적인 제 모습에 777은 저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찼다.

뒤이어 공기 중에 산산이 부서져 흩어져버린 778, 목사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가 지금은 그토록 원하던 안식을, 구원을 얻었길 바랐다. 비록 그가 아주 나약했으며 종교적 광기에 취해 있었다고는 하지만 신에 대한 그의 믿음 하나만은 강건했다. 그것만은 누구에게든 인정받길 빌어주었다.

퍼뜩 777의 눈에 잘려나간 손가락이 비쳤다. 777은 늦은 밤, 뜬금없이 텐트 안에 침입해와 격투를 벌이다 자신의 손가락을 물어뜯고 도망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꽤나 어려 보이던 그 남자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777, 잘린 손가락,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고는 제풀에 놀라 달아났더랬다. 그가 독한 마음을 먹었다면 그때 777의 목숨을 끊어놓았을 수도 있었을 터였다. 운이 좋았다.

그리고 마침내 777의 머릿속에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들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 아버지, 어머니....... 누구보다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삶의 순간들을 함께 해온 가족들이다. 그러고 보니 왜인지 그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777은 하루아침에 가족을 모두 잃은 고통과 충격이 너무나도 컸던 나머지 본능적으로 망각에 기대려 했는지도 모른다. 가족들을, 그들을 잃은 기억을 애써 지우려 했는지도 모른다. 가족들의 죽음을 알게 된 뒤 삶의 의욕을 잃은 것도 잠시, 지진의 공포에 놀라 살기 위해 도망치던 제 모습이 너무도 못나고 추해 보여 그랬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 시간은 있다. 아니 많다. 이제부터라도 가족들의 모습을 자주 떠올리자고 마음먹었다.

777의 얼굴에 문득 영문을 알 수 없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777은 생각했다. 아마도 '그들'의 인류 가축화 계획 따위는 실패할 것이다. '그들'은 곧 인간을 가축화하는 일 따위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크나큰 판단착오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을 것이다.

777은 어서 빨리 터널의 끝에 당도하길 빌었다.

생각을 거듭하던 777은 문득 조금 지쳤다는 생각,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기분 좋은 꿈을 한 번 더 꿔봤으면 하고 바라며 777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끝-

에필로그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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