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호숫가의 돼지들: 1부 - 사관과 숙녀(2)steemCreated with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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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
집무실에서 맞이한 그 신임 장교의 인사가 그녀는 귀에 설었다. 그녀 자신도 애써서 저 경례구호를 외치고는 있지만, 아직도 부대 내에서는 곳곳에서 무심코 “충성!”의 경례구호를 외치거나 2호지간 경례시 팔을 구령 중간에 움직이는 등의 ‘육군 티 내고 다니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그녀는 “필승.” 하며 약간은 어색한 수례(受禮)를 마치고, 그 신임 장교를 바라보았다. 오른편 가슴팍에 박음질된 명찰에는 그의 이름이 수놓여 있었다. “중위 유재관(柳在官). 금일부로 제371방공포병포대에 전입을 명 받아 이에 신고합니다.”
신임 장교가 관등성명과 더불어 조금 허스키한 듯싶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신고의 예를 다하고, 다시 경례를 올렸다. “필승.”
“그래. 여기 잠깐 앉지.”
그녀는 간단히 신고식을 마친 것으로 하고, 유 중위를 집무실 내 소파에 앉혔다. 그러고는 유 중위가 내미는 전입자 자기소개서를 받아들며 그와 마주 앉았다.
“흐음.” 그녀는 유 중위의 이력이 전해 주는, 육군 출신의 후임에게서라면 아마도 찾아보기 어려웠을 그 경력 특유의 신선함에 무심결에 감탄사를 흘렸다.
유 중위는 공군 장교로 임관한 뒤, 조종특기자로서 야심차게 비행교육과정에 입과했지만 불행히도 고등비행교육과정에서 이른바 ‘그라운딩(Grounding)’ 즉 비행훈련에서 탈락하는 사태를 겪고 임관 15개월차에 F-4 전투기의 동승조종사, 즉 이른바 ‘후방석 조종사’로 전환되었다. 그 후로 반 년 가량 교육을 받으며 복무하다가, 실제 배치 전 전격적으로 특기전환을 신청, 올해 육군에서 전군한 탓에 공군 입장에서는 일종의 신생 특기와도 같았던 코드번호 1806 특기, 즉 방공포병 특기를 새로이 받아낸 것이다. 그러고는 특기교육기초과정에 입과해 8주간 기본훈련을 받고, 이곳에는 신임 방공포병장교로서 자대배치를 처음 받은 것이었다.
“특이하네.” 그녀가 말했다. “출신지는, 경기도 안산이라……, 여, 대구 1여단, 수성포대 쪽으로 배치되면 자주 집에 댕기오지도 몬할 낀데. 개안나? 휴가를 나가도 오멩가멩 한나절 길바닥에다 버리겠구로.”
“괜찮습니다. 집에 다녀오는 것보다는 현 복무지에 충실히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대답이 씩씩했다. 그녀는 내심 웃으면서도, 표정은 굳은 채로 유지했다. “동승조종사라……마, 사실 내를 비롯해서, 우리 부대원들은 다 육군 출신인기라. 사실 공군 체계는 잘 모르거든. 유 중위는, 그라모 비행기 잘 몰았나?”
교육에 탈락했다는 사람한테는 좀 아픈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 보면 미리 마음에 굳은살이 박이게 만들어주는 말일 수도 있었다. 주위가 죄다 육군 출신인데 결국 공군 시절, 아니, 방공포병이 되기 전 정말 ‘공군스러운’ 공군에 있던 시절을 쉽게 이해하는 이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녀는 유 중위가 말문을 떼게 하고 싶었다.
“차 운전보다는 조금 더 잘 합니다.” 유 중위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비행기는 그래도 15개월은 몰아 봤지만, 차는 뭐, 제가 장롱면허인지라 말입니다.”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웃음기를 수습하기에도 늦은 것 같았다. 그녀는 ‘근엄함’은 어쩔 수 없이 약간 미뤄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맞나. 혹시 연애는 하나?”
“불행히도 자유의 몸입니다.”
이번 웃음은 그나마 참을 수 있었다.
“우리 방공포병 특기가 사실 육군 방공포병 병과에서 전군해 온 지가 1년도 안 되얐는데, 우예 이짝 공석에 지원할 생각을 했노? 원래 공군에서 특기전환이라는 거를 하믄 마 개인 선택의 폭이 원캉 보장이 된는 걸로 아는데, 따른 자리는 망구 없었나? 육군으로 치믄, 그러니까, 마 기행부대 쪽 자리 같은 거 말이라, 음……. 그걸 공군에서는 뭐라 하드노? …….”
“?” 유 중위는 육군스러운 단어 이전에 일단 그녀의 사투리가 더 알아듣기 힘든 것 같았다. 그는 조금 생각하더니, “아하.” 나직이 탄성을 뱉고는 이윽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비전투병과 중에서 특히 행정 쪽이나 아니면 지원부대 쪽 일만 하는 것 말씀이십니까? 인사행정 특기나, 아니면 보급, 무기정비, 정훈 같은 것…….”
“맞다.”
“원하지 않았습니다.” 유 중위의 눈빛이 강해졌다.
“저는 전군 초기, 아직 기틀이 잡혀야 할 부분이 틀림없이 많을 이 방공포병 특기에서 새롭게 제 군생활의 커리어를 쌓아가고 싶었습니다. 초창기와도 같은 이 시기에 자리를 잡아나가 공군인으로서의 방공포병 특기를 가꾸어나가는 일에서 선봉에 선다면, 보람차기도 할 것이요, 무엇보다…….” 그가 씩 웃었다. “진급도 잘 되고, 뭔가 군인으로서 품어 봄직한 야망도 품을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후방석 조종사로 남아서 중령 달 때까지 고생하다 연금 받고 나가는 것보다는 더 큰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야…….” 그녀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이런 파이오니어(Pioneer)적인 신임 장교는 처음 봤던 것이다. 역시 하늘을 지키던 물이 다르기는 다른 모양이었다. “대단하네.”
그 뒤로는 당번병이 타온 커피를 나눠 마시며 담소를 하는 시간이 약간 흘러갔다. 그러다 슬슬 대화를 마무리하고 운영계장의 자리로 유 중위를 이끌어야겠다 싶어, 그녀가 운을 떼었다. “그래, 글마 이제 요식적인 이야기는 마카 다 돼았고……유 중위는 내한테 마, 뭐 궁금한 거 읎나? 아니면 마, 부대 돌아가는 거 궁금한 거 있다든지.”
“음, ” 유 중위는 잠시 생각하다 그녀의 가슴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슴이 풍만한 편이라, 명찰이 정면에서 봤을 때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약간 아래쪽이 울어서 위로 들린 상태에서 보이게 마련이었다. “포대장님을 직책명이 아니라 관등성명으로 불러야 한다면, 혹시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제3자에게 뭔가 연락 드리는 경우나 서류 결재 올릴 때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아.”
유 중위가 헷갈려할 만도 했다. 그녀는 성만 해도 세 글자, 이름이 두 글자로 다 합치면 다섯 글자가 되었던 것이다. 한데 명찰 제작자의 실수로, 지금 그녀의 전투복에 박음질되어 있는 그녀의 영문 성(姓)은 정작 앞의 두 글자까지만 “JANGGOK”이라고 나와 있었다. 그리고 초면인 사람들은 아예 그녀의 성이 한국의 성씨 ‘장(長)’씨인 줄 알기도 했다. 그래도 유 중위는 눈썰미가 있는지, 대충 때려맞추려 하지 않은 것이다. 그녀가 일본계 한국인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내는 일본계다. 성은 장곡처이라고 하는데, 원래 일본 말로는 ‘하세가와(長谷川)’라. 조부모님께서 옛날에 일제강점기 때 건너오셨다가 우리 나라 광복 때 식구들 다 귀화를 했다 하시드라.”
“아. 그러면……장곡천 대위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유 중위는 조금 더 ‘의식적으로’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짐짓 인사를 했다.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현재 사천팔백만여 명의 대한민국 인구 가운데 이백칠십만여 명에 달하는 한국 내 소수민족 제1호인 일본계 한국인들은, 말하자면 마치 미국의 아일랜드계 이민자 같은 사람들이었다. 외모가 한눈에 구분되는 경우는 세대가 내려오면서 이루어진 혼혈로 인해 많이 줄었지만, 아직까지 가문에 남아 있는 일본적인 정체성이나 집안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광복 당시에는 조선 성명 형태로의 역 창씨개명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뒤로는 세월이 흐르며 굳어져 성씨를 갈아치울 이유가 흐려졌기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일본식 씨명(氏名). 변한 것은, 일본식이 아니라 한국식 독음으로 읽어야 한다는 점뿐.
과거에는 일본계 한국인들이 식민지 시절의 앙금이 남아 있었던 한국인들에게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오늘날에는 소수민족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면서 그러한 문제는 많이 줄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 곳곳에는 소수민족, 특히 일본계 한국인을 배척하는 인식이 암암리에 퍼져 있으며……그래서, 계급사회의 특성상 오히려 그러한 출신성분이 약점으로 훨씬 덜 작용하는 곳인 군(軍)에 스며들어 생활을 영위하는 일본계 한국인이 오늘날에도 꽤 있었다. 당장 그녀 자신도, 그처럼 대학 졸업 후 얻은 첫 직장에서 출신성분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 후 사표를 내고 곧장 육군에 학사장교로 지원했던 것이니까.
군에서는, 그래서, 소수민족 출신 ‘전우’를 만났을 때의 행동양식 몇 가지가 일종의 밈(meme)처럼 퍼져 있었다. 지금의 유 중위처럼, 내색하지 않고 완전히 순혈 한국인을 대하듯 행동하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지만, 은연중 의식적인 배려를 하느라 태도가 굳어져가는 경우. 앞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심지어 술자리 등으로도 이끄는 등 친근감을 보이지만 뒤에서는 인사고과상의 불이익 등으로 기대를 배반하는 경우. 또는, 정말로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하는 경우─마지막 케이스에 범인(凡人)이 해당되는 일은 거의 없다.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두 번째의 경우에 해당되는 속물도 보통은 없다. 당연한 것이다. 인간은, 무언가 유별난 인간을 접하고부터, 그와의 인간관계를 통해 점점 더 스스로도 달라져간다. 첫 번째 유형으로 시작되는 인간관계는, 그녀에 대한 좋거나 나쁜 인상, 또는 그가 믿고 싶은 모습─혼혈도 아니었기에 혈통적으로는 빼도 박도 못 할 “왜년”이라는 사실─대로 그녀의 모습을 그려서 만드는 인상이 점차 쌓여 가며, 두 번째 혹은 세 번째의 유형으로 바뀌어가는 것이다.
불행히도 전임 포대장은 두 번째의 유형으로 바뀌었었고,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약간 자화자찬 같아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기는 해도) 미모가 더 나은 축에 드는 ‘왜년’ 혹은 ‘쪽바리년’으로서의 그녀보다는 미모는 좀 많이 빠지더라도 순혈 한국인이었던 신임 하사만을 건드렸다. 그 자는 왜년과는 아예 엮이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성군기 문란 사건에 휘말려 커리어가 꼬이는 사태에서 몸을 빼고 자신을 영전하게 해 준, 다행스러운 일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일견 분한 일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유 중위를 응시했다. 앞으로, 그녀의 보좌이자 참모로서 운영계장의 직분을 수행하며 변해 갈 그의 모습이 궁금했다. 준수한 유 중위의 얼굴은, 그녀를 조금 예쁘지만 가까이 다가서기 싫은 왜년 포대장으로 보게 될지, 아니면 최초의 여군 포대장으로서 조심스럽게 대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보게 될지? 그도 아니면, 정말 마음을 열고 서로를 이해하게 될지?
군에서는 사실 직속상관과 부하 사이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녀는 가장 마지막 경우로 그와 그녀의 만남이 이어지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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