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DMZ] 죽은 듯 살아있었다

in #dmz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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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느낌이 교차했지만 어떤 말도 쉽게 꺼내고 싶지 않다.
어쩌면 한 사람의 감정으로 이 땅을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철원에서 만난 근대문화유적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여전히 사람의 발걸음이 거의 닿지 않은 땅 위에 있다.

 

 

사전에 촬영 허가를 받았음에도 취재진과 같은 수의 군인이 동행했다. 철원의 많은 근대문화유적은 허가를 받아도 정훈장교와 함께 둘러봐야 하는 곳, 민통선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장소를 옮길 때면 그곳을 지키는 더 많은 군인의 시선이 우릴 좇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이 철원의 근대문화유산을 찾았을 당시 내가 만난 사람의 전부였다. 민통선 내부에 있긴 하지만 관광 코스로 개발되어 있음(오른쪽 정보 참조)에도 과거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였을 ‘옛 철원읍’은 그렇게 사람이 살지 않고 찾지 않는, 찾을 수도 없는 땅이 되어있었다. 오는 이가 많지 않은 곳이기에 글을 쓰기도 퍽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관리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꼭 한 번쯤은 가보길 권하고 싶다. 각자의 생각과 세계관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느낌을 받겠지만, 먹고 마시고 즐기는 흔한 여행과는 판이하게 다른 여행을 경험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철원읍은 일제강점기 시대 손에 꼽힐 만큼 번영한 도시였다. 읍 주변의 넓은 평야에서는 풍성한 수확물이 거둬졌고, 인구도 8만여 명에 육박했다. 사람과 돈이 모여들면서 금융 시설이 들어서고 ,6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도내 최대 규모의 학교도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종합 병원쯤 되는 전문 의료시설은 물론, 강원도 유일의 급수 시설도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 땅은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하루 백여 대의 기차가 오가던 철로는 극히 일부분만을 남겨놓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학생들이 꿈을 키워나갔던 학교 운동장은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지뢰밭으로 변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했던 시가지 대부분은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이 됐다. 현재는 지정된 관광 코스를 도는 관광객과 민통선 내의 땅에서 농사일을 하는 농민만 오가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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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의 근대문화유적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군인이 지키고 있는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허가를 받았음에도 괜히 긴장된다. 이곳을 통과할 때의 느낌은 무척 묘하다. 주민등록증 지참은 필수. ⓒ조혜원

 

철원의 지금 모습이 어찌 생각하면 을씨년스러울 수도, 오싹하다 느낄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우울해할 일만은 아니다. 사람의 발길이 많지 않았던 덕분에 이 지역은 수많은 야생 동물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채 생태계가 보존되고 있는 지역은 세계적으로 드물 정도다. 이곳을 연구하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지적 가치를 얻을 수 있으리란 것은 추측이 아니라 확신에 가깝다. 더불어 다행인 점을 꼽자면 이 땅에 근대 역사의 흔적이 여럿 남아있다는 것이다. 번영했던 도시의 흔적은 대부분 파괴되고 사라졌지만 몇몇 건물이 원래의 모습을 일부분이나마 간직한 채 그 자리에 서 있다. 많은 사람이 찾지 않아 생명력 약한 건축물이 되어갈지언정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그리고 지금도 겨누고 있는 현실을 잊지 말라 강변하는 듯 근대문화유적들이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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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보존을 위해 노동당사 내부 출입을 금해놓았지만 가까이 다가가 안을 들여다볼
수는 있다. 그 옛날 이 건물 안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뼈대만 남은 노동당사와 평화로운 나무 풍경의 대비가 묘하다. ⓒ조혜원

 

비극이 떠나고 역사가 남았다.

전쟁의 포화에도 살아남은 건물과 터 등은 지난 2002년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는데, 그중 노동당사와 철원 제일감리교회, 수도국지는 민통선 외부에 있어 별도의 허가 없이 둘러볼 수 있다. 노동당사(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2호)는 1945년 해방을 맞은 이후 북한 노동당이 철원군 당사로 사용했던 건물로, 공산정권 강화와 주민 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한 것이라 전해진다. 이 건물을 둘러싼 이야기가 여럿 남아 있는데, 대부분 당시 북한군과 관련된 것이다. 건물을 짓기 위해 양민을 무자비하게 수탈했다거나 공산주의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끌고 와 고문을 일삼았다는 것,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내부 공사는 모두 공산당원이 맡았다는 것 등의 이야기다. 전쟁 후 실제로 건물 뒤 방공호에서 수많은 인골과 실탄 등이 발견되었다 하니 해방 이후 철원 지역에서 북한 노동당이 행한 횡포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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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무너진 철원제일감리교회 옆으로 신식의 교회 건물이 다시 세워졌다. ⓒ조혜원

 

3층 구조의 노동당사는 골격이 그대로 남아 보존되고 있다. 외벽에 총탄과 포탄을 맞은 흔적만 몇 곳 있을 뿐 거의 온전한 모습이다. 북한 노동당이 이 건물을 짓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상상이 된다. 철원읍이 한국전쟁 당시 시가지였던 탓에 폭격이 집중됐고, 노동당사를 제외한 주변 건물이 대다수 파괴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건물의 단단함은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그러나 내부의 경우 1층의 벽 형태만 제외하고는 모두 무너져 내려 원래의 구조를 알아보기 힘들다.

노동당사 근처의 낮은 언덕 위로 올라가면 철원제일감리교회(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3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 교회는 철원지역에서 제일 먼저 설립된 교회답게 지하 1층, 지상 3층의 큰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1920년대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졌으나 30년대 중반 이 지역에 있는 화강암과 현무암으로 재건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강원도 최초의 독립운동 본거지로 사용된 역사적 의의도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에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강원도 지역의 기독학생들이 반공투쟁을 벌였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양민과 반공투사들을 고문, 학살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도 함께 전해진다. 이렇게 격동의 시기를 지나온 제일감리교회는 현재 외벽과 바닥의 일부만을 남긴 채 간간히 찾아오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터 안에는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고 가까이서 100여 년 전의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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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트막한 언덕 위에 남아있는 수도국지 시설 중 하나. 주위로
지하 저수조, 급수 시설 등 다른 형태의 여러 급수 시설이 남아있다. 언덕에 오르면 이제는 자연만 남은 옛 철원읍 주변이 한 눈에 들어온다. ⓒ조혜원

 

철원읍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자락의 평평한 벌판에는 옛 철원읍의 번영을 일부나마 느껴볼 수 있는 수도국지(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0호)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6년에 만들어진 수도국지는 일반인들을 위한 강원도 최초의 상수도 시설이다. 당시를 기록한 문헌에 따르면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저수조는 물론 정수장, 관리소 등의 시설물을 갖추고 500여 호 2,500여 명의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상수도 관련 시설과 침전지, 급수시설 3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덕분에 근대 급수 시설의 원형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유적으로 손꼽히지만, 동시에 한국전쟁 당시 반공 인사 300여명이 총살당했던 아픔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다른 문화유산과 달리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지하 저수조, 급수 시설 등을 제한 없이 볼 수 있으며 총탄 자국 등 전쟁의 흔적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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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 운영되었던 금융조합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흔적인 철원 제1금융조합지. 이 공간은 돈을 보관하던 금고로 추정된다. 주변으로는 논밭이 펼쳐져 있다. ⓒ조혜원

 

 

고스란히 남은 번영의 흔적

민통선 내부로 들어서면 더 많은 근대문화유산을 접할 수 있다. 대표적인 건물로 철원의 근대문화유산 중 유일하게 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농산물 검사소(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5호)를 꼽을 수 있다. 새로 만든 출입문을 비롯, 군데군데 보수를 한 모습이 눈에 띄긴 하지만 폭격을 맞아 터만 있거나 외벽의 일부만 남은 주변 유적과 비교하면 어떻게 이처럼 완벽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일제가 세운 공공기관이었던 이 농산물 검사소는 작은 규모지만 건축물의 비례와 창문과 건물의 조화, 출입구의 위치 등 근대 건축의 특징과 기법을 잘 알아볼 수 있어 가치 있는 문화재로 평가받는다.

드넓은 평야에서 수확된 농산물의 품질을 검사하던 이 건물은 해방 이후 전쟁 직전까지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면서 불순분자를 색출하고 체포했던 검찰청 건물로 용도가 바뀌어 사용되었다고 한다. 농산물 검사소 바로 옆으로는 옛 철원읍의 모습과 현재 남아있는 근대문화유산등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근대문화유적센터가 들어서 있다.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문이 잠겨 있을 때가 많지만 상주하고 있는 관리인에게 이야기하면 내부 견학을 통해 이 지역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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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창고 외벽에 쓰여
있는 북한노동당의 흔적. 이 문구를 쓴 사람은 누구였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온전하지 않은 유적은 많은 상상을 하게 해준다. ⓒ조혜원

 

농산물 검사소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직사각형의 건물 벽체만 남아있는 얼음 창고(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4호)를 만나게 된다. 근처 신명호의 얼음을 채취해 여름까지 보관했다가 식당 등 인근 업소에 판매했다는 이 얼음 창고는 일제 강점기 시절 한 일본인 식당 주인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이후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우리 인민들의 자유스런’으로 시작되는 알아보기 어려운 붉은 색 구호와 포탄의 흔적으로 보이는 둥근 구멍들만이 그 시절의 이야기를 유추하게 할 뿐이다.

얼음 창고 반대편으로는 철원 제2금융조합지(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37호)가 자리 잡고 있다. 철원읍이 번성했을 당시에는 많은 사람과 돈이 모였기 때문에 동주금융조합, 철원금융조합, 철원 제2금융조합, 조선식산은행 등 모두 4개의 금융기관이 활발하게 활동했다고 한다. 그중 가장 컸던 금융기관은 노동당사 근처에 위치해 있었던 조선식산은행으로, 1936년도의 기록에 의하면 예금고 1,788만 원(일본 화폐, 당시 1원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2만 원 가량), 대출금은 1,205만원에 달했다. 일제강점기 말까지 번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철원 제2금융조합지는 총 예금고 49만 원, 대출금 34만 원으로 식산은행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규모의 금융조합이라 할 수 있지만 금융조합 건물 중 유일하게 흔적이 남은 건물이다. 대부분이 파괴되고 외벽의 바닥부분, 금고로 추정되는 건물 잔해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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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벽한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농산물 검사소. 새로 만든 노란 대문이 이질적이다. ⓒ조혜원

 

철원읍은 번영한 도시였을 뿐 아니라 원산과 서울을 잇는 경원선 철도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1914년 9월 16일 원산에서 개통된 경원선은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부설된 철도. 창도 지역의 자원인 유화철을 수탈해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건설했다. 당시 철원역은 전체 부지 5만여 평의 대지에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건물이 들어서 있는 큰 역이었으며, 역에서 일하는 직원만 8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금강산 관광수입을 목적으로 내금강으로 이어지는 철도를 추가로 부설하면서 철원역은 ‘금강산 관광열차’의 시발역이 됐다. 안타깝게도 이곳 역시 전쟁을 피해 갈 수 없었고, 현재는 승강장 일부와 철로의 일부만이 남아 과거와 기억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철원에는 철원역 외에 또 하나의 역이 남아있는데, 현재 비무장지대의 남방한계선 철책 근처 최북단 종착지점에 위치(민간인이 갈 수 있는 최북단 지점)한 월정리역이 그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이 역에서 마지막 기적을 울렸던 객차의 잔해와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서진 인민군의 화물열차가 앙상한 골격을 드러낸 채 보존되어 있기 때문.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간판과 열차의 진행방향을 가로막고 있는 철책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그 어느 곳보다 분단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여행자를 위한 붙임

민통선 내부를 견학하는 법
철원에 남아있는 대다수의 근대문화유산이 민통선 내부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견학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철원군에 위치한 고석정을 찾으면 ‘안보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을 통해 제2땅굴과 철원평화전망대, 월정리역, 노동당사 등을 둘러볼 수 있다. 9시 30분과 10시 30분, 1시, 2시 등 1일 총 4회 운영하며 화요일은 운영하지 않는다. 단체 견학 시에는 2시간 30분~3시간가량이 소요된다. 견학 당일 관람료를 납부한 후 신분증을 지참하고 출발 15분 전까지 고석정에 위치한 철의삼각전적지 관광사업소 1층에서 접수하면 된다. 시설사용료는 성인 4천 원, 경로자 2천 원, 청소년 3천 원, 어린이 2천 원이다. 개인 차량 이용 시 주차료 2천 원은 별도로 내야 한다. 문의 철의삼각전적지 관광사업소 033- 450- 5559, http://hantan.cwg.go.kr

터만 남아있는 유적지
철원 근대문화유적지 주변으로 터만 남은 채 보존되고 있는 장소도 여럿 있다.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민중이 고초를 겪었을 경찰서 터, 강원도 내 가장 큰 공립학교 였던 철원공립보통학교 터, 철원·평강·연천 지역에서 누에고치를 수탈해 명주실을 생산한 뒤 외국으로 수출했던 제사공장 터, 일제식민통치기구가 철원군의 행정을 집행했던 철원군청사 터 등이 그것. 터 외곽을 둘러싼 철제 테두리 외에는 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터 앞쪽으로 옛 사진과 건물에 대한 설명을 적어놓은 안내판이 있어 조금이나마 옛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지나치지 않아야 할 또 하나의 유적지
근대문화유적지와 조금 떨어진 장소인 갈말읍 내대리와 동송읍 장흥리 경계에는 1948년 지어지기 시작한 승일교(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6호)가 비교적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이 다리의 특징은 두 개의 아치형 교량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 북한 정권 하에 장흥리 쪽으로부터 공사를 시작했으나 절반 정도 지었을 때 전쟁이 발발, 공사를 멈추었다가 남한 정부에서 약간 다른 공법으로 나머지 공사를 마무리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이 다리의 이름에 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는데, 이승만의 ‘승’ 자와 김일성의 ‘일’자를 땄다는 이야기가 있고, 전쟁 당시 평안북도 덕천전투에서 순직한 박승일 대령의 이름을 땄다는 이야기가 있다.

 

 


글 김영리| 사진 조혜원|취재협조 육군 제6보병사단 정훈공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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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잘 보았습니다! DMZ와 평화통일에 관심 많은 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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