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에 가면... 마술사들이 있다.
움직일 것 같지 않은 자동차들을 타고
존재한 적 없는 길을 걸어온 사람들의 나라를 여행하다.
쿠바의 도로는 환갑을 훌쩍 넘긴 ‘올드 카’들로 가득하다.
아바나에서 시외로 나가는 대중교통은 거의 전무하고 비행기는 외국인들에게 터무니 없이 비싸다. 띄엄띄엄 있는 완행열차는 시간도 맞지 않고 고장까지 잦아서 언제 어디에 도착할지 기약할 수 없다. 그래서 자동차로 쿠바를 횡단한 적이 있다.
서부 피날델리오(Pinar del Río)에서 동남단 산티에고데쿠바(Santiago de Cuba)까지의 거리는 1250km에 불과하다. 그러나 고속도로는 중서부 일부에만 깔려 있고, 낙후된 국도는 위험하기 그지없다. 표지판도 없는 편도 1차선 길은 차와 마차, 오토바이와 자전거, 버스와 트럭, 때로는 소떼까지 함께 사용한다.
먹구름과 장대비를 동반한 카리브 해안의 폭우 역시 만만치 않다. 길 위에서 천둥 번개보다 더 무서운 존재들은 폭우에 쓸려 차도 위로 나온 게들이다. 뾰족한 갑각류 ‘지뢰들’을 밟아 타이어가 찢어지면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GPS는 물론 전화도 안 되는 쿠바의 허허벌판에는 자동차는 고사하고 하루 종일 개 한 마리 얼씬 거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그 오래된 차들이 별 탈 없이 돌아다닐 수 있을까?
“혹시 플로리다로 가는 잠수정 필요해요? 일자 드라이버가 없으면 칼 하나로도 충분해요. 망치가 없으면 돌로도 돼요. 한 달이면 그 어떤 고물차도 레이스카로 바꿔 놓는다니까. 한 달을 못 기다린다고요? 그럼 3주에도 가능하지. 가솔린 값이 부담되면 디젤로, 디젤도 싫으면 물로 움직이는 엔진을 만들어 줄게요.”
내 일행의 차를 고쳐주는 정비사의 허풍은 음악적이었다. 쿠바에서 차를 고치는 메카니코(mecánico)가 되려면 창의력과 손재주는 기본이고 ‘말발’이 세야 한다. 그들은 단순한 수리공이나 기술자가 아닌 예술가다. 아니 마술사에 가깝다. 반세기가 넘는 미국 주도의 금수조치에도 불구하고 1940년대에 만들어진 ‘양키 탱크’들이 쿠바의 거리를 아무 문제없이 질주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정비소에는 자동차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고철덩어리들도 보였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질문에 답을 갖고 있는 메카니코들은 나의 시각과는 다른 해석을 갖고 있었다. 바퀴가 넷 달려 있는 물체를 가리키며 내가 물었다.
“저런 차에도 가속력을 붙일 수 있다고요?”
“당연히 가능하죠. 세상에 고칠 수 없는 건 없어요.”
“아니 어떻게요?”
“절벽에서 밀어 떨어트리면 페라리보다 빨라요. 마음에 들면 이 가격에 살 수 있어요.”
“네? 저 걸 판다고요?”
“휘발유를 가득 채워서 팔면 이 가격의 두 배는 받아야 됩니다. 하하.”
쿠바의 메카니코들은 ‘1+2=?’이 아닌 ‘?+?=3’이라는 질문을 던지며 주어진 자원과 여건에서 상상력을 발휘해 작업한다. 소련산 자동차 라다(Lada)의 피스톤을 쉐보레(Chevrolet)에 부착하고, 가스히터의 버너를 개조해 우랄(Ural) 오토바이의 카뷰레터로 변형시킨다. 잔디 깎는 기계의 엔진을 활용해 스쿠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메카니코들의 마술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해결하는 쿠바인들 특유의 ‘레솔베르’(resolver)정신에서 나온다.
소련이 1991년에 붕괴하자 쿠바의 수출입은 5분의 1로 줄고 GDP는 3분의 2로 줄었다. 경제 위기를 넘어 대재앙이었다. 국가수반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는 ‘특별 시기’(período especial)를 선포했다.
소련으로부터의 원유 공급이 중단되자 수도 아바나에서도 전기와 물이 종종 끊겼다. 시내 곳곳에는 쓰레기가 쌓여 있었고, 뒷골목들은 썩는 냄새로 진동해 거대한 변기로 변해 버렸다. 상하수도가 부실한 구역에서는 공중화장실을 나눠 써야 했고, 학교에서는 이가 득실거렸다. 쿠바인들 다수는 겨우겨우 끼니를 채울 수 있었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쿠바인들은 ‘특별 시기’를 설명할 때마다 하나같이 눈물을 글썽이며 ‘악몽’과 ‘저주’라는 표현을 쓴다.
‘레솔베르’는 쿠바가 ‘특별 시기’에 외쳤던 구호다. 직역하면 '해결’이라는 뜻이지만 ‘특별 시기’를 견뎌낸 쿠바인들에게 이 단어는 다양한 뉘앙스를 품고 있다. ‘레솔베르’는 실용적이면서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삶의 방식이자 문화다. ‘레솔베르’에는 상상을 초월한 고난을 극복한 쿠바인들의 저력과 자부심이 묻어 있다.
‘특별 시기’에 쿠바인들이 발휘한 ‘레솔베르’는 실로 기발했다.
식량 배급 유통망이 무너지자 건물 옥상에는 채소밭이 만들어졌다. 훗날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쿠바 오르가노포니코(Organopónicos)의 시발점이었다. 화학비료와 살충제가 없어 지렁이 분변토와 방충식물을 활용해 관리한 도시 유기농 농장들은 인민들이 굶지 않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마취제가 부족한 병원에서는 중국 침술과 전통 대체 의술을 도입했다. 제약업의 중요성을 체감한 쿠바 정부는 생명공학 등에 과감한 투자를 해서 소위 ‘짝퉁 약’을 자체 생산해 수출까지 하게 됐다.
쿠바를 탈출하는 ‘보트피플’ 피난민들 조차 007 영화에나 나올 법한 수륙양용 카보트를 만들어냈다.
세계의 많은 이들은 그 시절에 쿠바가 어떻게 멸망하지 않았는지를 궁금해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한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당시엔 휘발유가 없으니까 자전거로 식량을 배급소로 날랐다네. 몇 시간씩 그 땡볕에서 기다리는 우리를 위해 보급품을 가득 싣고 쓰러질 때까지 자전거로 쉴 새 없이 오가는 청년들이 고맙고 또 고마웠지. 그거 아나? 그 시절 모든 것이 지저분했지만 아이들 교복만은 깨끗했다네. 누구나 아이들에게는 품위와 자부심을 물려주고 싶었으니까.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지만 우린 스스로 깨달았던 것 같아. 미국이 제재를 가하고 소련이 망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우리가 서로 격려하고 의지하며 즐거움과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몫이라는 걸 말이야. 고통과 고난에 휘둘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끝까지 지켜내는 방법은 결국 우리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세상에는 이미 닦여진 길을 가는 이들이 있고, 또 없는 길을 만들어 가는 이들도 있다. 쿠바인들은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지구상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 왔고, 또 여전히 독자적인 길을 헤쳐나가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 자신만의 길 위에 서 있다.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앞만 보며 달리기도 하고 간혹 뒤를 돌아보기도 한다.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로는 우회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씩 ‘정비’를 필요로 한다. 그럴 때 쿠바를 권하고 싶다. 쿠바에는 세상에 고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믿는 마술사들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