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간의 활약으로 2000년간 회자되고 있는 표기장군 곽거병.

in #chinesehistory6 years ago (edited)


첫번째 소개시켜드릴 중국사 레전드 무장은 곽거병 입니다.
올타임 레전드 항우가 No.1이 되어야 하지만, 양이 너무 방대해서 잠시 보류하기로 했습니다.

곽거병
기원전 140 ~ 기원전 117
중국 전한 시대의 명장. 중국 고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관 중 하나로 꼽히는 인 물으로, 고작 18세부터 24세까지, 단 6년간 활약으로 전설 이 되어버린 불꽃 기린아.

곽거병은 다름 아닌 한무제의 처조카로 태어날때부터 다이아 수저로 고귀한 신분이었다.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한무제의 총애를 얻어 시중이 되었는데 곽거병을 표요교위(剽姚校尉)에 삼고 흉노 공격에 동행을 시켰다. 아끼는 처조카가 전쟁에서 적당히 공을 세울수 있 게 한무제가 밥상을 차려준 것이다.

이때 전투에서 곽거병은 기병 800기를 거느리고 본대를 떠나 수백리를 진격 하는 폭주를 보여주었다. 그런데……보통 이러면 흉노에게 각개격파 당하고 포위당하는게 일반적이지만, 군신 곽거병은 흉노 2천명 이상을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흉노 선우의 할아버지뻘 되는 자약후 산(藉若侯)을 죽이고 선우의 막내 숙부 나고비(羅姑比)를 사로잡는 공을 세운다. 다시 말하지만 이때가 18살, 첫 출정 때의 일이다. (생애 첫전투에서 레전드급 활약..)

이공으로 한무제는 곽거병을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임명했는데, 초대 표기장군이 바로 곽거병이다. 지금으로 치면 육군 참모총장 정도 된다..
21세, 군에 몸을 담은 지 고작 3년이다. 한술 더 떠서 2년 뒤에는 아예 대장군과 같은 녹봉을 받는다.

이는 중국역사상 이례가 없는 파격적 행보였다. 날고 긴다하는 중국의 대장군들도 21살에 이러지는 못했다. 앞서말한 다이아 수저라고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후에 곽거병이 세운 눈부신 전공을 생각하면 대장군직 도 낮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말그대로 시작에 불과하니까.

표기장군이 되기가 무섭게 1만여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여 엿새동안 흉노 다섯 부족을 지나 무려 1천 리를 질주해서 백병전을 벌인 끝에 적을 모두 격퇴, 흉노의 절란왕과 노호왕을 참수했으며(흉노 왕 2명 참수.장수아니고 왕...) . 죽이거나 사로잡은 무리가 무려 8천여 명이 넘었다. 또한 흉노 휴저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때 쓰던 금인(金人)까지 탈취했다.

그해 여름, 한무제는 표기장군 곽거병과 합기후(合騎侯) 공손오(公孫敖)를 북지에서 출발시키고,다른 쪽으로는 장건과 이광을 파견하여 흉노를 섬멸하려고 하였다.
곽거병은 이미 흉노 땅 깊숙히 진격 하였지만 뒤따르던 공손오가 길을 잃어 한참을 지체하게 된다. 연락이 끊겨 공손오가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곽거병은 그야말로 과감한 행동을 취한다. 공손오를 기다 리지 않고 혼자서 흉노 땅 한복판으로 진격한 것이다. (닥돌인생)

곽거병은 거연수(居延水)를 배를 타고 건넌 후, 소월지(小月氏)까지 나아가 기련산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흉노 추도왕과 2500여 명을 사로잡았고 적들을 3만여 명 넘게 참수하였다.(기본 전공이 흉노왕 참수..흉노
가 원래 중국 본토 정규군에 털리는 민족이 아님.)
그뿐만이 아니다. 흉노의 왕 중 다섯 명과, 그들의 어머니, 선우에 연지, 왕자, 상국에 장군, 당호, 도위 등 수백여 명을 사로잡았고, 맞붙었던 흉노군의 7할을 분쇄하는 경이적인 전과를 올렸다.

흉노의 선우는 혼야왕이 서쪽에서 계속 한나라 군대에게 깨지고 있는데, 그 원인이 곽거병 때문임을 알고 매우 화를 내며 혼야왕을 죽이려 했다. 혼야왕은 휴저왕과 논의하고, 곽거병을 이길 자신도 없고 선우도 무섭고 하니 차라리 한나라에 투항해버리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한무제는 이 소식을 들었지만, 만약 항복하는 척하면서 공격을 하면 큰 피해가 우려되었기에 이 일을 곽거병에게 맡겼다.

곽거병은 군대를 이끌고 혼야왕의 부대와 대치했는데, 혼야왕의 비들 중 항복을 원하지 않는 장수들을 공격해서 8천여 명을 죽이고 수만여 명에게 항복을 받아내었다. (지금까지 쭉 나열한 전공이 표기장군 오르자 마자 1년만
에 성취..)

표기장군 곽거병의 마지막 불꽃 막북전투.

기원전 119년, 한무제는 흉노의 홈그라운드 쪽에서는 한군이 보급문제 등 여러가지 문제로 오래 싸우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는 점에 공감했다. 하지만 역 으로 크게 대군을 일으켜 공격을 취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한나라는 믿는 도끼 곽거병에게 1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병력을 흉노 원정에 투입시켰다. 10만이 넘는 원정대가 사막을 넘는데, 이 병력들이 원정군이라는 점, 그리고 사막과 계곡을 넘는 극히 힘든 길을 가야 함을 생각하면 국운을 건대단한 도박인 셈이였다.

곽거병은 장장 1천여 리를 행군하여 고비 사막을 그대로 넘어가며 흉노의 영역을 완전히 가로질러 진군했다. 곽거병의 진격은 북경 북서쪽 선화 부근에서 바이칼호 부근까지 이른다.
(칭기즈칸 기마병만이 가능했던 전술을 기원전에 유일하게 활용한 인물)

그 자체만으로도 위업이라 할 만한데, 그렇게 사막의 모래 폭풍을 뚫고 제대로 보급도 못하면서도 전투력을 유지한 채 흉노 선우의 오른팔인 장거(章渠)를 사로잡고 왕호 비거기(比耆)를 참살했다. 또한 흉노 좌대장의 군대와 싸워 물리치고 그들이 쓰는 깃발과 북을 빼앗았으며, 산과 강을 건너 흉노의 왕 3명을 죽이고(또 왕....왕 킬러.) 장군, 상국, 당호, 도위 등을 83명 이상 주살하였다.

그렇게 죽이고 사로잡은 흉노의 숫자가 무려 7만 4430여 명에 이르렀다. (만약에 중국사 제1 레전드 항우하고 비교될 수 있는 사령 관을 딱한명 뽑자면 전 곽거병)

그리하여 흉노 땅 한복판에서 거창하게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흉노는 이를 어떻게 해볼 수 가 없었다.
(일본군이 한국 청와대 점령해서 일장기 세우고 자기 조상 들한테 제사지낸다고 생각해보세요..)

본국에서의 보급은 요원하고, 흉노 땅에 딱히 거두어서 쓸 만한 논과 밭 등이 있는 것도 아닌데 보급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의문이 들 수 있는데……이 해결법이라는 것이 정말 어이가 없다. 흉노 적군을 때려 부수고 흉노 군사의 식량을 빼앗아서 보급을 해결했다고 한다. (..걍 될놈될)

이렇게 곽거병은 너무나 젊은 나이에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했지만, 하늘이 이 군신을 시기한 탓인지 흉노 정벌이 후 어이없이 급사하고 만다.

향년 24세. 18세에 첫 전투 참가, 6년간의 활약으로 전설이되고 영원
히 이름을 남긴다. 표기장군 곽거병.

제 개인적으로는 너무 좋아하고 아까운 인물이라 많은 사 람이 기억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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