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 수 있는 권리, 책 [나를 지워줘]
세상에는 다양한 권리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주권이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권리인 주권. 하지만 주권은 내가 원해서 가지게 된 권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다소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오늘, 책 <나를 지워줘>를 통해 말하고 싶은 권리는 개인의 선택이 반영되는 권리이자 최근 사회적으로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잊힐 권리'이다.
N번방 사건으로 표면에 드러난 디지털 성범죄의 끔찍한 현실. 책 <나를 지워줘>의 저자 역시 인터넷 과학신문의 객원기자로 활동하며 '잊힐 권리'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온라인상의 자신의 기록을 전부 없애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취재했던 경험. 그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소설 집필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일이 생각보다 굉장히 큰 규모의 심각한 사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다시금 소설을 돌아보고 방향을 수정한 결과물이 바로 책 <나를 지워줘>. 그래서 그런지, 단순한 청소년 문학으로 치부하기엔 참 많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주인공 강모리는 고등학생이면서 디지털 장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디지털 장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 때문에 즉, 디지털 기록을 지운다는 명목하에 오히려 디지털 성범죄를 유통하고 있다는 오해로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지만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다소 분명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자신의 여동생을 찾는 것. 동생의 흔적을 쫓던 중 동생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디지털 성범죄의 대상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디지털 장의 홈페이지를 운영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속되는 주변의 만류에 홈페이지 운영을 중단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모리에게 리온이 찾아오며 상황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유명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인기를 쌓아가고 있던 리온이 온라인상에 떠돌아다니고 있는 자신의 성 착취물을 지워달라는 요청을 해 온 것이다. 모리는 자신은 더 이상 디지털 장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며 거절하지만, 차마 엄마에게 말할 수 없다는 리온의 간곡한 요청에 마음이 흔들린다. 결정적으로 고통을 견디다 못한 리온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며 리온의 흔적들을 쫓는 일에 뛰어든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누구로부터 시작된 일이었을까?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을 찾아야겠다. 찾아야만 한다.
언제쯤 이 문제의 뿌리를 온전히 뽑아낼 수 있을까? 나는 종종 생각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아파한다. 너무 어린아이들이,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들이, 선하게 살아가던 여성들이 자신도 모르게 피해자가 되고 있는 이 현실이 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정당한 절차 없이, 자신의 동의 없이 소비재로 전락해버린 그들의 마음을 가늠할 길이 없다. 일상이 모두 마비되고 삶의 마지막을 생각하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러한 현실 앞에 나는 무력감을 느낄 뿐이다.
책 <나를 지워줘>에는 모리와 리온 말고도 디지털 성범죄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주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직접 범죄에 가담하는 인물, 협박을 받고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된 인물, 심지어 방관하고 있는 주변인들까지 등장한다. 나는 그중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된 재이라는 인물을 보며 이것이 현재 디지털 성범죄의 현주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피해자가 피해자를 양산하는 시스템. 자신의 사진이나 영상이 온라인상에 떠돌아다닐 수 있다는 두려움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은 종잇장보다 얇고 가볍다. 결국은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IT 기술이 발전을 거듭하며 더 이상 살인이라는 단어가 물리적인 행위에 국한되어 사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무기가 없어도 사람을 언제든 죽일 수 있는 환경이 펼쳐진 것이다. 예전보다 훨씬 예민하고 예리한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 시대이다. 몸이 편해질수록 마음은 불편해져야만 한다. 더 많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그러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행동이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피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행동은 멈추어야 한다.
책 <나를 지워줘>를 읽으며 디지털 장의사라는 직업과 마주했다. 정말 대단하고 멋진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디지털 장의까지 필요한 세상이 왔다는 것이 참 씁쓸하다. 분명 좋은 의도로 만들어졌을 SNS가 범죄의 수단으로 악용되며, 편히 일상을 공유하는 것조차 어려워졌다는 사실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속상함이 넘쳐흘러도 수습할 길이 쉬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인 듯싶다. 나를 꽁꽁 감추는 수밖에. 당장에 떠오르는 대체 방법이 없다는 것. 몇몇의 괘씸한 미꾸라지들이 우리의 일상을 흐려놓고 있는 이 현실을 우리는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