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옥중서간 - (1)

in #book7 years ago

나에게 '책을 읽는 것'은 아직도 하나의 의무에 가깝다. 내 주변에는 책에 빠져서 일주일에도 수십여권을 읽어내려가는 사람들이 꽤 있지만, 솔직하게 나는 책에 빠져 본 일이 없다.

신영복 씨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도 예외가 아니었다. 처음 책을 샀을때에는 반드시 완독을 하고 글을 쓰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책의 1/3지점에서 나는 이렇게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같이 공유하고 싶은 내용이 많아서 글을 쓰는 이유도 있겠거니와, 아직은 독서력이 부족하여 이렇게 토해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책의 남은 부분을 끝낼 수 없을 것 같아 글을 쓰는 이유도 있다.

읽어내려가던 중 내 눈의 움직임을 버벅이게 하는 많은 글귀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몇개를 속아내어 소개하고자 한다.

'20년의 옥고를 치르고 우리들 앞에 나타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그의 변함없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서 출판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었을 그의 조용하면서도 견고한 정신의 영역에 대하여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 긴 암묵의 세월을 견디게 하고 지탱해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의 20년과 비교한 우리들 20년은 어떠한 것이었던가를 스스로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문득문득 생각나기는 했지만 친구를 감옥 속에 보내고, 아니 어두운 망각 속에 묻고 나서 우리는 20년이란 세월 동안 그가 어떤 잠을 잤는지 무슨 밥을 먹었는지 어떤 고통을 부둥켜안고 씨름했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 이영윤, 영인본 [엽서] 서문, 우리 시대의 고뇌와 양심 中

사람이 느끼는 것은 대체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나이 27살, 아직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17살 때 사귀었던 친구들의 모습과 27살이 되어 우연히 SNS 계정을 통해 알게된 그 친구들의 모습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달랐다. 당황스럽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들의 변화가 상당히 성숙한 변화였기 때문이다. 깡패가 될 것 같았던 친구가 경찰시험에 합격해 있기도 했고, 매 소풍마다 특이한 옷차림으로 등장해 조롱을 당하던 친구가 프랑스 어느 패션학교를 졸업하기도 했다. 그들이 혹 외형의 성숙만을 이룬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싶다. 그들의 변화는 지난 10년간의 무수한 인고의 시간이 축적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비교가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고 하지만, 비교는 사람의 본능에 가까우니 잠깐 불행하더라도 나는 저들의 10년과 내 10년을 비교하고, 내 지난 10년을 반성하고 앞으로의 10년을 잘 꾸려나가고 싶다. 외형보다도 지향이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싶다.

'사랑이란 생활의 결과로서 경작되는 것이지 결코 갑자기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한 번도 보지 않은 부모를 만나는 것과 같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는 까닭도 바로 사랑은 생활을 통하여 익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또 형제를 선택하여 출생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사랑도 그것을 선택할 수는 없다. 사랑은 선택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사후에 서서히 경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처럼 쓸데없는 말은 없다. 사랑이 경작되기 이전이라면 그 말은 거짓말이며, 그 이후라면 아무 소용없는 말이다.' 신영복, 사랑은 경작되는 것

위 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그 '만남'의 시작은 어떤 언어로 열어야 하는 것일까. '너와 함께 생활해보고 싶다', '너의 생활과 나의 생활을 서로 공유하고 싶다'라는 식의 말로 대변해야 할까. 상대가 도대체 왜 자기와 그러하고 싶냐고 되묻는다면 나는 무어라 말해야 할까. 아마 아이러니하게도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경작되기 이전이라도 사랑은 존재할 수 있고, 따라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사회란 '모두살이'라 하듯이, 함께 더불어 사는 집단이다. 협동노동이 사회의 기초이다. 재산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함께 만들어낸 생산물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갖는다는 것이 곧 사회의 '이유'이다. 생산과 분배는 사회관계의 실체이며, 구체적으로는 인간관계의 토대이다. 그러므로 고독의 문제는 바로 생산과 분배에 있어서의 소외문제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만들어내고 나누는 과정의 무엇이 사람들을 소외시키는가? 무엇이 모두살이를 '각(各)살이'로 조각내는가? 조각조각 쪼개져서도 그 조각난 개개인으로 하여금 '흩어져'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 수많은 철학이 이것을 언급해왔음이 사실이다. 누가 그러한 질문을 나한테 던진다면 나는 아마 '사유(私有)'라는 답변을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개인과 개인의 아득한 거리,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벽, 인간관계가 대안의 구경꾼들간의 관계로 싸늘히 식어버린 계절. 담장과 울타리, 공장의 사유, 지구의 사유, 불행의 사유, 출세의 사유, 숟갈의 사유. 개미나 꿀벌의 모두살이에는 없는 것이다. 신발이 바뀐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온 밤길의 기억을 나는 갖고 있다' 신영복, 독방에 앉아서

누가 나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아마 '배려'라는 답변을 할 것이다. 지나친 배려는 소외를 낳는다. 사실 우리네 관계는 구경꾼들간의 관계로 싸늘히 식어버린 것이 아니다. 방관보다는 배려의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를 위한 실천없이 그저 서로를 응시할 뿐이다. 사유의 벽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느순간부터 서로의 사유의 벽을 허무는 행동이 큰 실례라고 믿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배려'라 이름 붙였다. 인간은 참 알 수 없는 동물이다. 벽을 세우면서도 누가 와서 허물어주길 기다린다. 스스로의 뼛심을 들여 이를 허물고 나올 생각은 하지 않는다. 배려라는 미명하에 아무도 그 벽을 두드려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사유를 허물어버릴 용기가 없는 개인은 결국 소외되고 만다.

내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 생활도 사유의 한 종류라고 본다면, 나에게는 사유를 공유하고 싶은 사람이 많이들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자신의 유(有)를 공유하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배려라는 이름 하에 내 원(願)을 내려놓았고, 두들기려던 손을 묶어두었다. 방금 글을 쓰며 깨달은 사실이지만, 두들기면 그 벽이 더 단단해져 아예 들어갈 수 없을까봐 두려운 마음도 어느정도 있는 것이다. 동시에 나는 내 사유에 누군가의 사유가 들어와주길 바라고 있다. 나의 지긋한 소외를 멈추고 싶기 때문이다.

'세상의 벼랑 끝에 서서 이처럼 허황된 낙관을 갖는다는 것이 무슨 사고(思考)의 장난 같은 것이지만 생명을 지키는 일은 그만큼 강렬한 힘에 의하여 뒷받침 되는 것이다. 개인의 생명이든 집단의 생명이든 스스로를 지키고 지탱하는 힘은 자신의 내부에, 여러 가지의 형태로, 곳곳에 있으며 때때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내가 지금부터 짊어지고 갈 슬픔의 무게가 얼마만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감당해낼 힘이 나의 내부에, 그리고 나와 함께 있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풍부하게, 충분하게 묻혀 있다고 믿는다. 슬픔이나 비극을 인내하고 위로해주는 기쁨, 작은 기쁨에 대한 확신을 갖는 까닭도, 진정한 기쁨은 대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약 물(物)에서 오는 것이라면 작은 기쁨에 대한 믿음을 갖기가 어렵겠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믿어도 좋다. 수많은 사람을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큰 여운이 남는 문장이었다. 관계에 기쁨이 있다는 말에 적극적인 공감을 표현하는 바이다. 그리고 원하든 원하지않든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에 큰 감사함을 느낀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여러가지 크고 작은 기쁨을 '맛 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라 물질이 주는 기쁨에는 편안하게 안주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오는 기쁨의 빈도는 마치 공기의 그것과 같은 것이어서 편히 안식할 수 있다. 저자의 말처럼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 안에 그리고 내 밖에 기쁨의 가능성이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또 다시 기쁘다.

'형님의 결호네 대하여 네가 몇 가지 객관적 조건에 있어서 불만을 가지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인간을 어떤 기성(旣成)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개인이 이룩해놓은 객관적 '달성'보다 주관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지향'을 더 높이 사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너도 알고 있듯이 인간이란 부단히 성장하는 책임귀속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간관계는 상대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일종의 동태관계(動態關係)인 만큼 이제부터는 그것의 순화를 위하여 네 쪽에서 긍정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될 것이다.' 신영복, 객관적 달성보다 주관적 지향을, 1997.10.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저로서는 옛 선비들이 누리던 그 유유한 풍류를 느낄 수 있는 입장도 못되며, 그렇다고 자기의 모든 것을 들린 듯 바칠 만큼 예술에 대한 집념이나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제 자신의 자세가 확립되지 못하고, 아직은 어떤 애매한 가능성에 기댄 채 머뭇거리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려 하기에 앞서, 붓을 잡는 자세를 성실히 함으로써 먼저 뜻과 품성을 닦는, 오히려 '먼 길'을 걸으려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뜻과 품성이 비로소 훌륭한 글씨와 그림을 가능하게 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중략) 그리하여 최고의 예술작품은 결국 '훌륭한 인간', '훌륭한 역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신영복, 인도(人道)와 예도(藝道), 1976.7.5.

지향하는 바가 있다고 말하더라도, 그 지향에 걸맞는 책임감과 실천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지향이 아닐 것이다. 신영복 씨가 파악한 인간과 같이, 인간이 부단히 성장하고자 하며 스스로의 행동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고자 한다면 우리는 사람을 판단할 때 당연히 그의 기성(旣成, 이미 이룬 것)보다는 그의 지향을 보고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어떤 지향을 가지고 행동하며 책임지느냐에 따라 기성도 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인간이 이같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위의 두번째 글의 문장처럼 인간이 '아직은 어떤 애매한 가능성에 기댄 채 머뭇거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나부터가 그렇다. 그 애매한 가능성이 무엇인지 구체화하지 못했다. 때문에 지향도 많이 흔들리고 있다. 어떤 조건 하에서는 이쪽의 지향이 옳은 것 같고, 또 다른 조건 하에서는 저쪽의 지향이 옳은 것 같기도 하다. 아직은 '훌륭한 인품'에 대한 지향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빠른 시일 내에 나의 애매한 가능성이 확신으로 변하기를 바랄 뿐이다.

Coin Marketplace

STEEM 0.19
TRX 0.15
JST 0.029
BTC 63643.10
ETH 2582.85
USDT 1.00
SBD 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