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와 환경이 만드는 차이
기회의 차이와 환경은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기회의 차이는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지금 집안 환경, 사는 곳, 교육 환경 등을 가리킨다. 어떤 학생 A는 좋은 환경 아래에서 자라면서, 남들보다 좋은 것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다고 해보자. 반면, 어떤 학생 B는 A와는 반대로, 상대적으로 나쁜 환경에서 자라면서, 좋은 것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둘의 미래가 어떻게 다른지 추리해낼 수 있을까? 당연히 A 학생이 많은 경우에 있어서 더 좋은 기회를 얻고, 더 좋은 것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추론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A, B에 대한 환경의 불균형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아니, 그전에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해소할 필요나 권리는 있는 것일까? 그저 B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좋은 기회나 좋은 것을 갖지 못했고, 따라서 가난하거나 수준 낮은 교육을 받고 있다면, 정부는 그에 대한 최소한의 구제책 정도만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정부는 그들의 재정상 여건으로 인하여 B의 환경을 A 보다 더 좋게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부가 A와 B의 불균형을 해소시킨다는 기대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정부가 B에게 '아주 최소한의 (구호물품 같은) 도움이나 길잡이'를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B가 정부의 힘을 빌린다고 해도 A 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없고, 좋은 것을 차지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없어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A 가 B 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랐는데도 불구하고 좋은 것이나 좋은 기회를 차지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대개 A의 박탈감은 굉장히 클 것이라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A가 여전히 좋은 것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다면, 즉 집안의 경제력이나 다른 환경 등이 여전히 좋다면, A는 B 보다 못한 자신을 극복해보고자 다른 대안을 쓸 것이다. 가령, 유학이나 사업이나 재수 등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A는 B 보다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수 있다. 되려, 소위, 도피 유학, 금수저충, 등골브레이커 라는 비난의 표현을 들으면서 상대적으로 B보다 안 좋은 평가를 받게 될 수 있거나, 그러한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B보다 안 좋은 결과를 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A는 정말, 아주 적은 경우이겠지만, 자신보다 잘 나간 B를 다시 이겨낼 수 없을까?
사실 A는 그러할 때 조차도 어느 면에서 이미 B를 계속해서 앞서고 있다. A의 집안 환경이나 경제력이 그것이다. 매우 적은 수를 제외하고, 이미 매우 적은 확률로 타고난 A의 환경은 A를 결코 패배자의 길로 끌어내리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자신의 환경과 비교해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지라도, 그는 B처럼 좋은 기회를 얻어서, 소위 성공해서, 부를 축적할 필요가 없고 또한 부를 축적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쓸 필요가 없다. A는 이미 부를 타고났다. A가 아쉬운 것은 자신이 타고난 환경과 비슷한 수준의 명예를 얻거나 자아실현을 해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B라고 해서 자신이 만족할 만큼의 명예를 얻거나 자아실현을 해냈겠는가? 이 역시 매우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단지 B는 어느 면에서 한 시민으로서 A보다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또한 그들이 A 보다 성공하기 위해 삶 속에 쏟은 에너지와 시간은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아주 대략적이고 느슨하게 고려해볼 때, A는 심지어 매우 적은 경우에, 어느 면에서 자신 보다 성공한 B에게, 패배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A는 지금쯤 어딘가에서 돈이 아닌 다른 꿈을 향해, 그것이 꼭 일반적으로 누군가의 꿈이라고 여겨지지 않을지라도, 달려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A는 이미 B가 차고 있는 족쇄와 같은 경쟁사회 속의 수갑으로부터 벗어났을 수 있다. 가령, A가 예술가나 창작가, 혹은 명예나 자아실현으로서의 사업가, 어떤 경우에서는 소위 양아치가 되었다면 말이다. 그들은 예술가로 성공하지 못해도 적어도 부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을 것이다. 사업 또한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서 벌인 게 아니라면 역시 부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에게 사업은 그저 취미나 명목상의 신분을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A의 직업으로서의 활동들이 잘못되었더라도 그는 즐기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지 모른다. 더욱이, 우리는 또한 그가 양아치의 길을 택했다고 해서 그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가령 강남이나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스포츠카를 타며 배회하는 사람들을 종종 부러워하곤 하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가 우리에게 있었다면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 편하거나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했었을 것이라는 꿈을 꾸지 않는가. 따라서 어느 면에서 A는 결코 B에게 질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러한 환경과 관련하여 그들이 성장하는 이야기만큼은 B가 더 휴머니즘스러울까? 꼭 그래 보이지도 않는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차라리 A의 스토리가 더 좋아 보일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되려 우리는 B의 환경은 대개 힘들고 잔혹한 이야기를 떠올리기 쉬울 수 있어 보인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성공 스토리를 제외하고서는, 심지어 그 스토리에서도 어떤 면은, B의 환경이 A의 환경보다 더 가치 있다고 말할만한 현실적인 근거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내 경험 안에서, A의 환경과 관련한 스토리가 대개 더 화목하고 풍요로운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B는 정말로 A 보다 고생길만을 짊어진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