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의 소확행, 펍(Pub)

in #beer6 years ago

#1
런던에서 만난 젊은 친구는 스스로를 잃어버린 세대라고 표현했다. 진부한 묘사였지만 표정에는 N포세대 못지 않은 좌절감이 실려 있었다. 전세계 지역을 불문하고 싱크탱크가 급여가 박한 것인지 아니면 런던의 사정이 다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월급의 70프로 이상을 먹고 사는 비용(렌트와 먹거리)에 고스란히 날려버린다는 푸념이 이어진다. 게다가 도심 밖으로 한참 밀려나 집을 구했는데도 집세가 월급의 절반을 잡아먹는다니 그런 삶에 희망이 들어설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런던 생활에 만족하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 물음에는 어째 표정이 밝다. 한마디로, 행복하단다.

꿈이 있거나 사랑하는 사람 혹은 희망이 있어서가 아니라, 퇴근 후에 펍에 들러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 세상 부러울게 없는 행복이 찾아온다는 것이 이유였다. 젊은 사람이 패기가 없네 어쩌네하는 꼰대각만 세우지 않는다면 충분히 공감할 만한 소확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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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평범한 영국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펍(pub)은 public house의 줄임말로,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맥주를 마시며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어울리는 일종의 선술집이다. 공적인 공간이라는 뜻을 지닌 public house가 술집을 가리킨다는 점이 무척 흥미롭다. 이 아이러니한 이름은 펍이 단순히 술을 마시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커뮤니티 내에서 낯선 사람들이 만나 소통하고 사교하는 장으로 기능해 온 것이라는 반증이다.

펍을 찾는 사람들은 테이블도 없이 대부분 아무 곳이나 자리를 잡고 서서 떠들어댄다. 왁자지껄하게 오고가는 이야기들은 좁고 높은 실내 구조 덕분에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벽과 천장에 부딪쳐 떠다니며, 들뜬 분위기를 한껏 증폭시킨다. 술김에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가 쉽게 나오는데다 테이블로 구획되지 않는 내부 구조상, 펍에 있는 낯선 사람들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섞일 수 있다.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이 맑아져 개인활동 - 독서나 비즈니스 -에 몰두하게 만드는 카페와 크나큰 차이다.

심지어 펍 바깥에 나와 (런던의 날씨를 생각해 보면) 비바람을 맞으며 한잔 걸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아니 오히려 진정한 영국인이라면 펍 바깥에서 비를 맞으며 마시는 맥주가 최고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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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국 펍의 이름들은 대체로 좀 생뚱맞다. Red Lion, Lamb & Flag, Royal Oak, Kings Arms, Bulls Head 등 뭔가 술과 연관짓기 어려운 이름들이다. 조지 오웰이 “The Moon Under Water”라는 짧은 글에서 무척이나 상투적인 펍이름이라 언급한 바 있던 Red Lion이 현재 영국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펍 간판이다. 대체로 맨정신으로는 작명할 수 없는 종류의 이름들이라 여겨지지만 나름 역사적 연원을 지닌 이름들이라 한다.

펍에서 맛볼 수 있는 맥주의 상당수는 에일(ale) 종류의 맥주다. 단순화시키긴 어렵지만, 시원하고 톡쏘는 맛이 맥주의 전부라고 알고 살던 – 라거(lager)만을 마셔왔던 - 사람이 맛본다면 무엇보다 부드러운 거품과 은은한 과일향이 가장 크게 다가오는 술이다. 라거에 비해 높은 온도 (7-10도)에 마시면 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오히려 미지근한 느낌에 실망할 수도 있다.

영국 술꾼들은 주로 비터(bitter)라 불리우는 페일 에일(pale ale)로 시작한다. 이름 자체로만 생각하다 보면 기대만큼 쓰지 않고 오히려 밍밍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맥주다. 밍밍해서인지 더 다양한 술맛으로 나아가기에 입가심하기 좋은 술이다.

에일에 대해 가졌던 과한 기대가 비터로 사그라든 사람이라면 홉을 더 때려넣은 인디아 페일 에일(India Pale Ale/IPA)을 마셔볼 수 있겠다. 풍부하게 첨가된 홉이 풍기는 알싸함과 과일향이 울대를 놀래킬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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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표적인 공적인 공간이라 불리우는 펍의 존재도 예전만 못하는 모양이다. 여기저기에 치여 최근 펍이 급격하게 줄고 있다는 기사가 종종 눈에 띤다. 말짱한 정신으로도 공적인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는 카페가 최근 영국에서 급증하고 있고 2007년부터 펍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면서 문닫는 펍이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와인과 티비에 밀려 영국인들의 맥주 소비량도 급감하고 있다. 영국이 EU국가들의 평균 맥주 소비량보다도 낮은 수준에 이르렀다니 근거없는 호들갑은 아닐 것이다.

#5
과연 내 친구는 런던에서 끝까지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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