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깎이 대패

in #everyday6 years ago

스크크큭 툭…..푹 스스스스슥
스윽윽윽윽큭푹 싸아악 슥슥슥슥슥

옹기종기 난로 곁에 둘러앉아 스으으윽삭 매끄럽게 연필이 깎여나가는 낭만적인 모습을 기대했던건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외국 동영상에서 봤던 그 능숙한 손놀림은 어떻게 가능한걸까. 엄지와 검지로 단단하게 그러쥔 작은 금속조각은 연필의 나무결을 따라 패이고 걸려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힘을 더 주거나 살짝 비틀면 걸렸던 날이 갑자기 급하게 쏠려나갔다. 연필을 깎는다기보다는 나무 부분이 뜯어지고 흑연은 깊이 도려내지는 느낌이다. 다들 조금이라도 익숙해지려고 초집중을 하고 있어서 대화는 사라져갔다. 대패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있어서 손가락과 손바닥은 물론 어깨 근육까지 욱씬거릴 지경이다.

여름 즈음에 킥스타터에 뜬 연필깎이 대패를 보고 여럿이 공동구매 신청을 했다. 작은 유선형의 반짝거리는 황동대패는 사진과 영상으로만 봐도 느껴지는 무게감으로 나무표면에 닿자마자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트 날이 얼음 위를 지치듯 미끄러지며 아름답게 연필을 스쳐갔다. 그럴때마다 그 작은 대패 위로는 얇게 포를 뜬 듯한 나무조각이 토해져 나왔다. 아. 저 연필깎이 대패가 있으면 나의 모든 연필들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겠어. 돌려서 깎는 연필깎이 대신 굳이 칼로 연필을 깎는 것도 이미 연필 자체보다는 나에게 의미있는 쉼의 시간을 선물하는 행위가 아니던가. 그런데 연필깎이 대패라니. 저 연필깎이 대패는 일년 여 전 부터 드로잉의 주요 도구를 펜에서 연필로 바꾼 나에게 연필을 깎는다는 아름다운 행위에 대패질이라는 희소가치를 더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목공에서 목재를 마감하는 방법으로 사포질과 대패질이 있다. 사포질을 한 표면에 비해 대패가 지나간 자리는 마치 바니쉬를 칠한 듯 매끈하다. 사포는 나무의 표면을 갈아내는데 대패는 넓은 날로 나무 표면을 종잇장처럼 얇게 떠낸다. 일본의 음식재료인 가쓰오부시는 단단하게 굳은 생선을 대패로 깎아서 만든다. 나라마다 대패의 모양과 사용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요즘 목공방에서 흔히 사용하는 일본식 대패는 몸 쪽으로 당겨서 쓰는데 조선의 전통대패와 중국의 대패는 몸쪽에서 바깥으로 밀면서 깎는다. 서양의 대패들도 미는 방식이다. 연필깎이 대패 역시 밀어서 깎아낸다. 연필의 나무부터 시작해서 흑연까지 이어지는 사선의 기울기를 따라 매끄러운 직선을 깎아내는 데 맞춤일테다. 무엇보다 금속덩어리의 무게감을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킥스타터의 많은 프로젝트들처럼 연필깎이 대패도 주문한 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샘플을 올려두고 펀딩을 모집한 다음 실제로 상품의 대량생산까지 이어지지 않아 일정이 미뤄지고 미뤄지다 엎어진 경우들도 여럿이다. 다행히 겨울의 시작쯤 해서 배송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문을 담당했던 친구가 새해에 맞춰 페이스북에 연필깎이 모임 이벤트를 열었다. 이벤트의 설명글에는 방망이 깎던 노인을 패러디한 연필 깎던 노인이 쓰였다.

집에서 멀지 않은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먼저 온 몇몇이 벌써 조립을 하고 있었다. 심플한 디자인의 단단한 박스 뚜껑을 서랍처럼 밀어서 열자 모니터에서만 봤던 노란 금속이 눈앞에 반짝였다. 양 옆은 유선형으로 동그랗게 배가 나오고 앞뒤는 엄지와 검지 손에 맞춰 오목하게 들어간 모양새다. 가운데 대팻밥을 배출하는 삼각형의 빗면에는 Hovel이라는 브랜드가 각인되어 있고 대팻날을 고정하는 금속조각에 붙은 동그란 나사 손잡이가 이 모양을 완성하고 있다. 기대했던대로 금속덩어리가 주는 무게감은 물건의 만듦새에 신뢰감을 더하기에 충분했다.

박스 안에는 커터칼날 굵기에 면도날처럼 네모난 칼날 열두개가 종이에 곱게 싸여있었다. 조심스럽게 날 하나를 꺼내어 대패안쪽면에 자리를 잡아보았다. 처음엔 날 가운데 난 구멍을 나사구멍에 맞춰서 조립했더니 대패 아래쪽으로 대팻날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다시 분해해서 아래쪽의 홈에 맞췄더니 감동스럽게도 작은 자석이 날의 위치를 딱 잡아주는게 아닌가. 다시 조립하고 대패 아래쪽을 확인했더니 대팻날의 각도가 적당했다.

동남아 여행중 샀던 나뭇가지에 구멍을 내서 흑연을 박은 연필을 제일 먼저 골랐다. 진짜 나뭇가지와 대패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기대하며 챙겨온 터였다. 대팻날을 대자마자. 흡. 움직이지 않는다. 날이 나뭇가지 표면에 박혔다. 나뭇가지가 뜯겨져나갔다. 아. 이건 아닌가보군. 한번도 깎지 않은 새 연필을 꺼냈다. 평소에 칼로 깎을 때 가늠하는 시작점에 대팻날을 대고 밀었다. 흡. 안나간다. 너무 깊게 박았나? 대패 바닥면과 연필 면을 맞춰봤다. 그냥 스쳐간다. 음.. 이미 사용하다가 무뎌진 것들을 먼저 깎아볼까? 신에게는 아직 36색의 색연필이 있습니다. 그나마 이미 각도가 만들어져 있는 색연필을 깎는 건 조금 진전이 있었다. 36색 중 거의 반절의 색연필을 깎고 보니 연필심의 뾰족함은 들쭉날쭉 천차만별이었다. 많이 깎아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연필 하나가 짧아지도록 계속 깎아낸 친구도 있고, 연필심의 모양을 예쁘게 다듬느라고 세공을 하고 있는 친구도 있었지만 공통점은 쉽지 않다는 거였다.

짧은 시간동안 너무 많은 에너지를 사용해버려서 배도 고팠다. 배달음식을 주문하고 연필심이 묻어서 시커매진 손을 닦으며 기대했던 분위기와 다르게 너무 열심히 연필을 깎아대던게 우스워서 즐거워졌다. 앞으로 각자 기술을 연마하여 한 달 후에 다시 만나 누가누가 더 잘 깎는지 겨뤄보자고 했다.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그 날 가져와서 책상 위에 던져둔 후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지금 다시 들어봐도 반짝거리는 금속의 적당한 무게감과 유선형의 만듦새는 손색이 없다. 하지만 며칠 전 책방 리스본에서 본 전동 연필깎이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손 댈 필요도 없이 연필을 집어넣기만 하면 드르르륵 3초만에 완성된 연필의 모양을 만들어주던 전자동 연필깎이. 연필을 깎는 동안 주어지는 쉼의 시간보다 연필을 빨리 깎고 나머지 시간에 쉬는 것도 괜찮을지 몰라. 하지만 이상이라는 영역에 연필깎이 대패의 아름다움을 두고 완벽한 도구를 잘 다루지 못하는 나의 기술을 현실로 인식하면서 다시 커터칼을 꺼내어 연필을 깎는 소소한 즐거움에 만족할 것 같다. 지금처럼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하고 한번씩 들어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연필깎이 대패는 다시 박스 안에 잘 넣어두고 가끔씩 생각날때 마다 꺼내보아야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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