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상처 입은 용
작곡가 윤이상은 독일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중 간첩 혐의를 받고 한국의 정보원에게 납치되어 서울로 끌려온다.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집 '윤이상 상처받은 용'에 그가 받았던 모진 고문들과 수감생활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손발을 통나무에 묶어 매달고 얼굴 위에 흠뻑 젖은 천을 덮고 물을 뿌리는 고문, 주사, 구타가 반복되었다. 윤이상은 고통과 절망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재판에서 무기형을 언도받았지만 각국의 예술가들과 독일 정부의 구명노력으로 '대통령 특사' 형태로 풀려나게 된다. 당시의 대통령은 박정희였다.(윤이상은 박정희와 동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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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중 크게 동감했던 내용.
루이제 린저
_ 저는 제 옥중 시절을 잊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결코 하지 못했을 몇 가지 중요한 경험을 했으니까요. 당신은 어때요?
윤이상
_ 나는 그런 건 모두 경험하지 않았던 편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루이제 린저
_ 이런 엄청난 괴로운 경험이 당신의 예술을 더욱 넓은 차원으로 이끌었다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윤이상
_ 예술은 그런 경험이 있든 없든 그것과는 독립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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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된 영상의 첼로 연주를 보면 그의 초기작 ‘콜로이드 소노르(Colloides Sonores: 교차적 음향)’가 처음 연주될 때 에피소드를 생각나게 한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윤이상의 곡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름도 모르는 작은 나라에서 온 동양인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당시는 1961년)
한 첼로 연주자가 "이 피치카토의 글리산도는 연주할 수 없습니다. 기술적으로 절대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하며 연주를 거부했다. 윤이상은 직접 첼로를 연주해서 그 피치카토의 글리산도가 충분히 연주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 후 단원들의 거부감은 줄어들었다.
지금은 이런 실험적인 연주 방식이 '일반적'이 되었지만 55년 전에는 꽤 급진적인 기법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동양의 음을 서양악기에 구현한 것을 넘어선 윤이상만의 음악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고향인 '한국'정부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그 야만의 시대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지만, 이 기회에 그 일부라도 정리가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