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25, 8월 종파 사건 군내 숙청steemCreated with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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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8월 종파사건은 1953년 스탈린 사망이후 소련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존의 공산주의 운동을 벗아난 소련을 추종하는 북한내의 연안파와 소련파들의 김일성에 대한 도전이었다.(박영실 218)

김일성은 1957년 12월 5-6일 개최된 확대 전원회의에서 반종파투쟁을 1년 더 연장하자고 주장했다.

1958년 군에 대한 반종파주쟁이 지작되었다.

195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에서 김일성은 ‘조선인민군은 항일무장투쟁의 계승자이다’라는 연설에서 “반당종파분자들의 중심인물들은 신민당중신”이라고 규정하면서, 연안파인 김을규, 최왈종등을 공격했다.

이들을 방치하고 허위보고한 최종학등 소련파도 비판했다. 총정치국장인 소련파 최종학의 해임이 진행되었다. 최종학에 대한 비판은 소련식 군대정치 사업방식인 군사단일제, 즉 유일관리제에 대한 비판이었다.

1958년 중국인민지원군의 완전철군을 염두에 둔 군내 사상적인 단결과 사전내부 정비작업의 일환이기도 했다. 이로써 연안파와 소련파의 군내 핵심세력이 완전히 와해되었다.

1958년 10월 당중앙 상무위원회에서 반혁명분자들을 더욱 철저히 진압할 것을 제기했다. 연안파인 평양위수사령관 장평산등이 쿠데타를 시도했다는 사실을 문제삼아 연안파를 숙정했다.

군내 숙청은 1958년 고위간부를 중심으로 1959년 부터는 전군의 하급부대에까지 확대되었다. 군인 개개인에 대한 ‘사상검토’와 각급부대에 대한 ‘집중검열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군대내의 연안파와 소련파 대부분이 숙청되고 그 자리에 만주파 군인들이 진입했다.

이를 통해 김일성은 연합사령부 설치이후 상실했던 군에 대한 독자적인 인적통제기반을 완벽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박영실216-217)

올린이:admin2019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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