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곳의 언더조직 폭로전 감상
“지금 하신 그 이야기는, 꼭 사회 운동을 하기 위해서, 노동자 대회나 5.18때 광주를 데려가기 위해서 친구를 만들란 말씀 같은데요?”
대학 새내기 시절, 우연히 들어갔던 봉사활동 동아리는 운동권 단체와 연결되어 있었다. 세상을 좀더 멋있게 바꾸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했던 시기였으며, 각종 토론 프로그램과 출판 시장에서 진보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이 화제를 몰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가파르게 올라가는 등록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안 가자니 미래가 불안한 이들이, 늘 그렇듯 대학으로 몰려든 때였고, 대통령은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대운하 같은걸 파겠다거나 하던, 그런 나라였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글빨 좀 날린다고 하는 이들은, 20대가 세상을 바꾸는 데에 관심이 없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라며 울분을 토하고는 하던 날들이었다. 운동권같은 세계를, 한번쯤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했었다.
그 단체는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는 연대’와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학과 학생회, 동아리 활동에 들어가 요직을 차지해서 구성원들에게 사회운동을 제안하자는 이야기를 했다. 옷 속으로 거미가 기어다니는 것 같은 불쾌감을 느꼈다. 질문을 던졌다. 위에 말한 것처럼 정돈된 것 같진 않기도 하고, 그래도 의미는 전달되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아마 ‘우리 사회에서 이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거나, 대충 그 비슷한 대답을 들었던 것도 같다.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이기는 하다. 확실한 것은, 그 당시에 들은 답변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일이, 솔직히 그리 와 닿지는 않았다. 용산 철거민들의 이야기를 하고, 한미 FTA 같은 걸 반대하곤 했던 것 같다. 책이 좋아 차려진 독서모임에 숟가락을 얹긴 했지만 책읽기 외 활동은 흐지부지했고, 곧 도망치듯 군대로 떠났다.
군대를 다녀왔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강정 마을의 해군기지를 반대하거나 밀양 송전탑 문제로 싸우고 있었다. 그 사이 국가 장학금이라는 제도가 생겼고, 등록금이 필요했던 대학생들보단 그리 필요해보이지 않는 대학생들에게 지급이 되는 일도 많았으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사람들은 최저시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가장 낮은 곳이, 도대체 어딜까.’ 같은 고민을... 사실 하지는 않았다. 알바 아니었다. 후련하게 돌아온 학교에선, 떠밀리듯 과 학생회장을 맡았다. 많아진 관계는 그만큼 많은 돈을 필요로 했다. 가끔 아르바이트를 했다. 최저시급은 4320원이었고 편의점은 당연하다는 듯 4000원을 줬다. 알바였다. 사회 운동을 위해 사람 만나고 다니는 사람이었으면 이런 귀찮은 거 안 맡겼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가끔은 들었다.
그때쯤 아르바이트와 같은 이야기들도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을 위해 노조를 만들었다며, 지금 당장 급한 것은 최저임금 1만원이라고 말했다. 정말로, 저 사람들은 저것이 급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봉사활동 동아리에서, 또 독서모임 동아리에서, 또 학생회에서 그러길 바랐듯이, 단체의 뜻을 따라 움직일 사람이 필요한 것일까, 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과 학생회장을 마치고나서, 망해가던 독서 모임을 재건했다. 읽고 싶은 책들을 한가득 읽었고, 독서 취향이 맞는 친구가 늘었다.
몇 년이 지났다. 폭로가 이어졌다.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을 위한다는 사람들이 사실은 어떤 언더 조직을 위해서 일해야 했다고. 놀랍다기보다는... 여전히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가까이 있고 싶었던 것이라면, 타인의 삶에
조금은 더 가까웠어야 하지 않을까.
도피자들의 은신처가, 지옥이 되어버린 현장.. 광주도청에서 목숨걸라고 윽박지르던 선배들과 그 친구들이 보이는 추태가 참..
약자를 위한다며 약자를 외면하는 약자의 가면을 쓴 조직. 흥미로운 글입니다. 뒤늦게 발견하여 보팅이 보탬이 되진 못했지만, 이런 에세이를 종종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밌는 글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