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내의 그림

in #kr6 years ago (edited)

아내의 그림

아내는 스무 살 때 화재사고를 겪었다. 화재는 아내와 내가 일하던 공장단지에서 일어났다. 아내는 그 일로 친한 동료 셋을 잃었고 평생 극심한 공포증에 시달렸다. 우리는 곧장 일을 그만두고 나의 고향인 고흥으로 내려왔다.

나는 그날 출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길이 한참 번진 후에야 연락을 받고 공장에 갔다. 눈앞에서 거대한 화염이 공장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조금의 희망도 가질 수 없을 만큼 큰 불이었다. 나와 아내의 소박하지만 간절했던 꿈들도 산산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아내가 직접 그린 그림이었다.

“삶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 그림을 떠올려 줘.”
아내는 임신 소식을 알리며 그림 하나를 내게 주었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종이에 그린 그림이었다. 내가 피식 웃으면서 왜? 하고 물었을 때 아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길거야. 가장이 그런 책임감 정도는 있어야지.”
아내의 그림은 뭐라 설명하기 애매했다. 흰색 바탕에 약간의 명암을 넣었는데, 그 위에 검은색 물감을 얼룩덜룩하게 덧칠해놓아서 꼭 무언가를 그리다 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림을 건네는 아내의 얼굴에 뿌듯함이 가득 번져 있어서 나는 아내에게 그림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아내의 그림을 지갑 깊숙이 넣어두었다. 줄곧 행복한 나날들이 이어졌으므로 그림을 떠올릴 필요는 없었지만, 나는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마다 아내가 말한 가장의 책임감을 양 어깨에 두둑이 채워 넣었다.

아내가 그 불구덩이에서 빠져나온 것은 기적이었다. 뱃속에 있던 첫째 세연이 덕에 아내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아내의 모성애가 아내와 아이를 살린 그 순간 나는 아내의 그림을 떠올렸다. 그 일로 나는, 내가 아내의 그림을 떠올린 덕분에, 그 그림이 나의 유일한 가족을 살려준 덕분에, 내가 다시 살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지켜야하는 것들이 점점 많아질수록 나는 아내의 그림을 부적처럼 더욱 소중히 간직했다.

고흥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태어난 곳이긴 했지만 남아있는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나는 막노동부터 청소부, 택시 운전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렇게 벌어도 네 식구를 먹여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아내는 식당 서빙 일을 시작했다. 화재 트라우마 때문에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지도 못했던 아내였다.

그 때문이었는지 아내는 나날이 날카로워졌고 작은 것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거의 매일 불면증을 겪었는데 겨우 잠이 들었다가도 전등 스위치 누르는 소리나 물 따르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면 화들짝 놀라면서 깨곤 했다. 꿈을 꾸지 않은 날이 없었고 꿈에서 본 것들이 실제 눈앞에 나타난다고 자주 말했는데, 그게 어떤 상황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와 동행하지 않고서는 집에서 멀리 나가는 것을 꺼려했고 무엇이든 길게 말하지 않았다. 아내는 쉬는 날이면 주로 테이블 귀퉁이에 앉아 혼자 그림을 그렸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림그리기에 몰두하고 난 다음에는 꼭 그림을 갈기갈기 찢어 변기통에 버렸다. 아내가 점점 폐쇄적으로 변할수록 모든 게 다 능력이 부족한 내 탓인 것 같았다. 그래도 아내는 고생만 시킨 내게 화 한번 내지 않았다.

그런 아내가 느닷없이 서울로 바람을 쐬고 오겠다고 했다. 그때 아내는 ‘더 지체할 수 없다’는 표현을 쓰며 두 아이들에게 꼭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큰 딸 세연이가 14살, 둘째 미연이가 11살 되던 해였다. 어려운 형편에도 아이들은 무탈하게 잘 자랐다. 아내의 제안에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멀리 보내는 것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이 여행을 계기로 아내가 예전의 밝고 씩씩하던 모습을 되찾기를 바랐다. 나는 서둘러 통장에 남은 돈을 확인했다. 저금할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줄 수 있는 거라곤 14만원이 전부였다. 나는 14만원을 모두 인출해 아내와 아이들의 여행길에 보탰다.

출발하기 전날 아내는 캐리어에 옷가지를 챙겨 넣으며 이런 말을 했다.
“이상하다. 이번에는 그 꿈이 안 나오네.”
벚꽃이 필 무렵이면 아내는 매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했다. 내가 길 한복판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고 있고 자기는 그런 나를 멀찍이서 지켜보는 꿈. 다가와 일으켜 세워주고 싶은데 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서, 그런 내 위로 하얀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면 자기가 나에게서 점점 멀어진다는 거였다. 아내가 그 꿈을 꾼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곳곳에서 꽃내음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아내의 말에, 나는 그저 올해는 봄이 좀 늦게 올 건가보다고 생각했다.

창 너머로 색색의 꽃잎이 흐드러지게 피던 날, 꽃보다 더 상기된 세 모녀는 첫 여행에 잔뜩 들떠있었다. 몸집만한 캐리어 두 개를 끌고 어느 때보다 요란한 소리로 집을 나선 아내와 아이들은, 그 길로 영원히 내 곁을 떠났다. 서울 종로의 한 여관에서 14년 전 봄날 그때처럼 똑같이 화재사고가 났다고 했다.

허망한 장례를 치르는데, 우습게도 아내의 그림이 생각났다. 내가 그림을 떠올리지 못해서 아내와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을까, 돈을 조금이라도 더 보탰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동네 사람들이 내 앞에 엎드려 소리를 내며 울었다. 밤새 지도를 보느라 한잠도 못 잤다는 아내의 달뜬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아내와 아이들 곁으로 가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텅 빈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지갑 속 아내의 그림을 꺼냈다. 그리고 나는 화들짝 놀라 지갑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림 속에는 까맣게 그을린 세 개의 벚꽃 잎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꽃잎이었다. 새카만 꽃잎은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처럼 보였다.

불현 듯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날, 지나가던 어떤 노인이 내 등 뒤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어떤 종이가 기회가 될 수 있다. 작은 것도 허투루 보지 말 것.”
꼭 무언가를 보고 읽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때 나는 죽으러 가는 길이었다. 꿈도 미래도 없는데다 외로움에 사무쳐있어서 어떤 이유를 떠올려도 더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상한 노인을 지나쳐 공장 창고에 들어선 바로 그때, 두 볼이 발그레한 여자를 마주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여자는 한순간 내가 더 살고 싶은 이유가 되었다.

나는 이제야 모든 것을 알 것만 같았다. 지난 14년은 신이 내게 준 기회이자 선물이었다. 화재로 생을 잃을 뻔 했던 아내는 결국, 마치 예정처럼, 또 화재로 생을 마치고 말았지만 아내 덕에 나는 평생토록 곱씹고 싶은 황홀한 나날들을 얻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의 온기가 남아있는 방에 홀로 앉아 나의 세 꽃잎을 차례로 떠올렸다.
낡고 바랜 아내의 오래된 그림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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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죠? ㅠㅠ

네 맞습니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읽는동안, 얼마전 사고가 생각났어요. ㅠㅠ

저 남자의 입장이 되어 몰입해서 봤습니다..
때론 소설에서 있을 법한 일들이 세상에 일어나곤 하지요..
너무 판타지 같다 하며 읽다가 근래 들은 뉴스들이 떠올라
이내 마음을 바꿨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홍보해

네 비극을 비극으로만 보고싶지 않았습니다. 그 뉴스에 너무 가슴이 아팠거든요.. 귀한 시간 내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계속 쓸 거예요. 계속 계속 계속! 감사합니다~~~~

소설인거죠? 다행입니다ㅠ
엄청 몰입했었네요.
몇 주 전 있었던 화재사건과 오버랩되면서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됐었어요ㅎ
팔로우 하고 갈께요.

ㅠㅠ 시간내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족에게는 어떤 말도 들리지 않겠지만, 일어날 일들을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고 오히려 함께 했던 시간들이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살아갈 힘이 조금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팔로우하겠습니다!

글을 읽으며 어느 순간부터 몰입이 되었습니다. 공감했고 슬펐습니다. 이런 글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팔로우하고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이런 글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문구가 너무 뭉클하네요.. 예쁜 댓글 감사합니다. ㅠㅠ 저도 팔로우하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소설인가요??
울뻔했어요. ㅠㅠ

네.. 허구지만 얼마 전 있었던 사건을 바탕에 두고 있어요. 가슴아픈 사건이었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와 실화인지 알고 심각하게 읽다가 댓글보고 소설이란걸 알고 안도의 한숨을... 정말 몰입도있게 읽고갑니다. 오랜만에 소름돋네요..ㅎ 팔로우 하고 갑니다!

아.. ㅠㅠ 감사합니다... !!!! 큰 힘이 되는 칭찬이에요. ㅜㅜ 저도 팔로우했습니다.^^

@vitamink님 안녕하세요. 개수습 입니다. @showroo님이 이 글을 너무 좋아하셔서, 저에게 홍보를 부탁 하셨습니다. 이 글은 @krguidedog에 의하여 리스팀 되었으며, 가이드독 서포터들로부터 보팅을 받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우와 제가 처음이라 아직 잘 모르겠지만.. 리스팀과 보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환영해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vitamink님 스팀잇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스팀잇 정착을 도와드리기 위하여 @bramd님의 부탁을 받고 찾아온 @easysteemit 입니다. 힘찬 출발을 응원하는 의미로 서포터 보팅을 해드립니다. 그리고 더 많은 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기 위해서 @krguidedog을 통해 @홍보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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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감사합니다!! 이지스티밋과 함께 찬찬히 스티미언이 되어보아야 겠어요~~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댓글보며 소설인걸 알고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
팔로우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더 흥미롭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이야기를 부지런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팔로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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