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millennial editors' furious typing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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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취사선택된다. ‘당사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라는 말은 그다지 간단하지 않다. 금전적 이득 때문일 수도 있고 통제 권력의 문제일 수도 있고 감정적 보상의 차원일 수도 있고 이야기를 흥미롭게 꾸며내고픈 욕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결국은 그 기억이 현실이 된다.

글쓴이가 왜곡을 알고 있을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실제로 나의 경우에도, 과거의 일기를 꺼내 보았을 때, 지금 기억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거기에는 펼쳐져 있었다. Albert Einstein은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작은 문제에 대해 진실을 신경 쓰지 않는 자는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도 믿을 수 없다. Whoever is careless with the truth in small matters cannot be trusted with important matters” 나의 경우에 맞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뜨끔했다.

다시 들어간 출판사에서는 3개월 사이 신입사원을 열 명 가까이 새로 뽑아놓았다. 이런 소규모 회사에서는 꽤 보기 드문, 이른바 동기 group이 형성된 것이다. 분야도 폭 넓어서, 편집자뿐만 아니라 designer, marketer, 제작자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술도 먹고 소모임도 결성하며 몰려다녔다.

물론 열 명 다 그 유대감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무려 3개월 이상 선배인 나는 그 모임에 합석할 수 없었다. 그들보다 1개월 선배인 어느 편집자도 그들과 자리를 섞을 군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3개월 만에 하나 더 바뀐 게 있었다. 그제야 computer system이 모두 Windows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말단 직원들을 chatting의 시절로 이끌었다. 나는 ‘운동 사회 성폭력 근절을 위한 100인위’의 실명 공개 사건에 온몸을 던졌다. 거칠기 짝이 없고 미숙했던 초창기 young feminism 시절, 나의 지인의 지인이, 단지 바람둥이라는 이유로 실명 공개의 대상이 되었고 나는 그 남자를 옹호하는 게시판 전쟁에 뛰어들어 개년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논쟁을 구경하던 친구들은 나에게 직장을 다니는 게 맞느냐고, 그 많은 글은 다 언제 쓰는 거냐고 물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피곤한 근무 시간을 보내던 와중,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partition 너머 신입 사원 group 역시 monitor에 고개를 푹 박고 열에 들뜬 표정으로 무언가 미친 듯이 typing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잘못된 feminist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지만, 저 애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애들은 서로 chatting을 하고 있었다. 간밤 술자리에서도 못 다 나눈 이야기들을 근무시간에 이어 맹렬한 기세로 나누고 있었다. 알 수는 없다. 그들 사이에서도 혹시 성폭력 문제나 연애 문제가 불거져서 그걸 해결하려 분노의 chatting을 하고 있는 건지도.

다만, 지금 A는 분명 B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A가 미친 듯이 글자를 처넣는 동안 잠시 B는 가만히 있다가, A의 typing이 끝나자 맹렬한 기세로 typing을 시작했다. 둘의 사이는 약간 떨어져 있었고 서로 절대로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상대방의 모습이 주변 시야로 잡힐 것이었다. C와 D, 그리고 E는 셋이 함께 일정한 rhythm으로 타자를 치는 것이, group chatting을 하는 것 같았다. 웃음을 꾹 참는 굳은 얼굴 위로 홍조가 퍼져 있었다.

나는 그들을 한참 쳐다보았다. 어떤 사람들인지, 나와 무슨 상관인지도 잘 모르는 가상의 적을 향해 정치적 분노와 정의감을 불태우는 내가 더 보람된 근무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지, 회사 내 동료들과 갖은 감정으로 얽혀, computer chatting window로까지 대화를 나누는 그들이 인생 최고의 사교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얼마 후 성폭력 남성들까지 옹호하던 변희재라는 사람으로부터 청탁 email이 왔다. internet에서 나의 활약을 잘 보고 있다면서, 자신이 새로 창간하는 매체에 필자로 참가해 달라고 했다. 나는 너와 생각이 많이 다른 사람이라며 거절하고, 논쟁에서도 차차 빠져나왔다. 결국 지나친 정의감은 나의 진정한 적들을 이롭게 할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더 잘 알 필요가 있었다.

몇 년 후, 그때 나와 반대편에 서서 논쟁을 했던, 대학원 때의 친구를 술자리에서 만났다. 그녀는 나에게 그때는 자기가 생각이 좀 짧았을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잘못한 것은 없었노라고 말했다. 내가 말없이 한참을 노려보자,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나는 작은 승리감을 느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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