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할아버지가 자손에게 주는 글

in #kr3 years ago

제주도에 계신 구독자분이 작품을 요청하셨습니다.

아! 제 유튜브 캘리 채널은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dztarmSjAtcuu0fYbPhisQ

Tatao CalliArt
한자 한글 서예를 포함한 캘리그라피 방입니다. 캘리그라피에는 당연히 펜글씨도 포함하지요. 그리고 붓으로 그리는 것도 캘리의 한 부분입니다. 타타오의 캘리아트- 당신께 유익을 드리려 합니다. 함께 해요.^^

www.youtube.com

이 분은 예전에도 몇 차례 저에게 작품을 의뢰하셨죠.

참 두터운 인연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을이 짙어지면 제주도에 갈 참인데 만나 뵈면 얼마나 반가울까요?

아! 이번 작품 주제는 좀 특이합니다.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시를 작품으로 소장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내용을 풀어보니까 너무 아름다워서 저희 캘리아트 구독자님들께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한시 칠언의 경우에는 4,3으로 나눠서 풉니다.

시행시지時行時止 - 때로 가고 때로 멈춘다… 우리의 삶이 그렇죠? 일도, 사랑도, 운동도, 하면 멈춤이 있고 멈추면 또 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삶을 이루는 호흡이며 숨결이죠.

그런데 그다음 구절이 선의근(先宜謹)입니다. 어떻게 해석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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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오 서재

먼저 선, 마땅할 의, 삼갈 근

먼저 마땅히 삼가라? 여기서 핵심 자는 근(謹) 이지요. 삼가다, 신중하다, 조심하다-는 뜻입니다.

뭔가를 행할 적에 신중하게, 사려 깊게 하라는 뜻입니다. 말 한마디를 할 적에도 세 번 생각해 보고 말하라, 행동할 적에도 세 번 생각해 보고 행하라는 공자 님의 말씀이 있었죠?

그것이 지극함을 이르는 것이며 단 한 글자로 표현하면 근(謹)입니다.

즉, 시행시지 선의근- 때로는 가고 때로는 멈추되, 먼저 마땅히 신중해야 한다.

첫 구절부터 그 심도가 예사롭지 않네요. 이제 설레는 마음으로 두 번 째 구절을 대해봅니다.

혹달혹궁(或達或窮) - 혹시 혹, 도달할 달, 혹시 혹, 궁할 궁,

혹은 목표를 이루고 혹은 못 이루어 궁해도- 이런 의미가 되겠죠?

우리가 도모하는 일은 언제나 뜻대로 이뤄질 리는 없습니다. 왜일까요?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1등이 되기를 바라지만 그러면 어느 누구는 1위 자리에서 밀려나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수많은 바람들이 엇갈리면서 삶이라는 직물을 짜나가는 것이니 당연히 내 뜻대로만 될 이유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되겠죠.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요?

다음 세 글자를 봅니다. 막배사(莫背思) 말 막, 등 돌릴 배, 생각할 사

막(莫)은 don’t입니다. 생각을 등 돌리지 말라? 가닥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思)는 무엇일까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사(思)는 그저 think 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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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오 캘리아트

하지만 옛사람들의 사(思)는 숙고 끝에 나온 의지이며 신념이기도 합니다. 또 한 공자님은 사서삼경을 다 모아 세 글자로 축약하면 사무사(思無邪)라 하였죠.

사무사는 “생각 속에 삿됨을 없이 하라!"라는 말입니다.

옳은 것, 바른 것 만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옳지 않은 것을 말하지 말고 옳지 않은 것은 행하지도 말라는 뜻이죠. 사무사(思無邪)의 사(思)는 두뇌에서 굴리는 잔머리가 아니고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양심을 뜻하기도 합니다. 막배사는 양심에 어긋나지 말라. 초심을 배신하지 말아라. 이런 의미로 웅장한 확장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달혹궁 막배사는- 성공했든 궁핍하든 초심을 뒤집지는 말아라

이렇게 볼 수 있겠네요

세 번째 줄로 넘어가 봅니다.

영고성쇠(榮枯盛衰) - 번성하고 쇠락하는 모든 것이

무정로(無定路) - 정해진 길이 없느니라.

여기서 해석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면 정해진 성공 길은 없는 것이니 대충 살라는 말씀은 아니겠죠?

삶의 패턴은 언제나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경제도, 문화도, 사람의 마음도, 관습도, 파도를 타듯이 움직이죠. 그 흐름을 잘 타야 뒤떨어진 사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는 고정된 반응이 아니라 유연한 대응인 것이죠.

마지막 줄을 보겠습니다. 어떤 지혜를 자손들에게 열어주셨을까요?

진수순연(盡隨順緣) 다할 진, 맡길 수, 따를 순, 인연 연

여기서 초점을 둘 글자는 인연 연(緣)입니다.

인연이란 뭘까요?

내가 태어난 곳, 다닌 학교, 성씨, 민족, 가문, 내 개성, 배운 것, 내 욕망, 세상이 내게 바라는 것-이런 모든 이어지고 연결된 것들을 인연이라고 합니다. 나 하나가 똑 떨어진 존재 같지만 이런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인연에 연결되어 있는 실뭉치인 것입니다.

그 인연에 따라 내 할 일을 다합니다. 배운 것을 써먹어야 하고, 가문이나 성씨에 누를 끼치지 않아야 하며, 가족이나 세상이 바라는 책임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뿐일까요?

여기에 놀라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근원(復根源) 돌아올 복(復) 뿌리 근, 근원 원

근원으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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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오 캘리아트

근원이 무엇인가요? 나무의 뿌리가 근(根)이며 샘의 발원지를 원(源)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근원은 무엇인가요? 어디입니까? 언제죠?

이것이 철학의 시작이며 동양학의 눈부신 결정체이기도 합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젊을 때 열심히 자기 책무를 다하고, 세상과 가족에 기여하며, 노후에는 근원을 탐구했습니다. 내가 어디서 왔으며 지금은 무엇이고 필경 어디로 가는가?

그래야 이 생이 잘 정리되지 않겠어요? 이 생에 얻은 경험과 지혜의 황금 물방울이 내 영혼에 쌓이도록 하는 시간인 거죠.

진수순연 복근원은 – 인연 따라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마땅히 근원으로 돌아갈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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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오 캘리아트

이렇듯 할아버지가 자손들을 위하여 깊은 사유 거리가 될 시문을 남김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요. 돈과 땅을 남기는 것 못지않은 훌륭한 유산일 것입니다.

멋진 할아버지, 그리고 손주분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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