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단상] 급전 땡겨 주는 곳

in Korea • 한국 • KR • KO3 years ago

급전 땡겨 주는 곳

예전에 그런 일이 한 번 있었습니다.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을 갔는데, 서울에 급하게 왔다가 지방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있었던거죠. 그 때 지갑을 어디선가 흘렸어요. 스마트폰도 없고, 인터넷 뱅킹도 안되던 시절 - 스무살 때 쯤 이었으니 어느덧 20년 전쯤이군요. 지방엔 바로 내려가야 하고, 이미 저녁 8시쯤? 돈은 하나도 없고, 뭐 여튼 난감할 때였죠.

생각 난 곳이 파출소였어요.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가서 상황을 이야기 하면 한 5만원 정도는 쉽게 빌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모두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는겁니다. 신분증을 맡긴다고 말했는데도 도와줄 것 같지 않더군요. 휙 돌아나오는데, 저보다 한 대여섯 살 많아 보이는 20대 중반의 순경이 자기가 개인적으로 빌려주겠다며 믿는다고 4만원을 빌려주더라구요. 그렇게 무사히 돌아와서 계좌로 돈을 돌려줬던 적이 있어요.

그 사이에 길거리에서 돈없다고 하는 차비 달라는 사람을 서넛 본 적 있는데요. 항상 그 때 제 처지가 생각나서 모른체 하기가 좀… 그런데 막 나중에 보면 안가고 그자리에서 여러명 한테 같은 방법으로 돈 얻어내는 사람들도 많고, 또 십만원도 넘는돈을 막 빌려줬다가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속이 쓰리더라구요.

어제 휴가 갔다가 기다리는 기차 플랫폼에서 갑자기 한 명이 다가 왔어요. 세면도구와 물이 남는게 있으면 줄 수 있냐고, 자신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지방에서 올라와서 내일 면접을 봐야 하는데 지갑을 잃어버려서 세면도구와 물을 좀 달라고 하더군요. 그 때 마침 1분 정도 밖에 정차하지 않는 기차가 도착했습니다. 짐은 무겁지, 기차는 도착했지. 난데없이 세면도구와 물을 달라니…

생각해보니 제겐 세면도구가 있는데, 그야말로 칫솔치약, 비누, 그리고 스킨 한 병… 면접볼 때 씻어야 한다는데, 역사에서 씻고 아침에 가야 한다니 어째요. 스킨과 치약을 급히 꺼내 이거라도 쓸려면 쓰시라고, 칫솔은 못주고 비누도 쓰던 거 줄까 물어보며 건네니 뭔가 필요한 걸 얻은게 아니라 이게 뭐냐고 되묻는군요. 그리고 비누를 줄까 물어보니 의아한 표정으로 또 되묻는군요. 흠… 쓰던 치약과 스킨은 좀 그런가. 새것이 있으면 좋을텐데. 칫솔도 없을텐데 치약만 주면 좀 그런가. 물이 있으면 줄텐데… 그 몇 초간에 엄청 많은 생각이 왔다갔다 하면서도 제 신경은 온통 기차에 가 있습니다.

아니면 신분증 맡길테니 세면도구와 물 살 돈을 좀 빌려주면 안되겠냐고 말합니다. 이미 기차는 출발 할 분위기입니다. 번개같은 속도로 지갑에서 있는돈을 다 꺼내니 5천원짜리 두 장. 그냥 쥐어주고 돈이 이거 밖에 없으니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말하고 기차로 뛰어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끝까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 그는 손에 쓰던 치약, 거의 다 쓴 스킨 한 병, 그리고 5천원 짜리 두장을 들고 나를 쳐다보는 멀뚱멀뚱한 표정이 급한 저의 뒷전으로 느껴지는군요.

이게 좋은 일을 한 건지, 오히려 생색만 낸 건지, 아니면 홀리거나 당한 건지… 서울을 향하는 기차 속에서 내내 그가 내게 받은 스킨과 치약을 쓰레기 통에 버렸을까, 아니면 사용했을까. 뭐 이런 의미없는 생각들을 한참이나 했네요. 아마도 그는 어떤 이유에서건 돈을 좀 땡기려 했는데 내가 가방속에서 쓰던 스킨과 치약을 꺼내니 아마 당황한 것 같습니다. 오늘 생각해보니 보통은 차비를 빌리기 마련인데, 세면도구와 물 살 급전이라니…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잘 씻고 면접 잘 봤기를 은근히 기대해봅니다.

살다보면 급전이 필요할 때가 있기 마련이죠. 어디 차비나 생활비 급전 땡겨주는 신용대출은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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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수님은 사십짤.
  2. 진짜 급했는지, 그렇게 얻어 먹고 사는 사람인지 영원히 풀지 못함. ㅎㅎㅎ
 3 years ago 

ㅋㅋㅋㅋㅋㅋ

그 기차역을 다시 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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