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in #kr-psychology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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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이미지 by @gamiee

주변을 둘러보면 남들 보기에 대단한 사람들인데도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석사를 마치면 박사를 해야 한다고, 박사를 마치면 좋은 저널에 논문을 내야 한다고, 논문을 내면 연구비를 더 잘 받아야 한다고, 연구비를 잘 받으면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교수나 직장인이 있다고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힌다. 실제로 교육수준은 행복도와 별다른 상관이 없다. 그 이유는 교육수준이 높아질수록 생활수준이나 삶의 질이 바뀌는 정도보다 '기대 수준'과 '비교의 수준'이 더 가파르게 높아지기 때문이다.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p. 90.

스팀잇에 네임드 스티미언이 있듯이 심리학에도 네임드가 있는데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누다심, 서밤, 월덴지기 그리고 위에 인용해 놓은 글을 쓴 박진영 정도이다. 사회심리학으로 연세대에서 석사까지 하고 지금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자기자비나 마음챙김에 관해 연구를 하고 있다 한다.

스펙 좋고 몇 권의 심리학 대중서로 인지도까지 얻었으니 얼핏 보면 엄친딸 같은데, 책을 읽어보면, 자신에게 가혹한 태도로 인해 마음 고생을 많이 한 것 같다. 몸과 마음을 너무 혹사시켜서 큰 병을 얻어 1년 동안 학업을 중단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런 사연이 있기 때문에 자기자비(self-compassion)과 관련된 이 책을 쓰고 연구 주제도 그런 쪽으로 잡아서 저 멀리 타국에서 공부 중인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아주 심플하다. 자신에게 관대해지라. 자신에게 친절해지라. 이게 다다. 물론 저자의 내공이 깊은 까닭에 까다로운 사회심리학 연구들을 매우 명쾌하고 일상적인 언어로 풀어놓았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명쾌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높은 기준을 설정하여 자신을 그 기준에 끼워 맞추려고 애를 쓰며 살아간다. 한국이라는 사회문화적 환경 자체가 게으름을 죄악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고, 그런 탓인지 몰라도 어렸을 때부터 근면성실이 최고의 가치인 것마냥 강요된다. 알게 모르게 이런 가치를 내면화하며 자라게 된다. 더 빨리! 더 열심히! 더 높이! 더 많이! 성취하라.

성취지상주의라고 부를 법한 이런 분위기에는 자연스럽게 비교와 경쟁이 수반된다. 누가 더 많이 성취하나 비교질 당하는 게 일상이다. 비교는 타인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스스로에 의해 이뤄지는 일이 더 많아 보인다. 우선 타인과의 비교를 보자.

얼마 전에 읽은 Jamie님의 글에도 잘 나타나 있지만, 이런 비교에 얽매일수록 자존감이 오르락 내리락하게 된다(건강하지 못 한 자존감 혹은 Jamie님이 가벼운 자부심이라 표현한 형태).

저 녀석은 나보다 학점도 안 좋았는데 대기업 들어갔네. 쟨 나보다 얼굴도 안 예쁜데 남자 잘 만나서 호강하네. 옆집 할미는 아들딸이 유럽 여행도 시켜준다는데 난 제주도 한 번을 못 가네. 이런 상향비교도 있지만 하향비교를 통한 정신승리도 자주 이루어진다. 그래도 난 쟤보단 ~는(건강, 부, 외모, 학벌 등등) 낫네 하는 식의. 상향비교와 하향비교를 오가며 바스라지기 쉬운 취약한 자존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른 사람과 비교도 비교지만 스스로가 설정한 내적 기준과 현실의 비교를 빼놓을 수 없다. 작심 삼일은 넘기기로 했는데 왜 이모양일까.(작심 삼일은 마땅히 넘기는 것이 정상이라는 기준) 도대체 살은 언제 빼지?(살을 20kg은 빼야 사람처럼 보일 것이라는 기대 혹은 기준) 얼마나 못났으면 여자친구도 없을까..(잘난 사람은 여자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기준) 몸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이렇게 병에 걸렸구나(건강은 노력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는 판단 기준이나 신념) 등등.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사는 것 못지않게 나는 나(자아, 이미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살았다. 같은 책, p. 33.

더 나은 내 모습을 셋팅해 놓고(이상적 자기의 설정) 그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상적 자기에 비추어 현실의 자기를 평가절하하게 되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은 정신건강에 이로울 리가 없다. 타인과의 비교보다 더 해로운 것이 이상적 자기를 기준 삼아 자신에게 가혹한 평가질을 일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적 자기에게 적당히 잘 보이려 해야 하는데 도를 지나친 것이다.

나 역시 높은 기준 혹은 이상적 자기를 설정하여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매우 빡쎄게 스스로를 채찍질했던 사람인지라 저자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그런 성격 특성이 있었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결과들을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과도한 성취지향적 태도로 인해 몸이 망가져서 네 달을 심하게 아팠던 경험이 내게도 있다(!). 그 경험 이후에는 저자가 그러하였듯 나 역시 자신에게 조금 더 관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물론 쉽진 않다.

다시 이 글의 도입부에 인용해 놓은 글을 보자. 목표들 달성한다고 행복해질까? 전혀 그렇지가 못 하다. 기대치를 달성하면 행복은 잠시뿐이고 더 높은 기대치가 생기게 마련인 것 같다. 더 높은 기대치와 스스로에 대한 더 가혹한 채찍질이 남을 뿐이다.

이 모든 과정에는 스스로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환상이 있게 마련이다. 스스로가 지닌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지 못 하는 이런 태도는 이상적 자기가 나를 학대하는 요인으로서 기능하게 만드는 주범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대부분의 영역에서 적어도 '평균'은 될 거라는 환상을 가진다. (중략) '평균 이상 효과(above-average effect)' 또는 '우월성에 대한 착각(illusion of superiority)'이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전 세계 여러 국가에서 널리 확인된다. (중략) 이렇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는 적어도 평균 이상은 된다고 생각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말로 그러기는 불가능하다. 모든 이들이 평균을 넘는다는 건 말 그대로 말이 안 되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비교우위와 우월성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같은 책, p. 45-46.

자아의 이런 미망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현실직시할 수 있을까? 유용해 보이는 부분이 있어서 그대로 발췌해 온다.

  1. 나의 고통을 인지한다. : '내가 지금 힘들구나. 속상하구나. 아프구나. 화가 났구나.'
  2. 그 고통이 정상적인 삶의 일부라고 받아들인다. : '힘들어하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니다. 꼭 내 잘못인 것도 아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나름의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3.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길, 자신에게 따뜻함을 제공할 수 있길, 자신을 용서하길 바라는 마음을 갖는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물어본다. :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까?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뭘까? 산책? 목욕? 맛있는 음식?' - 같은 책, p.81.

이런 것이 자기자비(self-compassion)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즉, 자신에게 친절하라. 친구에게 하듯이 자신의 고통을 위로하라. 그리고 다른 이들도 모두 저마다의 고통 속에서 살아감을 상기하라. 끝으로 자신의 힘든 마음을 가만 들여다 보되 판단하지 말라. 죄책감, 수치심, 외로움, 자기나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에 관해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 마음챙김하라.

사실 나처럼 성취지향적인 모드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마음챙김은 쉬운 일이 아니다. 늘 판단하고 계획하는 일이 일상인데 제 버릇 개 못 준다. 하지만 자기자비의 자애로운 측면과 고통의 보편성에 대한 자각은 훨씬 일상에 적용하기가 쉽다. 친구에게 위로하듯이 자기를 위로하면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경험하는 사람임을 상기한다. 자신의 고통은 거기 너무 매몰되지만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아차리는 데 있어 매우 훌륭한 도구일 수 있다.

건강한 자존감은, 고통이 삶의 디폴트이고 '근본적으로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수용하고 무엇보다 내적 경험에 관대해짐으로써 형성 및 유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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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차에 도전하세요

그리고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어떻게 도전하는 건지 좀 봐야겠어요..

말씀 나눔 감사합니다. 책 읽어봐야 겠군요. kr-mindfulness사용도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챙기는 것이 중요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나 자신을 챙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끼고 있어요. 자칫 이기적인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다만,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결국 나보다 중요한 것은 없잖아요. 너무 심하지 않다면 나쁘지 않은거 같아요. 이기적인거.

맞아요. 자기를 잘 챙기지 못 하는 사람이 남을 잘 챙길 순 없겠죠.

스팀잇 심리학 네임드 선점합시다. ㅎㅎ

room9님이 먼저 네임드 되시면 제가 뒤따라 가겠습니다. ㅋ

좋은 글 감사합니다

리스팀 고맙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영 안심어지네여

저도 잘 안 돼서 종종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며 나의 우월성을 확인하려 들곤 합니다. 그런 자신을 보며 '하.. 너라는 인간 참 이래저래 바쁘게 사네'라며 유머러스하게 넘기곤 해요.

목표들 달성한다고 행복해질까? 전혀 그렇지가 못 하다. 기대치를 달성하면 행복은 잠시뿐이고 더 높은 기대치가 생기게 마련인 것 같다

핵공감합니다. 저도 가끔 내가 왜 이렇게 처절하게 살고있지?
무엇을 위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 생각도 잠시..
머리 싸메고 뭔가를 또 하고 있는 저를 보게 됩니다.

몇년사이 머리가 반백이 되었네요.
다행인건 반백이 잘 어울린다는거.ㅋㅋ
아직도 그걸 .. 그게 뭔데... 놓지 못하고 있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면서도 잘 안 되고 놓질 못 하게 되네요. kibumh과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며, 자아의 미망이 야기하는 고통이 보편적이라는 데서 조금의 위안를 얻어 봅니다.

그래도 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게
조금씩 놓아 보려고 노려하고 조금씩 편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정말 행복한 방향으로
가면 좋겠습니다.

비교하지 않으려고요. 혼자 꿋꿋이 버텨봅니다. 자존감이든 자부심이든 나를 사랑하는거죠! ㅎ

예. 어렵게 말할 것 없이 그냥 나를 사랑하면 되는 것 같아요. 그 방식은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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