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임상심리전문가의 정신장애 이야기 #29] 수동공격 성격에 관한 소고

in #kr-psychology5 years ago (edited)

DSM-III에서 정식 진단으로 수동공격(Passive-Aggressive) 성격장애가 배치돼 있었으나 DSM-IV에서 부록 부분으로 그 위상이 격하됐다. DSM-5에서는 아예 삭제되었다. 하지만 임상에서 수동공격 성격장애의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연극성도 아닌 것 같고, 자기애성도 아닌 것 같고, 경계선도 아닌 것 같은 상황에서 수동공격 성격장애 개념이 감별진단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정식 진단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장애를 배우기란 쉽지 않다. 대학원에서도 못 배웠고 수련 중에 Theodore Millon의 책을 스터디하게 된 것을 계기로 이 장애의 ‘존재’를 알게 됐으나 그 때는 보고서 쳐내고 논문 쓰기 바쁘던 시절이라 제대로 공부할 겨를이 없었다. 최근에 밀론의 책을 다시 보면서 임상 경력 50년 내공에서 나오는 예리한 성격장애 묘사에 감탄하게 되는 가운데 수동공격 챕터를 펼쳐 보았다.

밀론은 수동공격 성격장애라는 말을 쓰지 않고 Skeptical/Negativistic Personality라는 말을 쓴다. 수동공격이라는 말이 이 성격의 피상적인 양상에만 포커스를 맞추기 때문에 이 말의 사용을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동공격이라는 말에 포함된 가치판단적인 뉘앙스 때문인 것도 같다(사실 이 문제는 정신장애나 병리에 관한 어떤 용어도 비켜갈 수 없는 난제다. 정신장애에 관한 편견이 사라지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을 문제 아닐지). 하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수동공격 성격이라 지칭한다.

수동공격 성격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양가성이다. 행동의 일관된 패턴이 없다는 것이다. 보통 성격은 어떤 일관된 행동의 패턴을 가리킨다. 자기애성 성격은 외부 인정을 통해 자신의 자존감을 고양시키는 방식으로 일관되게 행동한다. 반사회성 성격은 합법적으로든 비합법적으로든 자신의 힘의 우위를 타인에게 각인시킴으로서 전능감을 느끼는 방식으로 일관되게 행동한다(예. 현 미국 대통령). 그런데 수동공격 성격에는 이런 일관된 행동의 패턴이 없다는 게 특징적이다.

행동의 일관된 패턴이 없다니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다. 일관된 패턴은 없지만 행동의 양가성이 상황이나 시간에 걸쳐 일관성 있다. 취학 전 아동을 키우는 부모라면 이해하기 쉬울 것인데, 어떤 때는 이랬다가 어떤 때는 저랬다가 수시로 마음이 변하니 부모로서는 환장할 노릇이다. 아이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성장할 수밖에 없고, 부모가 아이에게 일관된 방식으로(그게 민주적인 방식이든, 거부적인 혹은 허용적인 방식이든 간에) 반응하면 아이도 일관성 있는 성격을 갖게 된다. 수동공격 성격을 지닌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든 그게 가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아이가 보여야 할 ‘갈팡질팡 행동’을 어른이 보일 때 정서적으로 미숙하다(emotionally immature)고 표현한다.

정서적 미숙함이 대인관계에서는 접근과 회피의 갈등으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다른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 하고, 다가가서도 늘 한 발 뒤로 물러설 태세를 갖추게 된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쁜 경험을 하더라도 이내 사라지고 말 감정이라며 비관적으로 변하기 쉽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갈구하게 되니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게 될 때가 많다. 수동공격 성격을 지닌 사람과 관계 맺은 사람도 사람이지만 본인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력을 발휘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종종 불협화음이 발생하더라도 갈등을 잘 조율하여 관계를 지속하는 애착 능력이 이들에게는 부재하고, 대인관계에서 경험하는 불만족감, 특히 분노로 인해 우울을 경험하기 쉽다. 응당 받아야 할 사랑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니 다른 사람에 대한 적개심이 쌓여만 가는데(이는, 대체로 대인관계 문제에서 자신이 기여한 부분을 보기 어려운 것에도 연관됨) 이를 표현했다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거절당하게 될 것을 염려하게 되니 무의식적으로 분노가 자신에게 향하는 것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내가 나빠서 사랑을 못 받는 것이라 여기면 최소한 통제감은 획득한다. 이런 경험이 오래 지속돼 지속성 우울장애로 발현하기 쉽다.

하지만 우울과 분노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라 분노가 수동공격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쉽다. 다른 사람의 욕구를 좌절시키는 미묘한 방식을 통해 분노가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것이다. 수동공격 성격을 지닌 사람의 우울은 우리가 흔히 우울증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멜랑꼴리함이라기보다 일상에서 웃을 일이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예민해진 가운데 종종 짜증도 나고 불평불만이 많고 때때로 불안하고 초조하기도 한 그런 양상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 밀론은 이네들의 핵심 기분을 depressed가 아닌 “Irritable”로 표현하는 것 같다.

수동공격 성격에서는 우울에 수반되기 마련인 자기비판적 태도와 분노에 수반되기 마련인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적 태도 및 삶에 대한 냉소주의가 모두 나타날 수 있고, 심지어 시시때때로 자기비판-타인비판이 변화하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해 보이기 쉽다. 이들은 흡사 자기비판-타인비판 중 어느 쪽이 더 나을지 능동적으로 모색하는 것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이해받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삶이 늘 난파당한 것처럼 불안하다고 느낄지 모른다.

양가성과 정서적 불안정성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자살시도나 자해가 빈번한 경계선 성격장애와의 공통분모가 많다. 밀론은 수동공격 성격의 극단적 형태가 경계선 성격장애로, 성격 구조상의 문제 심각도가 후자에서 더 크다고 말한다. 임상에서는 감별이 어려운 경우도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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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보여야 할 갈팡질팡 행동을 어른이 보이는 것이 수동공격 성격장애인가요? 모든 상황 에서 혹은 모든 감정이 그렇게 갈팔질팡 하기에 스스로 혼란을 느낀다는거죠? 이러한 분들은 어떻게 해야하나요? 스스로 작은 기준을 세워 그 기준에 맞게 행동하며 점차 일관성을 가지며 자신의 가치관을 확고히 할 수 있어야 할까요? 애당초 보통 성인과는 달리 자신만의 가치관 확립이 덜 되었기에 이러한 성격장애가 나타나는 걸까요? 아니면 실패나 비판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큰 나머지 이러한 양상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혹은 트라우마 일까요? ㅎㅎ 음~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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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초기에,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자기와 타인 모두에게 이로운 방식인지 알려줄 수 있는 롤모델이 부재했다는 점에서 가치관 확립이 덜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겠네요.

실패했을 때 괜찮다고 보듬어 주는 대상도 부재했을 가능성이 높고요. 그래서 자기 패를 솔직히 보여주는 게 어려울 수 있죠. 실패했을 때 비판이나 거절 당하면서 수치심을 느끼는 상황이 반복됐다면요.

그런 자잘한 사건들이 쌓이면 애착외상이란 게 되고, 성인이 됐을 때 여러모로 대인관계 어려움에 봉착하기 쉽겠죠. 결과적으로 모두 맞는 말 하셨다고 생각되네요. ㅎ

곰돌이가 @slowdive14님의 소중한 댓글에 시세변동을 감안하여 $0.014을 보팅해서 $0.026을 지켜드리고 가요. 곰돌이가 지금까지 총 6327번 $69.898을 보팅해서 $81.351을 구했습니다. @gomdory 곰도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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