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보다연애] 물고, 빨고, 안고 싶은 이유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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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와 스킨십

연애를 시작하면 상대와 같이 있고 싶다. 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 때문에 연인과 같이 있고 싶은 걸까? 뜨거운 연애가 시작되면 스킨십을 하고 싶다. 정직하게 말해 연인과 극장에 가고, 카페에 가는 이유는 손을 잡고, 포옹하고, 키스하고 싶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스킨십을 원하지 않는다면, 왜 굳이 연인과 극장이나 카페에 갈까? 친한 친구와도 얼마든지 극장이나 카페에 갈 수 있는데 말이다.

연애를 할 때 상대와 같이 있고 싶은 이유는 스킨십을 원해서다. 그렇다면 왜 사랑하는 사람과 스킨십을 하고 싶을까? '연인이 있으면 당연히 스킨십을 하고 싶은 것 아니야?’라며 너무 당연해서 의문조차 가져 본 적 없는 이 질문에 한 번쯤은 답해볼 필요가 있다. 이 낯선 질문을 통해 우리가 갖고 있던 스킨십에 관한 판타지와 태도를 되돌아 볼 수 있다.

사랑하면 상대를 알고 싶다.

연애를 하면 궁금증이 생긴다. ‘상대를 알고 싶다’는 궁금증. 한참 연애하던 시절을 떠올려보자. 하루 종일 만나서 이야기를 했는데, 무슨 할 이야기가 또 남았는지 귀가 뜨거워질 정도로 밤새 전화통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가. 왜 그렇게 상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까? 상대를 알고 싶어서다. 남자 친구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식을 싫어하는지, 좋아하는 음악은 어떤 건지, 싫어하는 가수는 누구인지, 취미는 무엇인지 등등. 남자 친구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 그래서 끝도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일 게다.

왜? 대체 왜 그리도 상대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걸까? 그건 연애를 하면 상대에게 기쁨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연애를 하면 상대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어떤 사람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대상이 되고 싶다. 그래야 상대가 나를 떠나지 않을 테고, 그래야 계속 사랑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문제가 있다. 연애를 시작하면 상대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상대에게 기쁨의 대상이 된다는 건, 상대에게 좋아할만한 것들을 주고, 싫어할만한 것들을 피해야 가능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상대에 대해 잘 모르니까. 연애를 막 시작했지만 긴 시간 서로의 존재도 모른 채 살아왔고 또 서로 살아왔던 삶의 맥락도 너무 달랐다. 그래서 우리는 기를 쓰고 상대를 알고 싶은 것이다. 연인이 좋아하는 것들을 주고, 싫어하는 것들을 피하고 싶어서.

‘타마라’의 ‘statue of love’

연애 초반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서로에 대해 모르는 지점은 늘 있게 마련이다. 심지어 서로에 대해 오해하기도 한다. 많은 대화에도 불구하고 연인은 서로 직감한다. 아직 상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걸. 한 사람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건 상대방이 되어 보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되어 볼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무엇을 싫어하는지 오해 없이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건 어떤 의미일까? 상대방이 되어 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가끔은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예술작품이 생각을 더 명료하게 할 때가 있다. 타마라(Tamara Kvesitadze)라는 예술가의 작품, ‘statue of love’(사랑상)을 찾아보자. 철사 같은 재질로 만든 거대한 두 연인의 육체가 있다. 둘은 점점 가까워지더니 급기야 서로를 육체를 관통해서 지나간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연인이 서로 관통되는 지점이다. 그때가 연인이 상대방이 되어보는 순간이다. 상대가 되어본다는 건 그런 느낌일 테다. 상대방의 육체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 상대를 오롯이 느껴보다는 그런 느낌.

하지만 예술 밖 현실에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타마라’의 연인들은 관통 가능한 육체를 가졌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가장 잘 알려면 상대방이 되어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차선책을 택한다. 그 차선책은 상대와 거리를 최대한 줄이려고 하는 것이다. 관통까지는 못하더라도 관통 직전까지는 가고 싶은 것이다. 불완전하지만 그렇게라도 상대방이 되어보고 싶은 것이다.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의 시도는 불가능하기에 더욱 절절하다.

불가능한 시도, 포옹 그리고 키스

상대방이 되고 싶지만 관통 불가능한 육체를 가진 죄로, 할 수 있는 것은 상대와 거리를 최대한 줄이는 것뿐이다. 그 불가능한 그래서 절절하기까지 한 시도가 바로 스킨십이다. 한참을 멀리 떨어져서 손을 잡고, 포옹하고, 키스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손을 잡고 포옹하고 키스하는 건, 상대방이 되어 그를 알고 싶다는 불가능한 시도다. 그 시도는 애초에 불가능하기에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연애를 할 때 왜 그리고 붙어있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다.

연인과 손을 잡을 때 알게 된다. 상대의 손에서 전해오는 체온. 그 마주 잡은 손만큼은 마치 내가 상대가 된 것 같다. 연인이 우리를 꽉 안아줄 때 알게 된다. 상대의 가슴에서 전해 오는 그 심장박동의 두근거림. 서로가 서로를 꽉 안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상대가 된 것 같다. 연인과 뜨거운 키스를 할 때 알게 된다. 연인의 입술 떨림과 혀의 감미로운 부딪힘. 누구와도 그리 가까이 접촉한 적 없는 바로 그 순간만큼은 내가 상대가 된 것 같다. 그 모든 스킨십을 통해 우리는 상대를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다.

손을 잡고,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할 때 느껴지는 설렘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저 동물적 본능일까?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상대가 되어보려는 시도가 잠시지만 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마치 기적을 경험한 것과 같은 느낌은 아닐까?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믿고 있었던 일이 현실이 되었을 때 설레지 않는 이는 없을 테니까. 뜨거운 연애를 하면 왜 그리도 상대와 찰싹 붙어 물고, 빨고, 안고 싶은지 그 이유를 알겠다. 그건 상대방이 되어 상대를 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다.

사랑한다면 물고, 빨고, 안자.

이제 스킨십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혹은 스킨십은 기간에 따라 매뉴얼대로 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스킨십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은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성적 가치관 혹은 종교적 가치관에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항변을 하지만 그건 본질적인 이유가 아니다. 연인이 있지만 그와의 스킨십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은 결국 둘 중 하나다. 상대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를 알고 싶지 않은 경우이거나 혹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스킨십을 매뉴얼에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이는 어떤 사람일까? 스킨십이란 것은 결국 상대를 알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인데, 그것에 매뉴얼에 있다는 것은 상대를 필요한 만큼 알겠다는 것 아닌가? 상대를 필요한 만큼만 알겠다는 것, 이것은 내가 상대방의 기쁨의 대상이 되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언제든 네가 나를 떠나도 상관없다’는 이야기와 같다. 스킨십에 매뉴얼을 정한다는 것은 상대를 사랑하지 않거나 혹은 자신을 가장 사랑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진짜 사랑을 한다면, 과감하게 스킨십을 하자. 촌스러운 성윤리, 혹은 타인의 시선 같은 것은 잠시 접어두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물고, 빨고, 안자. 그렇게 상대방이 되어보려고 노력하자. 그렇게 상대방을 알아가자. 그렇게 상대방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자. 그것이 다른 어떤 행위도 줄 수 없는 오직 연애만이 줄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니까. 이 행복을 만끽하지 못할 거라면 왜 연애를 해야 할까? 주변에 널리 친구와 우정을 쌓아도 그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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