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다리 폭파

in #zzan5 years ago

1950년 6월 28일 한강다리 폭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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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철교가 선 것은 20세기가 시작되기기도 전이었지만 한강인도교 공사가 시작된 것은 1916년이었다. 인도교 공사의 필요성을 부각시킨 요인 가운데 하나는 자동차였다. 황제 폐하나 타는 것으로 알았던 자동차는 1911년 단 2대에 불과했지만 1915년 경에는 70대로 늘었고 1917년에는 마침내 100대를 돌파하여 114대에 이르고 있었다. (CN뉴스 2011.3.14 이덕수의 길따라 기록따라) 또 서울시 인구도 늘었고 강남북을 잇는 교통로 확보가 절실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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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도교 공사는 1917년 10월 완공을 보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강대교인 셈이다. 당시에는 노들섬에서 노량진간의 440미터 구간을 한강대교, 노들섬에서 용산까지의 구간을 한강소교라고 나누어 불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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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 성수대교가 붕괴됐을 때 한강 위에 세워진 모든 다리에 비상 조사가 실시된 바 있었다. 이때 일제 때 시공된 한강대교의 기초는 오히려 별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튼튼하게 지어진 다리였다. 한강대교가 지어진 뒤 한강대교는 온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의 명물이 된다. 한강인도교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붐볐고 엉기적엉기적 우마차들이 지나는 가운데 기생과 부잣집 한량들을 태운 자동차들은 날렵하게 한강 다리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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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한강 다리는 난감한 문제에 봉착했다. 세태를 비관한 염세자들이 즐겨 자살을 택한 곳이 하필이면 한강다리였던 것이다. 더구나 교각이 아치 형태로 되어 있어 올라가기가 쉬웠던 한강대교는 지금은 아예 함부로 오르지 못하도록 기름칠이 되어 있거니와 일제 강점기에는 “일촌대기(一寸待期: 잠깐만 참으시오!) 라는 팻말이 자살을 시도하는 이들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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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울의 명물 한강인도교, 요즘 말로 한강대교는 1950년 6월 28일 참담한 비극을 맞이한다.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은 벼르고 별러 왔던 전면 남침을 감행한다. 개성은 당일로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옹진반도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동부전선의 6사단과 8사단은 잘 싸웠으나 문제는 서부전선이었다. 무엇보다 평야 지대에서 괴물같이 달려드는 전차는 국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국군의 대전차포는 맥없이 튕겨 나왔고 군 수뇌부가 병사들에게 “육탄 돌격”을 명령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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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에서 후퇴한 국군 사단들을 마지막으로 늘어세워 수도 서울의 방어선을 형성한 곳이 미아리였다. 그러나 북한군 탱크는 거침없이 방어선을 돌파했다. 보병의 지원 없이도 탱크는 나무로 얼키설키 친 국군의 바리케이드를 부숴 버리고 마치 당양 장판의 조자룡처럼 기절할 듯 바라보는 국군들을 비웃으며 내달렸다. 국군 5개 사단 4만 4천여 명의 장병들은 용감히 싸웠지만 등 뒤로 사라진 탱크는 너무나 큰 공포였고 방어선은 급격히 허물어진다. 탱크 두 대가 미아리 방어선을 넘어 창경궁 앞에 나타난 그 시각. 탱크는 들어왔지만 아직 적의 주력은 서울에 들어오지 못한 그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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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한강에서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것이다. 다리 위에 있던 피난민들은 그 순간 가루가 됐다. 미 군사 고문단도 “다리가 끊어졌다! 다리가 없어졌다!”고 경악하고 죽을 힘을 다해 싸우던 군인들도 새파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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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도 연락되지도 않고 어떠한 대책도 없는 폭파였다. 국군은 그 이전 인민군에 밀려 후퇴하면서 탱크 진격을 저지할 교량 폭파에 연이어 실패했다. 탱크가 미아리 방어선을 돌파한 것도 길음교 폭파를 실패한 탓이었다. 그러니 한강다리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너무 빠르고 무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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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덕 참모총장은 인민군의 미아리 돌파를 듣자마자 용산의 육군 본부를 떠나 시흥으로 가 버렸다. 이미 폭파 명령이 떨어져 공병부대가 폭약을 설치한 뒤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만 기다리던 상황. 이형근, 이응준, 유재흥 등 장군들이 육군본부에 들이닥쳐 한강다리를 폭파하면 안된다고 절규한다. 미군 군사고문단도 펄쩍 뛰며 폭파를 말렸다. 이에 흔들린 김백일 참모부장은 폭파를 연기시키기 위해 장창국 작전국장을 폭파지휘소가 있는 남한강파출소로 급히 보냈다. 그러나 이미 길은 피난민들의 대열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미친 듯이 클랙슨을 울리며 가던 그들의 귀에 폭발의 굉음이 들렸다. 한강다리가 폭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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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교량 위에서 사라진 800-1000명의 목숨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군의 활용 가능 병력 2/3가 한강 이북에 고립돼 버렸고 주요 장비 대부분을 잃었다. 최악의 전략적 파탄이었고 범죄에 가까운 실수였다. 한국군 방어선은 급격히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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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로를 잃은 국군 병사들은 뗏목을 만들어야 했고 많은 이들이 곳곳에 절망적인 방어선을 치고 최후까지 인민군에게 피해를 주며 죽어갔다. 그때 이승만은 이때 “서울 사수”를 녹음했던 대전에서 뭉개고 있었고 참모총장 채병덕은 한강 건너 시흥에서 눈알을 굴리고 있었으며 “서울 사수” 방송은 그때껏 라디오를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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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말이 안되는 이 참극에서 더 말이 안되는 일이 벌어진다.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이다. 채병덕은 “군사상 상식이 있는 자가 그런 명령을 내렸겠느냐?”고 엉뚱한 소리를 했고 또 하나의 명령자로 의심받고 있는 국방 차관도 발을 뺐다. 결국 남은 건 실무책임자 공병감 최창식이었다. 최창식은 한강 인도교 폭파 책임을 지고 총살당한다. 명령을 한 사람은 없고 명령을 실행한 사람은 있는, 그래서 책임은 명령을 실행한 자들에게 돌아가는 한국군의 유구하게 몹쓸 전통은 이때부터 빛난다. 그로부터 60년이 흐르도록 아직도 한강 다리 폭파 명령의 시발이 누구인지는 정확히는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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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와 군은 그렇게 전쟁 초기 국민들을 완벽하게 배신하고 속이고 한강 위의 수중고혼으로 날려 버렸다. 그러고는 후일 서울에 돌아와서 한강에 남았던 이들을 ‘잔류파’라고 힐난하면서 부역자 색출에 힘을 기울였고 한강다리에서 죽어간 사람만큼,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을 부역자로 죽여 버렸다. 전쟁을 하든 발전을 하든 그 국민들에게 신뢰를 잃은 나라는 헝겊막대보다도 못한 허섭쓰레기에 불과할진대 대한민국은 그렇게 국민들의 뒤통수를 모질게 갈긴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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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국민들은 그런 나라를 받아들였고 말단 병사들은 탱크를 향헤 뛰어들고 남산의 마지막 요새에서 싸우다 전멸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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