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가위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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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 / 안해원

배 속에서 잘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질 때쯤 돼서야
가위를 삼켰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어
주어나 서술어나 목적어도 없이
감탄사 같은 단답형의 잘린 말들이 입에서 나올 때만 해도
과묵하다는 소리를 들었지, 신중하다는 것으로 이해했거든

가위가 배 속에 있다는 걸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단단한 음식이나 질긴 고기를 먹을 때 쓸모 있었거든
오히려 아무리 많이 먹고 자도 아침이면 배가 고팠어
젊고 힘이 있어서
그까짓 가위가 있다 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지

그런데 말이야 가위는 점점 날을 세우기 시작했어
아내의 잔소리를 단숨에 잘라버리고
선배의 충고를 잘라내서 듣고 싶은 것만 남기거나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나쁜 것만 잘라 모으더라고
그것이 위엄이고 유능함이고 분별력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가위는 들숨과 날숨도 잘라내기 시작했어
길었던 숨을 토막 내 자른숨으로 만들어온 거지
양쪽 가슴을 한껏 부풀려 길게 숨을 들이마시려 해도
허세허세 가세가세 소리가 나며
빈 폐만 헐떡거릴 뿐 사는 게 시원하지 않아

언제 가위를 삼켰을까 생각해 보았어
가위로 헝겊을 잘라 바지를 기워주시던 어머니 몰래
구멍에 손가락 두 개를 넣어 찢어 버리곤 하던 때
그때부터 잠이 들면 자꾸만 가위에 눌리기 시작했어
그때일 거야, 입을 아아앙 벌리며 살려달라고 휘적거릴 때
가위가 입안으로 쏘오옥 들어오던 때가

이것 봐!
지금도 걸으면서 팔도 다리도 가위날이 되어
정신없이 앞뒤로 교차해 가며
싸악싸악 여유를 잘라내고 있잖아
너도 이렇게 걷지?
가위는 어쩔래?



《작가노트》
관계속에서 평정심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러한 무한 경쟁사회에서 경쟁자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다고 했지 않던가. 개성시대, 자기PR시대,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대, 이러한 세태 속에서 나만 조용하게 양보하며 배려하며 사는 것은 바보같은 짓 아닌가?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내 속의 가위는 더욱 날카로워 질수밖에 없다. 알아주지 않으면 어떤가. 내 영혼은 자유롭고, 내 속의 가위는 무뎌져 고통스럽지 않을
것을...하늘은 아무것도 담지 않아도 늘 평온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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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r Up!

  • from Clean STEEM activity supporter

내 몸에 붙어있는 세개의 가위
살아있는 삶속의 행위 예술
무엇을 자르고 무엇을 다듬어 내려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는 한결같이 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뉴비는 언제나 환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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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들의 선생님이시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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