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세일즈맨의 죽음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그리는 윌리엄 로먼의 하루는 하나의 비극이다. 그는 20세기 초반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영업맨이었고 그를 항상 배려하는 한 여자의 남편이자 촉망받는 미래를 가진 두 아들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그건 모두 1928년의 이야기였다. 이듬해 미국엔 대공황이 닥치고 그로 인해 시작된 경제적 붕괴는 윌리엄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불안과 절망을 안겼다. 그는 살아 남았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예순 살이 넘은 그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택할부금을 겨우 갚을 만큼의 수입만 올리고 있고 기대했던 두 아들은 방황만을 거듭하며 자신과의 불화만 키워갔다. 윌리엄은 자신 앞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언제나 1928년으로 돌아갔다. 모두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며 떠받들고 밝은 미래만이 보이던 그곳에서 돌아와 진짜 눈을 떴을 때 윌리엄은 엑셀을 너무 세게 밟아버렸다. 1928년의 멋진 세일즈맨이자 좋은 아버지였던 한 남자가 가혹한 현실 속에 짓눌려 자신을 잃고 최후를 맞는 이 하루의 이야기는 평범한 소시민의 명백한 비극이다.
윌리엄은 항상 자신 앞의 현실에서 도망가는 방법을 택해왔다. 그리고 도피처는 언제나 1928년이었으며 자신의 자존감이 최고였던 그때의 지위와 자신감에 취해 말과 행동을 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일종의 정신착란과도 같은 것이었고 스스로에겐 자아분열에 가까웠다. 그에겐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정체성이 하나 있었고 그것은 결국 특정시점에 갇혀 있는 박제된 유물이었다. 윌리엄 로먼은 평범한 가장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는 영웅도 아니고 천재도 아니다. 대공황과 같은 거대한 현실의 파도 속에 허우적대고 나이를 먹어가며 자연스레 주류에서 멀어지고 소외된 그의 모습은 20세기 초반 미국 그리고 현재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가장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1928년은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출구였을지도 모른다.
윌리엄이 경험하는 세계는 2개로 분열되어 있다. 자신이 유능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과거의 그 세계와 회사에서 밀려나고 두 아들과 부딪히기만 하는 현실의 세계이다. 앞의 세계는 윌리엄이 괴로운 현실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가상공간이다. 그런데 이 공간을 단순히 윌리엄의 현실도피로 봐야 할까. 위기에 빠진 한 인간이 그것에 대응하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다. 고난을 정면 돌파하는 것이 고대 비극의 영웅이 갖는 당연한 역할이자 운명이지만 현대의 비극에선 그렇지 않다. 윌리엄의 비극과 비교해 볼만한 다른 비극(혹은 희극)들을 살펴보려 한다.
‘트루먼쇼’에서 보험회사 직원 트루먼이 처한 상황은 윌리엄과 비슷하다. 트루먼의 24시간을 생중계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공모하여 그를 속였다. 자신의 인생이 통째로 짜여진 각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 트루먼의 머릿속에는 세계가 둘로 나뉘었다. 그들이 조작한 세상과 그렇지 않은 세상. 결말에서 트루먼은 결국 세트장을 빠져나와 진짜 현실세계로 가기로 결정한다.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된 트루먼의 입장이 스스로 가짜 세계를 만들어 들어간 윌리엄과 정반대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트루먼의 마지막 결정을 단순히 영웅적인 해피엔딩으로 보기는 어렵다. 수십년간 만들어진 세트 위에서만 살아온 트루먼이 과연 진짜 현실 세계에 적응할 수 있을까. 분열된 두 세계 모두 다 진짜 답이 될 수 없는 윌리엄과 트루먼은 같은 처지인지도 모른다.
윌리엄처럼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한 사람도 있지만, 특정 기억을 지우는 선택도 있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연인이었지만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선택을 한다. 괴로운 현실 속에 갇힌 스스로의 기억 자체를 없애는 것이 간단한 해결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을 지운다고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워가는 과정 속에서 조엘은 생각이 바뀐다. 단순히 기억하지 못한다고 없어질 괴로움이라면 그건 괴로움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윌리엄은 불행한 현실의 기억을 지우기보다 반대로 좋았던 과거의 기억을 놓치지 않는 것을 택했다.
윌리엄의 또 다른 세계는 스스로가 만든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 가짜의 세계 속의 윌리엄의 모습은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유능한 세일즈맨, 집안의 생계를 책임진 멋진 가장, 아내에게 든든한 남편, 아들의 앞날을 함께 탐색하고 언제나 도움을 주는 멋진 아버지. 그의 어깨 위에 있는 짐들은 스스로 짊어진 것이자 누군가가 올려준 것이다. 자신에게 기대되는 여러 역할들을 책임지기 위해 윌리엄은 쉴 새 없이 일하고 고민하고 몸부림쳤다. 그리고 자신이 더 이상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없을 때 1928년으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이 만들어낸 트루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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