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우진의 워드비트] 이를테면 신파의 진정성 | 강백수 - 타임머신 (2013)

in #kr7 years ago (edited)

워드비트(wordbeat)는 노랫말을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비정기 업데이트.


가족에 대해 말하는 게 쉽지 않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어릴 때엔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꼭 “사실은 우리 아부지가…”로 시작되는 레퍼토리를 읊으면 너나할 것 없이 비밀을 공유한 것 마냥 끈끈한 동료의식을 얻을 수 있었지만 나이를 먹고 보니 그 레퍼토리가 결국 다 비슷하다는 것을, 그것이야말로 한국적 특징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우리 엄마는…”이라는 버전도 있지만, 아무튼 문제는 ‘우리 아부지’가 아니라 ‘지금의 나’라는 것도 깨닫는다. 그래서 가족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 감정이 무뎌진 까닭도 있다.

한편 가족에 대한 얘기는 지나치게 전형적이다. 아버지는 밉고 어머니는 안쓰럽다. 21세기의 가족은 다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20세기까진 그랬다. 화목한 가정도, 그렇지 않은 가정도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애틋함과 고난의 시간을 가지게 되는데, 거기서도 어쩌면 그렇게 아버지는 못나고 어머니는 불쌍한지 모른다. 이 또한 한국적 특징이라고 해두자. 가부장에 특화된 이 사회가 IMF를 기점으로 균열이 발생하기 전까지, 이놈의 한국에서는 죄다 아버지가 이기적이거나 능력이 없거나 부정(不正)하였고, 어머니는 늘 속상한 채로 가족을 챙기다가 화병이나 얻는 피해자였다.

그래서 결국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효자가 되지 못한 아들의 이야기로 끝나기 마련이다. 여자들은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들은 어머니와 연대하거나 아버지와 투쟁하거나 가족 전체와 등을 돌리거나, 혹은 몰락해가는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고 온갖 애를 쓰면서 감당해야할 몫보다 큰 일을 해낸다. 물론 그렇지 않거나 반대의 경우도 많겠으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가족 이야기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어느 날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 1991년으로 날아가
한창 잘 나가던 삼십 대의 우리 아버지를 만나 이 말만은 전할거야
아버지 육년 후에 우리나라 망해요 사업만 너무 열심히 하지 마요
차라리 잠실쪽에 아파트나 판교쪽에 땅을 사요 이 말만은 전할거야
2013년에 육십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너무 힘들어 하고 있죠
남들처럼 용돈 한 푼 못드리는 아들 놈은 힘 내시란 말도 못해요
제발 저를 너무 믿고 살지 말아요 학교 때 공부는 좀 잘하겠지만
전 결국 아무짝에 쓸모없는 딴따라가 될거에요 못난 아들 용서하세요

어느 날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 1999년으로 날아가
아직 건강하던 삼십 대의 우리 엄마를 만나 이 말만은 전할거야
엄마 우리 걱정만 하고 살지 말고 엄마도 몸 좀 챙기면서 살아요
병원도 좀 자주 가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이 말만은 전할거야
2004년도에 엄마를 떠나 보낸 우리들은 엄마가 너무 그리워요
엄마가 좋아하던 오뎅이나 쫄면을 먹을 때마다 내 가슴은 무너져요
제발 저를 너무 믿고 살지 말아요 학교 때 공부는 좀 잘하겠지만
전 결국 아무짝에 쓸모없는 딴따라가 될거에요 못난 아들 용서하세요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가 엄마를 만날 수는 없겠지만
지금도 거실에서 웅크린 채 새우잠을 주무시는 아버지께 잘 해야지


디테일과 자기고백이 교차하는 순간의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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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백수의 “타임머신” 역시 ‘좌절한 효자의 이야기’란 점에서 조금은 뻔해 보인다. 그럼에도 청자를 홀리는 순간이 있다. 1991년의 아버지를 만나 ‘앞으로 5년 후엔 나라가 망할 테니 잠실에 아파트 아니면 판교에 땅 한 줌이라도 사두세요’라고 알려주고 싶은, ‘아들 너무 믿지 마세요, 아무짝에 쓸모없는 딴따라가 될 거예요’라고 일러주고 싶은 그 마음. 어머니에겐 ‘제발 몸 좀 챙기면서 살아요’라고 화내고 싶은 바로 그 마음. 이 뻔한 이야기가 강렬한 힘을 얻는 건 구체적인 표현력, 위트,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이 픽션이 아니라 ‘싱어송라이터’ 강백수에게 실제로 일어났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정황 덕분이다.

이 리얼리티는 식상한 이야기, 요컨대 신파에 진정성을 더하고 마음을 움직인다. 정박에 기교 없이 단순한 멜로디를 착실히 쌓아가는 구조, 하모니카의 서정적인 간주와 강백수의 다소 촌스러운 듯, 구식의 발성과 음색도 여기에 힘을 보탠다. 이 발성은 가요 발라드나 포크와 다른 곳, 이를테면 대학가 노래패의 맥락에 있는 것처럼도 여겨지기도 한다. 이 쯤에선 노랫말이나 발성, 음색, 음악에 이르는 여러 부분에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 떠오르기도 한다. 백수와 조씨로 활동하던 때보다 솔로가 더 매력적으로 들리는 것도 흥미롭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많은 노래들처럼 이 곡도 디테일과 자기고백이 교차하는 순간의 에너지가 귀를 사로잡는다. 그렇다면 이 노래의 진실여부는 사실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정작 흥미로운 건 여기에 녹아든 패배자 정서라 할 만 한 어떤 감각이 ‘굉장히’ 유려하게 흐른다는 점이고, 그것이 이 단순하고 뻔한 노래를 자꾸 듣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신파의 진정성 같은 것. 강백수의 보편적 감각은 거기서 온다. | 2013.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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