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 남은 기억력을 탓한다

in Korea • 한국 • KR • KO6 years ago (edited)



  1. 여느 다른 사람들처럼 나 또한 매트 위에서 희망을 찾은 케이스다. 다시 삶이 밝게 길어 올려질 것이라는 희망. 2년 전, 나는 지독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삶에 있어 많은 부분에 의미 두기를 멈추지 말자고 생각해왔지만, 파도에 부셔지는 모래성같이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내 멘탈은 바람 한 숨에도 날아갈듯이 위태로워졌다. 어디에 있던 뭘 하던 나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2. 중심이 사라진 삶은 황폐하다. 그런 나를 붙잡아 준건 다름아닌 글쓰기였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해 오던 정체성에 물음을 가진 나였기에 아직도 이유는 알 수 없다. 물론 글을 쓰면서도찾아오는 형태 없는 불안함에 초조한 건 변하지 않는다. 마음 둘 곳이 없어 그런가, 날 덮쳐오는 태풍같은 외로움에 휩쓸려 나가떨어지기 일쑤다.

  3. 그런 시간들을 흘려 보내고 나면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내가 그리도 고찰했던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삶의 주제였고, 모두가 타인과 대면을 통한 세계관 확장에 그리고 내적 공유를 위한 노력과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다양한 관계에 몸을 담고 또 벗어나면서 배우는 것이리라. 상대가 아쉽다고 해서, 또는 간절히 원한다 해서 얻어지는 것만이 인연의 정석은 아니듯이.

  4. 가르치는 학생 한명과 개학하는 학교의 글쓰기 수업에서 한 학기동안 다룰 주제로 ‘정체성’을 야기하는 여러 단편의 글 모음집을 함께 읽고있다. 글 속 캐릭터들 각자의 정체성이 어떻게 혼합되고 또 어떤 과정을 통해 쌓여져 가는지, 그 중 영향을 받는 매개체는 무엇인지, 그와 관련된 메타포는 무엇이며 또 나의 의견은 어떠한지 등을 나눈다. 생각의 꼬리가 서로를 물 수 밖에 없는 수준 높은 내용이기에 침을 튀기며 (마스크를 쓰기에 다행이다) 토론한다.

  5. 오즐렘 센소이와 로빈디앤젤로의 ‘Is Everyone Really Equal?’의 상당 부분을 인용하며 나의 자아가 어떻게 사회와 연관 되어있는지 살펴보고 있는데, 수업을 부분 들었던 한 학부모가 자신도 배우고 싶었던 내용이라며 같이 (참관이 아닌 참여로) 수업을 들으면 안되겠냐 웃으며 물어보신다. 한국에서 초등 교사를 하셨던 분이셔서 수업의 방향성이 조금은 안정화 됨을 인정받은 것 같아 부끄러운 동시에 감사했다. 교육에 대해 함께 고찰하며 내적 성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배우는 점이 많다.

  6. 이제야 여름이 한 풀 꺾였지만 벌써부터 겨울을 생각하는 바지런함을 떨고 있다. 지난 여름이 오면 갈음할 것들 글에도 말했듯이, 이번 가을이 지나면 프랑스를 잠시 떠나 다른 나라의 삶을 향유할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시원한 바람의 풍요로움이 도시를 살랑이는 정취의 계절, 가을을 누리는 대신 바지런히 떠날 준비를 할 계획인데, 이 작지만 야심찬 계획을 가까운 지인들에게 알린 후 반응이 재미있어 기록해 두었다. 유럽 다른 나라에서 일하며 살고있는 친구는 같이 다른 영어권 나라로 떠나자며 현실도피를 제안했고, 미국 서부에 살고 있는 한 친구는 절친에게만 가능하다는 mi casa es tu casa 를 매일같이 거듭한다. 넘어 오라는 뜻이다.

  7. 매일 아침 저녁 요가 매트 위에서 명상과 이완을 훈련하며 생각한다. 이 매트가 알라딘의 마법 양탄자가 되어 어디든 날아갈 수 있다면, 현실의 고단함과 불안함을 해소시킬 수 있는 장치로 쓰여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라는 곳이 이토록 많은데! 물론 내가 속한 장소가 나를 말해주지 않으며, 정체성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시켜줄 수 없음은 안다. 한시간동안 요가의 목적대로 그저 도망가고 싶은 심정을 수련으로 다지고, 숨기고 타파하는데 아침 저녁으로 온 마음을 이끌어내리며 땀을 흘린다. 매트 위에서 희망을 찾았듯이, 이번에도 나를 성찰하고 단단하게 만들 수 있기를 마음에 집중하면서.

  8. 읽고 싶었던 책을 선물을 받은 기쁜 날이었다. 한 언어에 대한 애착과 어느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토론하며 자극을 받기도 했다. 세종부터 플로랑스 로슈포르 이야기까지, 다시금 치솟는 확진자 수에 confinement 이 되진 않을까 불안해하지 말자고 웃으며 집에 왔다. 공부는 끝이 없다. 타인과의 대화에서 나의 위치성과 삶의 준거점을 재확인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내뱉는 것이 아닌 ‘서로’ 쌍방으로 주고받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또 배운다. 그만큼 소모적이지 않으면서도 편안하고 유익한 대화가 흐르는 자리란 참으로 찾기 어렵다.

  9. 분배된 시선을 유지하고 모두가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며 배려하는 것. 이 중 하나라도 깨진 모임은 불편함이 남을 수 밖에 없다. 대화를 관찰하다보면 알 수 있는 몇가지를 머리속에 기록해 두는 편인데, 이 날은 술을 좀 마셔서 그런지 집에 오는 길에 대부분이 날라가버렸다. 물론 전 날 수면을 충분히 취하지 못한 탓에 집중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다. 3세트의 연주를 마치고 기어코 술 한잔을 마다하고 집으로 일찍 왔건만 새벽 두시였다. 씻고 누우니 세시. 그리고 다음 날 갔던 저녁 모임이다. 지하철을 타고 오는 길에 배부른 비둘기처럼 졸아야 했다.

  10. 한 줌 남은 기억력 (요새 들어 더욱 깜박하는) 에 연주를 찾아와준 친구도 알아보지 못하고, 하여튼 정신 차려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가 않은 요즘. 무대 앞에 와서 앉아 있는 코 앞의 친구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아무리 올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곤 하지만 좀 너무 하긴 했나. 그런 나에게 와서 푹 쉬기만 해. 하는 친구의 말에 야나두!를 외치며...정말 그러고 싶다. 실컷 책 읽고 공부하고, 매 주 좋아하는 곳에서 연주 하고.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좋겠다고 또 매트 위에 올라갈 말을 한다. 정작 매트 위에 올라간 나는 그렇게 물렁하지 않은데 말이다. 이제는 글을 쓰기로 약속을 하고, 부러 시간을 내야 쓸 수 있는 지경의 여유없는 상태가 되었다. 주말에는 글을 써야하는데, 기획 자료 찾는데만 시간을 너무 할애하고 있고 도통 진전이 없어 머리가 빠진다.

  11. 아무말 대잔치 기록은 이번주 머리속을 내내 맴돌던 미셸 오바마의 스피치를 인용하며 마무리. “they’re looking around wondering, if we’ve been lying to them this whole time, about who we are and what we truly va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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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사람 못알아보고 이름 모르기로 유명한데 ㆍㆍ뭐 제 특성이라 합리화하지만,
친구는 알아보긴합니다ㅎㅎㅎ

 6 years ago 

사람 이름 기억하기 쉽지 않더라구요. 저는 친구를.. ㅎㅎ 깜짝 놀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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