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육군전사 2권(57)
제2절 전투 경과 개요(부도 제31, 32, 33 참조)
단기 4283년 6월 25일 괴뢰군이 남침을 개시한 당시 적 제5사단 및 38 경비 제1여단의 공격정면 즉 강원지구의 38선 접경에 위치한 것은 아 제8사단이며 제3사단의 경비 지역은 그 후방인 경북지구 일원이었다. 그러므로 강릉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 지구의 일부 전투 경과에 관해서는 제1장 제6절 강릉 방면에서 상기하였으므로 본 절에서는 적의 강릉지방 침입 후 6월 28일 아 제3사단 제23연대가 부산에서 경북지구로 전진한 이후의 전투에 관하여 기술하기로 한다.
6월 26일 18:00 아 제3사단은 육본 작명 제93호(부록 제32 참조)에 의거 사단 주력과 제23연대의 대전차포 1개 중대를 서울에 집결하게 한 후 제23연대의 제1, 제2대대를 부산에, 제3대대를 마산에 배치하게 하고, 6월 27일 울진 북방 약 3㎞ 지점 온양리에 상륙한 적 제5사단 약 1개 대대 병력을 저지 섬멸하기 위하여 제23연대장은 6월 28일 제1, 제2, 제3대대(중화기 2개 중대, 대전차포 1개 중대를 제외)를 지휘하여 부산을 출발, 대구 경유 6월 29일 10:00에 포항에 도착, 자동차 수송으로 영덕~영해~평해를 경유하여 동일 13:00에는 울진 남방 4㎞ 지점에 도착하였다. 그 후 아군은 제1, 제2대대에서 각각 1개 소대를 차출하여 6월 30일 04:00 울진 남방 2㎞ 지점에 있는 왕비천을 도하, 울진 시내에 돌입, 수색한 결과, 울진 시내에는 이미 적의 무장 부대 약 1개 대대 병력이 선발대로 침입하여 양민 학살, 방화 등을 자행하고 있었으므로 동일 06:00 아 제3대대를 예비대로 제1대대를 울진 남방 2㎞ 지점의 무명고지에 제2대대를 울진서북방 약 2㎞ 지점에 각각 진출시켜 동일 4:00를 기하여 울진시에 총공격을 개시, 7월 1일 04:30까지 교전하였으나 전세 불리하여 예비대인 제3대대를 제1대대와 교대하고, 제1대대는 산포리에 철수하여 예비대로 편성하게 하였다. 아군은 7월 1일 06:00 미명을 기하여 재차 울진시에 총공격을 개시하고 제2대대는 동일 09:00에 울진시에 돌입하였다. 한편 제3대대는 전세불리로 울진 남방 왕비천 치음동까지 철수하고 예비대인 제1대대로 하여금 히도동에 진출시켜 제2대대를 지원하게 하였다. 동일 11:30 울진 북방 약 1㎞ 지점에서 포병을 보유한 적 2개 연대가 아 제2대대 우측 일대에 진격하여 왔으므로 아 제2대대는 포위상태에 빠지고, 동일 12:00에는 적은 전차 6대를 선두로 하여 울진시에 돌입하였다. 아군은 이에 중과부적 다만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제1, 제2대대는 기성리에 제3대대는 평해에 각각 철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병력의 1/3의 손해를 입어 장병의 사기가 저하되었으므로 아 제23연대장은 후퇴를 결심하고 7월 2일 연대본부를 평해에 두고 제1대대를 기성리 서북방 3㎞ 지점에 있는 무명고지에 배치, 제2대대는 기성리 북방 2㎞ 지점에 제3대대는 평해에 각각 배치하고 육군본부에 증원 병력을 요청한 바 영등포 학원 및 독립 제1대대를 제23연대장이 통합지휘하라는 작명에 의거하여 7월 2일 21:30 동 대대는 평해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전투력이 저하된 제2대대에 영등포학원을 편입, 제1대대는 독립 제1대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제1대대와 제3대대는 평해에 위치, 연대병력을 재편하였다. 7월 3일 04:00에 적은 울진으로부터 북평 지법동을 경유, 갈명리로 남하 중에 있고 내성리에는 적 1개 연대가 집결, 일부 병력은 독립 제1대대 정면에 공격을 가하여 왔다. 아 제23연대는 제1, 제2대대를 평해에 집결시키고 제3대대를 평산리에 진출시켜 독립 제1대대 영등포학원을 지원하게 하였다. 7월 3일 08:00에 제1, 제2대대는 내성리에 침입한 적을 상개리 전방에 견제하여 교전하였으나 적은 야포로써 아군에 포격을 가하므로 7월 3일 21:00 제1, 제2대대를 평해국민학교에 집결시키고 제3대대와 독립 제1대대를 영해에, 영등포학원을 후포리에 각각 철수하게 하였다. 아군은 차기 작전에 대비하기 위하여 제1대대는 한송리 우측 고지에, 제2대대는 상류리 전방 2㎞ 지점에 각각 배치, 전선을 정리하였다. 7월 3일 24:00 후포리, 한송리, 상류리 등에 배치한 아군은 적의 총공격을 받자 이를 격퇴하지 못하였고 각 대대는 분산 후퇴하여 전의는 극도로 저하하였다. 아군은 집결지를 영해국민학교로 철수하고 7월 4일에는 병력을 재편하였다.
7월 6일 08:00 제3대대를 해편 제1, 제2대대에 각각 편입, 재편하는 한편 영등포학원을 해체하여 독립 제1대대에 편입시켜 완전 3개 대대로 재편성하고, 08:30 아군은 병곡동과 미곡동을 연하는 선 일대에 제23연대와 독립 제1대대를 각각 배치하여 7월 8일에 이르기까지 적을 저지하고 있었으나 7월 9일에 이르러 적은 전차를 선두로 아 제23연대와 독립 제1대대 정면에 각각 1개 연대병력을 투입, 아군 진지에 압력을 가하여 왔다. 그러나 아군은 계속 진지를 확보하여 전면의 적과 교전을 전개, 피아간에는 백병전이 전개되었고, 아군은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연 3일간에 걸쳐 적의 남하 공격을 저지하였으나 계속되는 적의 압력으로 7월 11일 11:00 연대본부를 영해로부터 영덕에 이동, 동일 13:30에는 제23연대와 독립 제1대대를 영해 부근 일대에 철수, 배치 남하하는 적에 대비하였다. 그후 원만동과 옥금동 일대에 진출한 적은 산악지대 및 요지 요부를 점령하고 각 고지에서 중경 기타 각종 화기로써 아군에게 공격을 감행하여 왔으므로 병력과 장비에 열세한 아군은 차기 작전에 대비하기 위하여 부득이 7월 12일 이른 아침에 영덕으로 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