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의 재판>, 그리고 ‘마를렌 디트리히

in #kr6 years ago

“ <뉘른베르크의 재판>, 그리고 ‘마를렌 디트리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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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말쯤 부터였을 거다.
이걸 ‘역류성 식도에 의한 인후염’이라고 불러야 하나. 위산이나 위액이 식도를 타고 올라와 목을 자극해서 발생하는 증세라고 한다. 목이 칼칼하고 마치 몸살감기 증세 같은 걸 수반한다. 좀 나아지는가 싶으면 또 나빠짐을 반복된다. 그렇다고 드러누울 정도로 심각하지도 않다. 단지 몸이 무겁고, 컨디션이 다운되는 정도다. 올 겨울 유난을 떠는 북극 추위도 분명 한몫을 할 것이다.

문제는 딱히 약이 없다는 거다. 바이러스에 의한 것으로 보통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일이지만 불규칙한 생활습관과 스트레스, 면역력 결핍이 원인이란다. 스트레스와 면역력이 하루, 이틀에 회복될 사안도 아니니, 그저 답답할 노릇이다.

덕분에 일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만 보면서 하루를 꼬박 지새우는 많아졌다. 일단 당장 우선적으로 봐야할 영화들의 목록들이다. 벌써 한번 이상은 봤던 영화들이지만 오래되어 기억과 느낌이 가물가물하거나 모호한 요소들이 많은 영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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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선 (Solntse, The Sun, 2005), 알렉산더 소쿠로프 감독

  • 들고양이 (Il Gattopardo, The Leopard, 1963),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

  • 뉘른베르크의 재판 (Judgment At Nuremberg, 1961),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

  • 1936년의 나날 (Meres Tou '36, Days Of 36, 1972), 테오도로스 앙겔로풀로스 감독

  • 레들 대령 (Redl Ezredes, Colonel Redl, 1985), 이스트반 자보 감독

  •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 (Balada Triste De Trompeta, The Last Circus, 2010),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 감독

  • 리스본의 미스터리(Misterios De Lisboa, Mysteries Of Lisbon, 2010), 라울 루이즈 감독

  • 독일 영년 (Germany, Year Zero, Germania Anno Zero, 1947),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

  • 로렌조의 밤 (La Notte Di San Lorenzo, The Night Of San Lorenzo, 1982), 파올로 타비아니, 비

토리오 타비아니 감독
즐거워야 할 ‘일’이 ‘노동’이 되는 순간 지겨워진다. 컨디션도 좋지 않거니와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봤던 데다 이 영화들을 연속으로 본다는 건 애초 과욕이었다. 고작 일제가 패망하고 무조건 항복 선언을 1945년 8월15일 천황 ‘히로히토’의 그날의 하루를 그린 소쿠로프 감독의 <더 선>과 흔히들 <레오파드>라는 제목으로 더 알려진 비스콘티 감독의 대작으로 19세기 중반 가리발디가 이끄는 이탈리아 통일전쟁의 와중에 시실리 귀족일가의 삶을 그린 <들고양이>만 겨우 소화하고 <뉘른베르크의 재판>으로 겨우 넘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전을 한 연합군은 전쟁범죄자들에 대해 재판을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열었다. 뉘른베르크는 연합군에게나 나치독일에게나 대단히 상징적인 곳이다. 뉘른베르크에서는 1927년부터 1938년까지 매년 나치전당대회가 열렸던 곳이다. 특히 1934년 전당대회는 인상적인 대회였다. 히틀러가 집권에 성공한 이후 개최된 첫 전당대회인데다 ‘레니 리펜슈탈’의 기념비적이며 역사상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다큐멘터리 영화 <의지의 승리>가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또한 1935년 전당대회에서는 나치 독일의 인종차별을 법제화한 ‘반유대주의법’이 처음 공표 된 곳이 바로 뉘른베르크였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은 크게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나치독일의 공군사령관으로 히틀러에 이어 2인자 노릇을 했던 ‘헤르만 괴링’같은 1급 전범 24명을 다룬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으로 구성된 ‘국제군사재판’이다. 그리고 이들의 재판이 종료된 이후 1946년부터 미군 점령지하 미군 군사법정에서 진행된 나치 지도자급 인물 185명에 대한 이른바 ‘계속재판’이다. 그러나 괴링과 저명한 지리학자로 히틀러의 침략전쟁의 이론적 근거들을 제시했던 ‘카를 하우스호퍼’, 나치 어용노조인 ‘독일노동전선’의 총수였던 ‘로베르트 라이’ 같은 핵심 인물들이 재판도중에 감옥에서 자살해버리는 바람에 전쟁범죄에 대해 제대로 징치할 건덕지도 없어졌다.

기껏해야 전쟁 범죄로 기소된 자들이 2백 명 가량에 불과한 전범재판이었다. 무죄판결을 받은 자들도 많았고, 교수형을 받은 몇몇 인물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나치 부총통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루돌프 헤스’만 빼놓고 1960년 대 이전에 석방되었다. 그 헤스마저 1987년 옥중에서 자살해버렸다. 오히려 전쟁의 대가를 톡톡히 치룬 건 어린아이들과 여성들이었다. 어린아이들은 굶주림 속에 연합군의 폭격과 진격에 의한 전투 등으로 수난을 당했고, 베를린이 소련군에 의해 함락되고 난 뒤 강간을 당한 여성들의 숫자만 무려 10만을 넘었다.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영화 <뉘른베르크의 재판>은 ‘계속재판’을 무대로 한다. 법정영화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평을 듣는 게 영화 <뉘른베르크의 재판>이다. 히틀러와 나치정권에 협력했던 법관들을 오히려 심판하는 재판이었다. 캐스팅도 당대 최고의 배우들로 라인업을 구성했다. 재판관이 ‘스펜서 트레이시’ 할배다. 이 할배는 내 어렸을 때부터 봤던 이 할배가 출연한 거의 모든 영화에서 인자함과 현명함을 겸비한 이미지로 줄곧 나왔던 할배, 역시 그 모습 그대로다. 그런데 1900년생이다. 영화 찍은 당시에는 예순 한 살. 그렇게 많은 나이도 아니었건만 1930년대 초반부터 활동을 했다는데 왜 할배의 인상만 남았을까.

미군 검찰관 역으로는 당대 헐리웃의 최고 스타 중 하나였던 ‘리처드 위드마크’가 맡았다. 그리고 변호사 역에는 독일의 명배우 ‘막시밀리언 셀’이다. 젊었을 때의 막시밀리언 셀의 모습도 생소하다. 나치 치하에서 판사로 활동했던 4명의 피고인 중 가장 핵심으로 지목되는 ‘언스트 야닝’ 판사 역에는 ‘버트 랭카스터’다. 처음 데뷔 당시만 하더라도 ‘남성 육체파(?)배우’를 소리를 들었던, 그러니까 후대였으면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정도 되었을 버트 랭카스터였지만 이후 ‘연기파’ 배우로 진화한 것도 이채롭다. 그는 <들고양이>에서도 몰락하는 귀족사회를 대변하며 늙어가는 무상한 세월을 한탄하는 ‘살리나 백작 역’을 감탄할 만한 연기력으로 소화해냈다.

그리고 요즘 같으면 ‘탐 크루즈’와 같은 미남배우의 대명사였던 ‘몽고메리 클리프트’도 나온다. 지능이 모자라 우생학적으로 우성과 열성 인자를 가려냈던 나치에 의해 열성 인자로 거세된 인물 역이다. 1930년 대판 판타지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그 깜찍했던 ‘도로시’역의 ‘주디 갈란드’는 이제 아줌마가 되었다. 그녀는 유태인 부자 노인과 사귀었다는 혐의로 ‘언스트 야닝’, 즉 버트 랭카스터의 재판에서 형을 받았던 피해자 역할이다.

<뉘른베르크의 재판>은 영화 개봉 불과 몇 개월 후에 열리게 될 ‘세기의 재판’이라 불렸던 나치 친위대의 유태인 호송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하듯 마치 전주와 같았다. 아이히만처럼 나치체제에 복무했던 법관들과 변호사는 자신들의 행위가 삼엄한 나치권력 아래서 어쩔 수 없었던 공적인 일상적 업무였다고 극력 항변한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했던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이들의 행위를 두고 치열한 법리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보는 것도 이 영화의 중요한 재미다. 그러나 유독 ‘언스트 야닝’ 판사 역을 맡은 버트 랭카스터만이 재판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참회한다. 과연 그는 진정한 참회를 했을까. 극적인 ‘반전’이라는 법정영화의 묘미가 <뉘른베르크의 재판>에서부터 비로소 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비중 있는 역할을 아니었지만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은 배우는 단연 ‘마를렌 디트리히’였다. 그녀는 전쟁 중 죽은 나치독일의 장군의 미망인 역할이다. 이 야릇하고 오묘한 분위기의 디트리히의 숨막히는 매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쭉쭉 빠지고 빵빵한 절세미인들이 차고 넘치는 헐리웃 영화판에서 그녀는 그다지 빼어난 미모라고도 할 수 없다. 초점을 잃은 듯 흐릿한 눈빛은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목소리마저 저음의 무겁고 걸쭉한 탁음의 허스키다. 뛰어난 각선미의 소유자라지만 그녀가 몸으로만 승부한 여배우라고 결코 말할 수도 없다.

1901년생인 마를렌 디트리히는 무성영화시대에 독일에서 데뷔했지만 별로 빛을 못 봤다. 그러나 미국으로 건너와 유성영화시대에서 그 목소리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더구나 몸매마저 뛰어나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관능적이고 퇴폐적인 디트리히만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섹스심벌’로 등극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그녀가 맡는 배역들도 대부분 모호한 성정체성의 중성적 분위기의 역할이나, 카바레의 쇼걸, 매춘부 등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장에 간 연인을 그리는 ‘릴리 마를렌’이라는 독일 민요를 취입하여, 일약 연합군, 독일군 가릴 것 없이 애절하게 가슴을 적셔주는 최고의 히트곡으로 군림하기도 했다.

그녀의 사생활도 유별났다. 디트리히 1924년 스물 세 살의 나이에 ‘루돌프 지버’라는 남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의 정상적인 부부생활은 딱 5년뿐이었다고 한다. 이후에는 이혼을 하지 않은 채 평생 친구로 지내기로 했단다. 이들의 이상한, 또는 이상적 관계는 지버가 먼저 1976년에 병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마를렌 디트리히는 법적인 유부녀였지만 자유롭게 살았고, 숱한 남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그녀의 강력한 매력에 매혹당한 남자들은 셀 수가 없을 정도였고 신비주의 억만장자였던 ‘하워드 휴즈’나, 당대의 톱스타들인 ‘율 브리너’, ‘프랭크 시내트라’ 같은 대배우들도 그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프랑스의 명배우 ‘장 가방’과는 가장 뜨거운 사이였다고 한다.

또한 마를렌 디트리히는 ‘양성애자’였다. 아무리 개방적인 헐리웃 영화판일지라도 당시에는 ‘동성애’, ‘양성애’는 금기시되었던 시대였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디트리히는 남성 못지않게 수많은 여성들과 사랑을 했다. 남녀를 불문했던 그녀는 시대를 앞서 간 ‘폴리아모리즘(다자간 연애)’의 마치 ‘종결자’였다.

<뉘른베르크의 재판>이 촬영될 때가 1961년으로 마를렌 디트리히가 환갑이 되던 해다. 그런데 그 나이가 무색하게 디트리히는 오히려 더욱 성숙되고 농염한 매력으로 가슴을 요동치게 만든다. 같이 공연한 스펜서 트레이시와는 고작 한 살 차이에 불과하지만, 인자한 할배 이미지의 트레이시와는 어찌 이렇게 차이가 날까. 매력의 코드가 서로 다른 것 일겠지만 그 나이에 묘한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다.

지금껏 연상의 여인을 한 번도 사귀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예순 살 디트리히를 보면서 요상하게 빠져 들어가는 그 흡인력의 강도에 스스로가 놀란다. 그것도 편견이 작용할 수 있었음을 새삼 느낀다. 꽤나 나이차가 나는 연상의 여인도 코드가 서로 맞으면 충분히 사귈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물론 배우로서 관리를 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 시대처럼 요란한 성형으로 만들어질 그런 허접한 성질의 모습이 결코 아니다. 천성으로 타고난 재능과 매력, 그리고 자신의 삶을 살고자 했던 처절한 노력일 것이다. 그러니까 16살 연하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조차 왜 그녀의 연인목록에 이름을 올렸는지 비로소 알 것 같다.

그러나 그녀의 말년은 외로웠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각선미로 세상을 호령했던 그녀였지만 다리에 암이 생기고 진통제에 의존하는 투병생활로 전전해야 했다. 급기야 1975년 무대에서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로 결국 완전히 은퇴하고 말았다. 이후 파리에서 은둔하며 생활하다 1992년 5월 6일 수면제를 과다복용하고 자살한다. 90평생을 불꽃처럼 살았던 이 여인의 마지막에는 그녀가 무수한 염문을 뿌렸던 그 많던 남녀 중에 그 누구 하나 없이 혼자였다. 아니면 이제 혼자가 된 걸 알았기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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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출에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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