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history> 희대의 기회주의자 박정희 외전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
안녕하세요 ~^^
근현대사를 포스팅하고 있는 잠마루@jammaru31 입니다.
이번주는 회사 사무실 이사와 따로 하는 사업의 매장이사가 겹쳐서 말도 안되는 스케쥴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행이 시간이 잔깐 나서 기존에 쓸려고 했던 박정희 4부를 대신해서 육영수여사 피격사건에 대해서 포스팅할려고 합니다. 많은 의문이 아직도 풀리지 않는 육영수여사 피격사건 시작해 보겠습니다~
<kr-history> 희대의 기회주의자 박정희 외전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
1974년 12월20일 서울구치소에서 문세광이라는 한 젊은 청년이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죄목은 당시의 독재자 이자 최고 권력인 박정희의 배우자였던 육영수 여사의 살인죄 였습니다.
이 문세광이라는 청년은 누구였을까요? 누구 였기에 대통령 부인을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을까요?
문세광(위키피디아 참조)
문세광(文世光, 1951년 12월 26일 ~ 1974년 12월 20일)은 박정희 전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던 재일 한국인으로, 일본식 통명은 난조 세이코(일본어: 南条 世光)였다. 문세광은 1974년 7월 17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 사이에 오사카 시 주오 구 고즈(高津) 파출소의 창문을 깨고 침입했다. 문세광은 경찰관 4명이 잠을 자고 있던 사이에 실탄 5개가 들어간 권총 2자루를 빼냈다. 8월 6일에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트랜지스터 라디오 속에 권총을 감췄고 8월 8일에 김포국제공항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위조된 여권을 이용해서 대한민국에 입국한 문세광은 8월 15일 광복절 경축행사가 열린 국립극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저격하였다. 문세광은 4개월이 지난 12월 20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지금 시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행된 암살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인지 다양한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혹이 존재합니다.
게다가 결정적인 계기는 사건발생 16년이 지난 1989년 8월,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수사관의 양심선언으로 촉발 되었습니다.
그사람의 이름은 "이건우"씨 였고 사건당시의 직책은 서울시경찰국 감식계장(경감) 이었습니다.
이건우씨의 주장은 그야말로 폭탄선언 이었습니다.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에 죽은것이 아니다" , "육영수의 암살범은 따로 있다"
당시 이건우씨의 양심선언은 대단한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이건우씨의 근거를 차례로 나열해 보자면
- 문세광의 총기소지
대통령이 참석하는 중대한 행사에 최고의 보안이 요구되는것은 하나의 상식입니다.
당연히 출입구에는 금속탐지기가 작동되고 있고 행사장엔 관할 경찰은 물론 청와대 경호실,중앙정보부 등 관계기관의 요원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문세광은 특별한 검문도 없이 초청받지 않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 입장합니다.
총기를 소지한 초청받지 않은 인물이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 제재 없이 입장할 수 있다라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 총알의 발사탄수
당시 재판의 판결문을 보면
제1탄은 범인 대퇴부
제2탄은 연단좌측
제3탄은 불발
제4탄은 육영수
제5탄은 연단 뒷쪽의 국기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검증을 했던 이건우씨는 제5탄은 문세광의 총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이건우씨가 확인한 바로는
제1탄은 오발
제2탄은 연단
제3탄은 태극기
제4탄은 천장
마지막 제5탄은 총에 그대로 남아 있었음
그러니까 이건우씨의 주장대로라면 그날 문세광은 육영수를 저격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리고 당시 사건을 맡았던 담당검사 김일두씨도 문세광이 사용한 총은 미제 스미신 5연발로 범행때 4발만 쏘고 나머지 한발은 장전된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발표하였었습니다.
여기서 더 신기한 점은 그런데 사건직후 당시 청와대의 발표를 보면
제1탄은 불발
제2탄은 연단
제3탄은 육영수 저격
이렇게 발표를 합니다.
청와대,검찰,경찰,법원의 발표가 모두 다르게 발표를 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요?
- 현장보존 문제
서건직후 구성된 이건우씨를 포함한 수사팀은 다음날 바로 현장 확인차 국립극장에 갔습니다.
그러나 탄흔은 찾았지만 탄두를 찾는데는 실패했습니다.
탄흔이 있는데 어째서 탄두가 없는 것일까요?
당시 국립극장 소도구 주임은 "어젯밤(8월15일) 청와대 경호실 요원들이 자정 가까운 시간에 불쑥 나타나서 극장안을 샅샅이 쓸어갔다" 라고 증언 했습니다.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당시 청와대 경호실은 수사본부의 현장검증이 실시되기도 전에 현장보존의 원칙을 깨뜨렸다는 얘기가 됩니다.
결국 사건을 맡았던 수사본부는 탄두 하나도 확보하지 못했고 육영수를 관통한 탄두를 확인한다면 범인 소재는 명확하게 드러날텐데 청와대 경호실은 왜 탄두를 제거해 갔을까요?
4, 문세광이 투숙한 호텔과 승용차
사건 당시 문세광은 조선호텔에 묵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용한 차량은 [서울2바 1091]으로 검은색 포드 였습니다.
당시에도 상당히 고급 브랜드 였던 포스사의 승용차를 어떻게 문세광이 가지고 있었을까요?
더욱 놀라운것은 이차는 차적조회에서 등록되지 않은 위장번호로 확인 되었습니다.
- 육영수여사의 총상 위치
2005년 1월 28일 SBS TV의 '그것이 알고 싶다' 취재팀의 요청에 따라 당시 녹화된 비디오와 총성이 녹음된 테이프를 사용, 총소리를 숭실대 소리공학연구소 배명진 교수팀이 분석한 결과 경축식장에서 숨진 육영수 여사는 문세광의 총이 아닌 경호원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분석결과를 제시했습니다.
당시 박종규 경호실장이 문세광 쪽으로 달려가며 리볼버 권총 해머를 코킹하면서 권총을 뽑았고 연단 앞에서 지향사격자세를 취할 때 권총이 손에서 미끄러집니다. 미끄러진 권총이 박실장 손위에서 놀다가 떨어졌고 권총이 박실장의 왼쪽 무릎을 지날 때 총구는 뒤쪽 45도 방향으로 해머가 풀리며 격발됬습니다.
꺼낼 때부터 손에서 총이 헛돌았고 박실장이 권총을 다시 잡으려 할 때 손가락에 해머가 풀려 발사된 총알이 총구 방향 쪽에 있던 육영수의 우측 이마를 맞고 두개골 내부 정수리에서 한번 튀기고 좌측 뒤통수 쪽으로 나오는 게 화면에 잡혀있었스니다.
이 사실을 과연 청화대에서 확인을 하지 못했을까요?
그렇지 다 않다면 무슨 이유로 사건을 조작하고 범인을 조작했을까요?
마지막으로 당시에 박정희가 처한 상황을 보면 당시 박정희는 1973년 8월 8일 일본에 망명중인 김대중 전대통령을 도쿄에서 납치 합니다. 그리고 8월 13일 서울에 자택에서 김대중 전대통령은 발견되죠.
박정희는 항상 김대중 전대통령에게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인 14톤 대형트럭과의 교통사로 큰 부상을 입어서 평생 다리를 절게 되시죠.
김대중전 대통령을 납치한 이후로 박정희 대통령은 국제적으로 많은 지탄을 받게 됩니다.
대내외적으로 도덕적 위기에 몰려 있던 박정희는 문세광 사건과 육영수 여사의 죽음 통해서 이 위기를 돌파 했습니다.
물론 아직도 누가 무슨이유로 육영수 여사를 죽였는지는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박정희가 정치적으로 많은 이득을 취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기회주의자로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면 조국도 신념도 동지도 버렸던 박정희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근현대사에 관한 흥미로운 포스팅 잘 읽고 갑니다 ^^
감삽니다~~^^
노고감사합니다. 보팅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자주 놀러 오세요~^^
흥미롭네요.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와서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부분은 현대사의 미스테리 같습니다 최소한 문세광은 아닌거 같긴 한데 너무 자료가 없으니까요 ㅠㅠ
ㅜㅜ 네 도대체 진실은 무엇일까요?
당시에 진실을 보았던 사람들이 진실을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1일 1회 포스팅!
1일 1회 짱짱맨 태그 사용!
^^ 즐거운 스티밋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