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책리뷰] 평양냉면 - 김남천, 백석 외 저

in #kr8 years ago (edited)

별로 기대 없이 잡아들었던 책에서 상당한 내공을 발견할 때가 있다. 바로 이 책의 경우다.

이 책은 워낙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탓에 관련된 정보나 얻어볼까란 생각으로 집어들었다. 출판사는 가갸날. 지은이는 김난천, 백석, 최재영 외. 이름이 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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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서문을 읽었다. 그냥 평이했다. 판문점에서 벌어진 남북정상회담서 평양냉면이 나오면서 화제가 됐단 얘기도 있었다. 약간 눈에 띄는 것은 서문 쓴 사람의 이름이 '이상'이란 것. 백석, 이상.. 뭐야 이름들이 왜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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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문으로 들어갔다. 첫 글은 시(詩)인가.. 사철 명물 : 평양냉면. 각 계절마다 평양냉면을 예찬한 내용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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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별 느낌 없이 읽다가 서서히 놀랐다. 뭐지? 누군데 이렇게 문장을 잘쓰지? 작가 이름은 '김소저'. 누구지? 의문은 다음 장에서 풀렸다. 1932년 <별건곤>이란 책에 실린 시였다. 80년 전에 활동하던 작가였구나. 어쩐지. 낯설다했더니.

시 전문을 옮겨본다.

사철 명물 : 평양냉면
김소저 작가


봄바람이 건듯 불어 잠자던 모란대에 나무마다 잎 트고 가지마다 꽃 피는 3,4월 긴-해를 춘흥에 겨워 즐기다가 지친 다리를 대동문 앞 드높은 2층루에 실어놓고 패강 푸른물 따라 종일의 피로를 흘려보내며 그득 담은 한 그릇 냉면에 시장기를 면할 때!

여름
대륙의 영향으로 여름날 열기가 상당히 높은 평양에서 더위가 몹시 다툴 때 흰 벌덕대접에 주먹 같은 얼음 덩어리를 속에 감추고 서리서리 얽힌 냉면! 얼음에 더위를 물리치고 겨자와 산미에 권태를 떨쳐버리리!

가을
수년을 두고 그리던 지기를 패성에 마자다가 능라도 버들 사이로 비쳐오는 달빛을 맞으며 흉금을 헤쳐 놓고 오랜 회포를 이야기할 때 줄기줄기 긴- 냉면을 물어 끊기 어려움이 그들의 우정을 말하는 듯할 때!

겨울
조선 사람이 외국 가서 흔히 그리운 것이 김치 생각이라듯이, 평양 사람이 타향에 가 있을 때 문득문득 평양을 그립게 하는 한 힘이 있으니, 이것은 겨울 냉면 맛이다. 함박눈이 더벅더벅 내릴 때 방안에는 바느질하시며 삼국지를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만 고요히 고요히 울리고 있다. 눈앞에 글자 하나가 둘 셋으로 보이고 어머니 말소리가 차차 가늘게 들려올 때, "국수요-"하는 큰 목소리와 같이 방문을 열고 들여놓는 것은 타래타래 지은 냉면이다. 꽁꽁 언 김치죽을 뚜르고 살얼음이 뜬 진장김칫국에다 한 젓가락 두 젓가락 풀어 먹고 우르르 떨려서 온돌방 아랫목으로 가는 맛! 평양냉면의 이 맛을 못 본이요. 상상이 어떻소!
-<별건곤> 1929.12

그 다음 산문은 더 강력했다. 이런 맛깔나는 글솜씨라니. 김남천이라는 소설가이자 평론가. KAPF의 중심이론가로서 작가가 현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던 작가가 쓴 글이었다. 이 글은 너무 흥미진진하다.

산문에서 재밌는 부분을 발췌하면..

'언젠가 우리 시골서 다섯 사람이 내기 화투를 하고 밤참을 주문할 때에 그 중 한 사람의 50줄에 든 늙은 분을 위하여 "다섯 그릇 중 한 그릇은 온면이오."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그 늙은이는 아무 말도 안하고 자리를 찼다. 휑하니 밖으로 나가는 것을 알아채고, "아즈바니, 젊은 놈이 미쳐 실수했으니 눌려 보아 주시오"해서 겨우 노염을 푼 적이 있다. 앉아서 그 분이 하는 말이 "임자네들이 날 병신 취급하는 바엔 아여 당초에 함께 장난을 칠게 무언가" 운운. 그는 저 혼자 온면을 먹으랬다고 그것에 모욕을 느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는 국수를 주문할 때엔 연로한 분이 있으면 "아즈바닌 무얼 하실까요?"하고 은근히 묻는 일이 많아졌다.'
이 글은 1938년 5월 조선일보에 실린 글이다.

확실히 시간을 거슬러갈수록 문장을 잘 쓰는 작가들이 많다. 요즘 에세이 쓰는 다수의 작가들보다 문장력과 흡입력이 뛰어나다. 책에는 냉면을 소재로 한 근대소설, 역사적 기록 속의 평양냉면, 현대의 평양냉면 기행기 등을 잘 편집했다. 하나같이 필력이 상당한 글들이다. 편집자의 안목도 수준급이다. 아무래도 이 책은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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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ㅋ과 한국 (특히)근대문학의 문체들을 좋아했던 제게도 흥미로울 책이네요!

네 근대문학을 오랜만에 보는데요. 문장들이 정갈하면서도 재치가 있어요ㅋ 저로선 근대문학의 재발견!

덕분의 계기로 오랜만에 떠올리니 부쩍 더 읽고 싶네요, 한국 문학을 못 즐긴 지 얼마나 되었나ㅠㅠㅎㅎ

바로 주문했습니다. ㅋㅋ

ㅎㅎ 평냉 한번 드시러 가시죠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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