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잇 연재소설) [PANic Song -chapter 8] Monster(1)

in #kr-writing6 years ago

“신일 씨, 이 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참고인은 몇 분이 지나도록 말없이 팔짱만 끼고 앉았다. 혜원의 애달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일은 눈을 감은 채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쉴 새 없이 짜 맞추고 있었다. 구름 위를 달리는 말과 긴 여정을 떠나는 권능의 여왕과 돌처럼 굳어 있어야 하는 자 사이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이 글의 아이디 말이에요.”

신일의 첫 마디, 혜원은 그제야 책상 위에 놓인 노트를 들어 메모를 준비했다.

“「구름 위를 달리는 말」이라는 아이디 말이죠?”

“예.”

“그게 왜요?”

“페가수스(Pegasus)에요.”

“페가수스라면 그…”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의 천마(天馬)요. 여기 「구름 위를 달리는 말」이나, 「피에서 잉태되어 자유롭게 하늘을 달린다.」는 문구는 모두 페가수스를 암시하는 것들이에요.”

“구름 위를 달린다는 건 알겠는데 피에서 잉태되었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혹시 페가수스 신화에 대해 들어본 적 있으세요?”

“아니요, 페가수스는 들어봤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잘….”

“페가수스는 페르세우스(Perseus)라는 영웅이 처단한 괴물의 피에서 탄생한 존재에요. 괴수의 머리가 잘릴 때 뿌려진 피에 포세이돈이 영혼을 불어 넣어 만들었다고 전해지죠.”

“영웅 페르세우스가 처단한 괴물? 이번에도 영웅과 괴물 이야기인가요?”

“그렇죠. 새로운 괴물의 등장이라고나 할까요.”

“새로운 괴물?”

“예. 여기 제목에 나오는 「긴 여정을 떠나는 권능의 여왕」이 바로 페르세우스에게 목이 잘린 괴물을 뜻하거든요.”

“이 글의 제목에 나오는….”

“아마 혜원 씨도 들어본 적 있을 거예요. 악명 높은 「고르곤(Gorgon)의 3마녀」중 막내이자, 아마도 그리스 신화 통틀어 가장 유명한 괴물일 테니까요.”

“고르곤 3마녀는 생소하지만, 페르세우스의 영웅담이라면 저도 얼핏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요.”

“워낙 유명한 얘기니까요. 자매 지간인 고르곤 3마녀의 이름을 연결해 문장으로 만들면, 이 제목과 같은 뜻이 되죠. 3마녀 중 장녀였던 스테노(Sthenno)는 고대 그리스어로 「권능」, 차녀 에우리알레(Euryale)는 「긴 여정」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여왕」이라는 뜻을 가진 막내 이름이 바로….”

“메두사(Medusa), 메두사 맞죠?”

“맞아요. 눈을 마주한 자는 누구든 돌로 굳게 만들었다는 요괴. 페르세우스가 아테네에게 하사받은 청동방패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돌이 되어 자멸한 괴물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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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메두사의 머리(Head of Medusa), 1617

새로운 괴물의 등장을 설명하면서도 신일은 팔짱을 풀지 않았다. 이 글, 동일인의 문체가 분명하다. 지금 신일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건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짜인, 이 글의 구조였다.

“하지만 이상하네요. 이번에 등장하는 괴물은 범인 스스로를 지칭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렇죠? 글의 흐름으로 봐서는 아마도 이 메두사가….”

“도경욱 중사를 뜻하는 것 같죠?”

역시, 그녀도 같은 생각이다.

“그런데 신일 씨, 이 문장 마지막에 나오는 「영웅을 태운 영물」이라는 건 뭐죠?”

“그 문구 역시 페가수스를 암시해요. 페가수스는 후에 벨레로폰(Bellerophon)의 영웅담에 다시 등장하거든요. 벨레로폰이 괴물 키메라(Chimera)를 처단할 때 페가수스를 타고 날아올라 그 목을 베었다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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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 이바노프(Alexander Andreyevich Ivanov), 벨레로폰과 페가수스(Bellerophon and Pegasus), 1829

“괴물의 피에서 잉태되어 괴물을 처단하는 존재.”

“예?”

“페가수스 말이에요. 신일 씨가 방금 그랬잖아요. 괴물 메두사에게서 태어나 또 다른 괴물, 키메라를 없앤 존재라고.”

“….”

“신일 씨, 어쩌면 말이에요.”

혜원이 활발하게 움직이던 펜대를 돌연 멈춘다.

“이때까지만 해도 범인은 스스로 괴물이 될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 아닐까요?”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 글, 말이에요. 이전 글과 뉘앙스랄까 톤이 미묘하게 달라요. 이전의 기분 나쁜 스산함이 없다고 할까. 어딘지 슬픈 느낌이 묻어난다고요? 여기 마지막 문장, 「이제 그대에게 물으니, 내게 답하라. 나는 어미를 닮은 괴물인가, 영웅을 태운 천마인가.」 부분이 특히 그래요. 어쩌면 범인은 이때까지만 해도, 도 중사를 살해한 당시까지만 해도 자신의 범행에 대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갈등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괴물의 자식인지, 영웅의 조력자인지 평생 혼란스러워 했을 페가수스처럼 말이에요.”

혜원의 말투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했다.

“신일 씨, 범인이 이번 메시지, 메두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뭐였을까요? 부정에 대한 침묵이나, 부당한 강요처럼 이번에도 범인이 의도한 게 있을 텐데요. 메두사 신화에 제가 알아야 할 만한 이야기가 더 있을까요?”

감상에 빠지지 않으려는 듯 혜원은 다시 펜대를 힘차게 쥐었다.

“글쎄요. 메두사는 괴물로 변하기 전까지는 탐스러운 머릿결을 지닌 아름다운 소녀였다고 해요.”

“그랬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어쩌면 거기에 사건의 단서가 숨겨져 있을지도….”

“음, 그녀는 미모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신조차 반하게 할 만한 미모라는 우월감이랄까. 실제 그녀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유혹해 그와 애정행각을 벌인 걸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죠. 문제는 그 애정행각을 벌인 장소가 아테나(Athene)여신의 신전이었다는 점이죠.”

“여신의 신전에서?”

“예.”

“남사스럽네요, 그건.”

“그 여신이 지혜와 전쟁의 신이었으니 그 응분의 대가는 더욱 혹독할 수밖에 없었죠. 자기 신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걸 안 아테네는 메두사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저주를 내려요. 그녀의 머리카락을 끔찍한 뱀으로 바꾸고, 그녀의 눈과 마주한 모든 존재를 돌로 바꾸어 버린 거죠. 신도 두려워하지 않던 건방진 소녀가 한 순간 흉측한 괴물로 변하게 된 겁니다.”

“여기 「욕정에 눈이 멀었다」는 게 메두사와 포세이돈과의 애정행각을 염두에 둔 거군요.”

“그럴 수도 있고요.”

“그렇다면 메두사 신화와 도경욱 씨 살인사건의 접점을 찾는다고 하면, 도경욱 씨가 어떤 욕정에 사로잡혀 일을 그르쳤다는 얘기일 텐데….”

혜원의 질문에 신일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군에서의 욕정, 그건 함부로 의심하고 추론해서 재단하기 어려운 주제였다.

그 역시 도 중사의 학대음란성을 의심한 적은 있었다. 상대를 사납게 몰아붙일 때 보이던 그 상기된 얼굴, 그건 분명 성적 흥분처럼 보였다.

정녕, 그의 학대행위는 추잡한 욕정의 분출이었나. 신일은 앞 머리를 한 움큼 쥐어뜯었다. 이제 그곳에서 있었던 일 중 그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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