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부처님 오신날 풍경들

in #kr-life6 years ago (edited)

며칠 전


석가탄신일이 있기 며칠 전, 아이를 데리고 대구의 두류공원엘 갔다. 길가에 연등이 있길래 금용사에도 들러 대웅전의 불상을 보며 아이와 함께 절을 하고, 아무도 없는 산신각에 가서 그림을 보여주며 호랑이 데리고 다니는 산신령 이야길 했다.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절에서 보이는 풍경이나 위치로 봤을 때 이 자리가 일제시대에 신사神社, 神祠는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경주 황성공원의 소나무 숲, 그 안의 충혼탑이 일제시대에는 신사였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도시의 조금 높은 언덕에 있는 탑, 사찰, 비석 자리가 매번 신사로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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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눈이 아리도록 밝고 맑은 공휴일, 아이가 새벽부터 깨어 설친 탓에 오전 10시쯤인데 벌써 한나절이 지난 것 같다. 그래도 3박자가 맞아 떨어지는 이런 귀한 날(날씨 좋고 미세먼지 없는 휴일)에 집에만 있을 수 있나. 김천 직지사, 경주 불국사, 합천 해인사, 팔공산 동화사 등 굵직한 사찰을 떠올렸다가 왕복 시간과 인파를 떠올리며 포기한다.

'대구 남구 사찰, 대구 북구 사찰, 대구 달서구 사찰', 네이버와 구글에 검색어를 마구 넣어본다. 사진이 함께 뜨면 금상첨화. 결국 낙점된 곳은 칠곡 관음사. 절 규모는 작아보이지만 근처 엑스코 NC아울렛, 코스트코, 운암지를 함께 노려볼만한 좋은 위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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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가피加被는 넓고도 크도다. 달력의 빨간색 덕분에 하루 쉬는 나도, 그 덕에 가족과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아이도, 공짜 절밥을 먹는 수많은 사람들도, 사람들 틈에 서서 명함을 나눠주는 지방선거 후보자도, 절 입구에서 오천원짜리 모자를 파는 사람들도, 모자 판매대 옆의 신용카드 영업사원도 모두 석가의 가피를 입은 운 좋은 중생들일지니. 도대체 부처님은 몇 개의 입을 먹여살리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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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 피해 설법전 안으로 들어가니 빔프로젝터가 열심히 설법을 펼치고 있다. 얼마전 유튜브 영화소개채널에서 살짝 보았던 영화 '인류멸망보고서: 천상의 피조물'이 떠오른다. 시간이 많이 지나면 저 자리에 로봇이 앉아서 설법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어림없다. 대구어린이회관에서 본, 손바닥을 펴서 입장객에게 환영인사를 할 사명을 타고났음에도 손가락 관절 고장으로 수개월째 빠큐를 날리는 로봇을 증거로 제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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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자아를 가진 로봇이 근무처우에 대한 불만을 표하고자 가운뎃손가락을 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기부처를 씻겨주는 의식을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다. 산부인과에서 의사 품에 안기자마자, 탯줄을 자르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치는 아기부처를 상상해본다. 갑자기 내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나도 물 콸콸 해볼래'라고 외친다. 아이야, 니 몸이나 잘 씻으면 좋겠구나. 어쩔 수 없이 줄을 섰다. 입구쪽에서는 장미꽃 한송이를 천원에 팔고 있다. 부처님 오신 날, 꽃과 연등을 이용한 세레머니를 하는데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불교에는 수많은 부처가 존재하고 석가모니는 그 중 하나라는 점을 생각하며 아래 내용을 읽기를 권한다.

석가모니의 전생에서, 그는 독신을 맹세한 수행자 였다. 어느 날 그가 등광불(또는 연등불, 정광불, 보광불)이라는 부처를 공양할 인연이 있어 꽃을 바치려했다. 그러나 그 동네의 부자가 이미 싹쓸이 해 간 탓에 꽃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그 때 7송이의 꽃을 들고 가던 여인을 발견하고 꽃을 5송이 사겠다고 하자, 여인은 놀리는 투로 '한송이에 1비트코인, 이번 생은 물론 다음 생에도, 그 다음 생에도 나와 결혼을 하겠다고 맹세한다면 팔겠다'고 답했다.아마 수행자가 아주 잘생겼던 모양이다. 그가 득도得道하자면 몇 번의 환생에도 수행자로 살아야하고, 수행자는 결혼을 할 수 없는 몸이므로 그는 한참을 고민하며 망설였다. 당장의 공양이 더 중요하다 판단하여 그렇게 하겠노라 답했다. 여인은 7송이의 꽃을 모두 주며 '5개는 니꺼, 2개는 내껀데 나 대신 공양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어쩐지 중고나라가 생각나는 일화다.
-불교신문, 2006년 8월

수행자는 진흙길에서 만난 등광불에게 1송이에 1비트코인을 호가하는 꽃을 바치며 나도 당신처럼 부처가 되고 싶으니 지혜를 내려달라는 부탁을 했고 등광불은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답했다. 수행자는 빡쳐서 그랬는지 진심으로 그랬는지 진흙탕에 등광불의 발이 더럽혀지면 안된다며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바닥에 철푸덕 엎드려 외쳤다. '등광불이시여, 저를 밟고 지나가소서' 크게 기뻐한 등광불은 무수겁(1겁=우주가 한 번 생겼다가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의 시간이 지난 후 넌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을 던졌다. 박사논문을 통과하기 직전의 대학원생이 생각나는 일화다.
-불교신문, 2004년 7월, 선재마을 게시판

석가모니가 현생에서 해탈하여 부처가 된 이후의 일이다. 큰 부자가 부처와 제자들을 초대하여 수천개의 등불을 밝히고 옷과 음식을 공양하고자 수일간 잔치를 열었다. 구걸로 연명하던 가난한 여인이 이 소식을 듣고 '살면서 부처를 부처를 만나는, 아주 귀한 인연이 왔다. 돈 많은 자는 돈으로 공양하는데 가난한 자는 무엇으로 공양한단 말인가' 고민하며 더 열심히 구걸하여 푼돈을 만들었다. 그녀의 머리칼을 잘라 판 돈까지 얹었다. 끼니조차 잇기 힘든 형편의 그녀가 기름집에 달려가 전재산을 내 놓으며 등불을 밝힐 기름을 사겠다고 하자 기름집 주인은 이를 갸륵하게 여겨 기름을 곱배기로 주었다. 여인은 얼른 법회가 열리는 곳으로 달려가 구석에 초라한 등불을 놓으며 빌었다. '만약, 내가 후세에 도를 얻게 된다면 이 불이 꺼지지 않게 해 주옵소서'. 다음날 새벽, 제자들이 등불을 끄러 나왔다가 아무리 꺼도 꺼지지 않는 등불이 있어 부처에게 알렸다. 부처는 그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불을 밝힌자는 반드시 성불成佛할 것이며 그 이름을 수미등광여래라고 하리라. 여기서 빈자일등貧者一燈 또는 빈녀일등貧女一燈이라는 4자성어가 나왔다. '이것도 못 하냐'면서 괜히 직접 불끄러 나섰다가 불 못 꺼서 부끄러운 상황을 연출하지 않는, 부처님의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황불사 게시판: 등불을 켜는 바른 마음, 봉인사 게시판: 연등을 다는 이유, 고양신문, 2015년 5월

꽃을 산 사람은 불상 아래에 꽂고 부처님을 한 바퀴 돈다. 그리고 물이 담긴 바가지를 받아 아기부처의 머리에 물을 끼얹는다. 옆에서는 누군가가 마이크를 쥐고 염불하듯 '석가모니불'을 반복하여 낭랑하게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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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부처를 목욕시키고 나오니 색종이 꽃잎을 풀칠하여 플라스틱 꽃대에 붙인 연꽃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풀과 색종이를 보고 그냥 지나칠 아이가 아니다. 어쩔수 없이 거기 달라붙어서 같이 연꽃을 만들었다. 집사람은 이왕 이렇게 있을꺼면 본인이 줄 서서 절밥 한 그릇 얻어 오겠단다. 10여분을 아이와 낑낑거려 연꽃을 하나 만들고 시주함에 2천원을 넣었다. 때마침 집사람이 받아온 절밥 두 그릇과 떡 두 덩어리로 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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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짜리 아이스티도 있길래 시주함에 넣고 한 잔 받아 나왔다. 줄이 길어 또 한참을 기다렸다. 여기까지 하고, 절 옆의 운암지 연못을 한바퀴 걸었다. 아이가 잠투정을 시작한다. 원래 목표였던 코스트코나 NC아울렛은 물건너갔다. 하늘이 맑아 좋은 휴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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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하면서 찾아본 사이트들
*경주 신사神社의 역사: 오마이뉴스 블로거 태허
*경주 조동종 사찰 양식 스트리트뷰: 링크
*군산의 일본식 사찰들: 오마이뉴스 조종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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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발전해서 고장을 핑계로 인간을 모욕하고 있는지도....
저는 알파고 성능 정도의 인공지능이 주식투자를 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참 궁금합니다.

이세돌과 했던 경기를 하며 '일반적이지 않고 예상하기 힘든 수'를 자꾸 놓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주식투자도 기존의 규칙이나 패턴이 모두 무너지는 난장판이 되지 않을까요.

김천 직지사, 경주 불국사, 합천 해인사, 팔공산 동화사 등 굵직한 사찰의 떠올렸다가

뭔가 쓰셨다 지우고 호응을 고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덩어리 째로 옮기면서 문장을 조금씩 손보다가 마무리를 못했던 것 같네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짱짱맨 호출에 출동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불당안에서도 빔프로젝트를 쓰는군요.
특별할 것도 없는 당연한 이야기인데 신기하네요.

그렇죠, 당연한 변화인데.. 저도 처음에 보고 읭? 하게 되더라고요. 아마 제가 찾아갔던 절이 말사末寺이고 본사本寺가 따로 있어 본사의 큰스님이 설법하는 것을 중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즐거운 금요일 되세요!

한송이=1비트라니 꽃을 들고 지나가던 여인이 미래를 볼 줄 알았네요ㅎㅎ
부처님 오신날 풍경 잘 봤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날씨가 맑아서 절간 마당에서 올려다 본 연등이 예쁘더라고요. 즐거운 한 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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