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이라는 단어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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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역은 한남, 한남역입니다. 저릿하면 한남입니다. 이전 역으로 돌아가서 죄를 고백하십시오.)
[이미지: Kaitak89, 2008-05-31, 위키미디어 공용.]

1. 한남은 미러링인가?

한때 미러링을 운운했던 정의로운 영혼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오늘날 「한남」이라는 단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것은 모두 미러링인가? 아직도 미러링인가? 물론 아직도 미러링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바보거나 뻔뻔하거나. 하여간 정의로운 영혼을 가진 그대들은 분명 미러링이라는 전제, 미러링이라는 한계 안에서만 이 단어를 긍정한다고, 용납한다고 했다. 그런데 미러링이 아닌 진지한 외양의 페미니즘적 주장에도 「한남」이 등장한다. 직접적인 단어가 등장하지 않더라도, 이제 한남은 세계를 구획하고 일반화하는 범주가 되고, 공공연한 비판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비평과 분석의 프레임이 되었다. 진지한 얼굴로 한남의 빻음에 분노하고 조롱하는 목소리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카페에서 여자들끼리 한남이 이러느니 한남이 저래서 문제느니 떠들 때에도 미러링을 하고 있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애초에 이제 누가 미러링을 하는가? 미러링은 한 성별 전체를 함부로 일반화하고 비하하는 것에 대한 저항을 내세웠다. 그런데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반대편의 성별을 일반화하며 비하하고 있다. 게다가 흉내도 아니다. 정말로 세상을 그렇게 보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 세상을 성별로 보는 건 참으로 짜릿하고 달콤하구나! 그리하여 이렇게 묻게 된다. 초기에 이런 작태를 미러링이라고 옹호했던 사람들, 미러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이 단어가 일상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고 총체적인 인식과 감정을 구성하게 된 것에 대해 해명해야 하지 않는가? 책임져야 하지 않는가? 한남혐오를 통해 작동하는 페미니즘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미러링은 거울을 깨고 나와 세계 속에 진짜 혐오를 생산해내야만 완전해지는가?…

2. 한남은 저항의 언어인가?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은 남성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약을 판다. 그러나 한남이라는 단어야말로 페미니즘이 남녀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남성이 아닌) 남성중심적(성차별적) 문화에 의해 각자의 방식으로 차별당하고 고통을 받는 남성과 여성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일방적 권력자이고 실제적 가해자이자 잠재적 범죄자인 남성에 대한 저항이다. ― 한남이 저항의 언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는 「페미니즘이 저항하는 것은 남성 개개인이 아니라 남성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인 문화다. 남성도 그 문화의 희생자다.」라고 주장했었던 예전의 광고와도 충돌한다. 이 광고 문구에 충실하자면, 각자의 방식으로 고통받는 약자끼리 연대하기는커녕 오히려 편을 가르고 조롱하는 것이 어떻게 저항이 될 수 있는가? 실제로 한남이라는 단어로 모욕받는 개별 남성들이 정말로 일방적 권력자고 실제적 가해자이며 잠재적 범죄자인가? 그렇다면 가장 먼저 집에 있는 아빠에게 그렇게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아, 맞다. 그렇게 하고 계시지. 이 한남 애비충아! 하여간 남성중심적·성차별적 문화를 남성들과 힘을 합쳐 비판하는 것이 아닌, 모든 남성을 비하하고 개별 남성을 조롱하는 한남이라는 단어가 저항의 언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한다. 약자의 말이니 결코 혐오 행위가 될 수 없고, 여성 해방이라는 위대한 역사적 과정의 일부일 뿐이며, 따라서 그것이 아무리 거칠더라도 저항으로서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그러한 진보 일반의 주장은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가? 홍대 누드 모델 몰카 사건에서 실제 범죄가 미러링되었고, 숱한 2차 가해가 미러링되었으며, 범인을 빠르게(?) 검거한 것에 대해 「지금까지 여성 대상의 범죄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안 했냐?」는 반응이 나오고, 마침내는 대규모로 시위를 벌이며 피해 남성이야말로 공연음란죄를 범했다고 조롱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약자의 행동이고 필연적인 역사적 진통이며 저항이고 미러링이니 용납하여라. 이 정도면 살인을 저질러도 정당화하지 못할 것은 없으리라. 이는 숱하게 저질러졌던 여성 대상 살인에 대한 미러링이고, 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남성들에게 「여성들의 죽음은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묻혀왔다」고 항의할 기회이며, 무엇보다 죽은 남성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필연적인 역사적 진통이고 약자의 저항이며 미러링이다.

사실 이 세상에 미러링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미러링 논리의 괴물성은 그것이 모든 행위에 적용될 수 있고 또한 모든 논리를 무화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진지한 얼굴로 한남을 운운하다가도 누군가 항의하면 그건 미러링이라고, 약자의 언어라고 빠져나간다. 「지금까지의 여혐에 대해서도 그렇게 항의하셨겠죠?」라고 비아냥거리면서. 그 이후에는 또다시 진지한 얼굴로 한남을 운운하고 모든 것을 반복하면 되는 것이다. 미러링은 모든 공식적이고 유의미한 담론을 무화시키는 심연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저항의 방식이라고 찬양하며 심연을 열어젖혔다. 그런데 그 무서운 지경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책임지려 하는 페미니스트가 있었던가? 미러링 논리는 계속해서 유효할 것이다. 미러링이 유효하다는 것은 곧 남성의 지배와 여성혐오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요, 그러므로 그 모든 책임은 바뀌지 않는 한남에게 있다. 이렇게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폭력을 그저 지배 권력의 거울쌍일 뿐인 것으로, 거울에 비친 원본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원본과 거울뿐이다. 그렇게 그들은 주체와 행위의 윤리적 실재성마저 무화시킨다. 피해자들의 실재성마저 무화시킨다. 이것이 저항인가? 약자도 있고 저항도 있는데 인간은 없다. 그런데 인간이 없다면 약자는 무엇이고 저항은 또 무엇인가?

3. 한남은 성차별적인가?

앞서 보았듯, 미러링은 성별 집단 전체에 대한 일반화 및 비하에 항의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제 누구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한남을 운운하는 오늘날의 페미니스트들에게 3년 전의 대의명분을 보여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여성혐오는 존재하지만 남성혐오는 존재할 수 없다느니 저항의 언어느니 하는 편협한 관점들과 말장난들이 미러링을 진짜 혐오로 이끌었고 또한 정당화했다. 「한남은 성차별적인가?」라는 질문은 성차별에 대한 두 가지 대립되는 정의로 이어진다. a.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별 전체를 함부로 일반화하고 그에 따라 개개인을 재단하는 것은 무엇이든 성차별이다. 성차별적 문화는 남성과 여성 모두를 각자의 방식으로 억압하며 그러므로 남녀는 연대해서 성차별적 문화에 반대하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b. 성차별이란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것이지 여성이 남성에게 가하는 것일 수는 없다. 남성중심적 사회, 여성혐오의 사회에서 차별이란 구조적·근본적 약자인 여성에게 가해지는 것을 의미하지, 강자인 남성에게 가해질 수는 없다. 참으로 고약한 것은, 페미니스트들이 양립 불가능한 두 주장을 상황에 따라 멋대로 취사선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은 남성들에게도 좋다고 a로 광고하다가도, 자신들의 폭력에 대해서는 b를 내세워 정당화하는 식이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멍청하거나, 페미니즘'들'이면 뭐든지 좋다는 뻔뻔한 자매애거나. a라고 믿은 한남들만 불쌍한 거지. 그런데 적어도, 한남을 미러링이라고 옹호한 이들은 a를 내세웠었다. 한남이 더 이상 미러링이 아니게 된 지금, 그들은 뭐라고 말할까?

4. 한남은 진보적인가?

사회주의자가 부유한 사람에게 죄책감을 강요한다면, 생태주의자가 지구의 질병인 인간충에게 죄책감을 강요한다면, 그들을 제대로 된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하는 두 부류가 있다. 도덕적 죄책감의 강요와 끊임없는 자기 검열, 도덕적 울타리 치기와 그 모든 것을 주재하는 사목권력의 행사를 진보라고 믿는 현대의 사제들. 목적(맥락!)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는 싸구려 마키아벨리주의자들. 전자면 (그들이 좋아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시대에 맞지 않게 두뇌가 빻은 거다. 이들은 진보와 도덕주의를 혼동하고 있다. 이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의식이 희박한 한국의 문제기도 하고, 진정한 구조적 문제를 회피하면서 문화 검열 및 문제의 개인화로 권력의지를 충족하는 전세계 진보의 문제기도 하다. 한국 페미니스트들 거의 전부가 원한 감정과 비뚤어진 권력의지의 결합물인 도덕적 변태에 속한다. 후자면 주인으로서 목적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목적의 노예가 된 것뿐이니 진보 이전에 인간 취급을 해줄 필요가 없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역사를 사랑한다. 여성 해방이라는 역사적 대의를 위해서는 한남들 따위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다는 무리다. 그런데 대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거리낌 없이 희생시켜온 역사야말로 근래의 진보가 소리 높여 비판하던 것이 아니었나? 대의에 의해 목소리를 빼앗긴 모든 이들과 연대하자는 게 페미니즘이 아니었나? 기이하게도 도덕적 변태들은 많은 경우 싸구려 마키아벨리스트기도 하다. 도덕적 변태들이 비도덕적 폭력을 거리낌 없이 행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다.

5. 한남은 페미니즘의 문제인가?

한남이라는 단어, 한남혐오의 범람에 대해 '암묵적 동조자' 따위의 표현으로 페미니스트들을 비판하는 것은 망설여진다. 암묵적 동조자라는 개념에는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암묵적 동조자를 운운하는 이들은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는 단테의 말을 휘두르면서, 어떤 문제에 대해 뚜렷한 찬반 의사를 밝히지 않고 침묵하는 것만으로도 지배 권력의 편을 들어주는 것,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단테는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편협한 흑백 이분법이 있지도 않은 지옥조차 새로 만들어내는 것은 흔한 일이다. 애초에 인간은 모든 사안에 대해 일일이 관심을 쏟을 수가 없다. 내가 무언가를 위해 행동할 때, 동시에 나는 무언가를 외면하고 침묵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인간의 필연적인 존재 조건이다. 모든 운동은 자신의 필요성을 열심히 설득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이러한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남성이 적극적으로 여성혐오를 의식하고 비판하지 않았더라도, 함부로 그를 여성혐오자라거나 암묵적 동조자, 구조적 가해자 따위로 부르는 것은 실례고 바보짓이다. 물론 페미니즘이 실제로 그런 논리로 남성들을 공격하며 한남이라는 모욕을 정당화해왔다는 사실은 넘어가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암묵적 동조자 프레임의 위험성이니.

그러나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자신이 능동적·의식적·이념적으로 선택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스트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들 스스로가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페미니즘을 통해 세계를 바꾸기를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해당 이념적 문제에 대해 책임질 의무가 생긴다. 그들 스스로가 그 의무를 선택한 것이다. 그들의 윤리적 정당성과 가치 역시 그 의무에서 유래하는 것이니 불평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그들은 한남이라는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논쟁해야 한다. 또한 한남이라는 단어, 한남이라는 프레임이 자신들의 신념과 다르다면 비판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들이 믿는 올바른 페미니즘으로 향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페미니스트를 찾아보기 어렵다면, 여기서 한국 페미니스트들은 일반적으로 한남 프레임의 지지자거나 혹은 전술적·자매애적 이유로 묵인하고 은근히 감싸는 암묵적 동조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연 부당할까?

사실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수준을 뛰어넘었다. 메갈리아와 워마드도 페미니즘이라고, 누구도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규정할 수 없다고,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안 하겠다고 미러링하고 한남 한남거리던 게 페미니스트들이니까. 이 모든 걸 저항의 언어고 페미니즘이라고 의미 부여하고 정당화한 게 페미니스트들이니까. 한남은 일방적 권력자이자 실제적 가해자이고 잠재적 범죄자이며 그들과 투쟁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정의한 건 페미니스트들이니까. 트페미에서 대학 교수까지 한 목소리였으니까. 페미니즘은 한남이라는 단어와 프레임을 선택했다. 그것을 지지하건 비판하건, 앞으로의 논의는 이 사실 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최근 페미니즘 담론은 여성 대상의 범죄들을 부각하면서 이루어진다. 이 담론들은 다음과 같은 축을 형성해왔다. (실제적이자 잠재적) 가해자로서의 한남 - 한남 모두가 공유하는 강간 문화 - 강간 문화를 함축하는 각종 언행 및 문화적 아이템들에 대한 공격과 검열의 시도. 날 때부터 예비된 강간범이자 실질적 강간 동조자인 한남은, 강간 문화 자체인 남성 문화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강간 동조자였던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며 아직 계몽되지 못한 가련한 수컷들을 꼼꼼히 찾아내 비난하고 끊임없이 채찍으로 자기 몸을 내려침으로써만 한남의 딱지를 떼는 것을 허락받는다. 인권 의식이 넘쳐나는 국내 진보 담론이 어째서 한남 범죄자화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심지어 앞장설 수 있는 것일까? 상식적인 논리, 즉 어떤 문화 자체를 범죄적이라고 낙인찍고 그로부터 모든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는 프레임 자체에 대한 비판이 망각된다. 분노와 공포에 의해서. 획일적인 강자와 약자 이분법에 의해서. 한남 대 피해자 여성이라는 페미니즘적 이분법에 의해서. 여성 해방이라는 역사적 대의에 의해서.

강간 문화론에 대해 다른 해석이 제기될 때마다, 즉 문제를 젠더 이분법적 관점으로 볼 필요가 없다거나 혹은 남성들이 공유하는 호색적 문화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다는 비판이 제기될 때마다, 페미니스트들은 어떻게 반응하던가? 그런 주장은 피해자 여성에 대한 공감 능력이 결핍된 것이자 여성이 억압받는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부정이며 성차별을 유지하려는 책동이다. 편협하다 못해 사기에 불과한 도식이지만, 여성 대상의 강력 범죄들을 계속해서 내세우고 맹목적 감정을 고조하면서 다른 해석들을 단죄하고 있다. 수많은 다른 페미니즘'들'이 가능하다는 일반적 주장조차 소용이 없다. 하기야 그 도식 역시 페미니즘의 다른 도구들과 마찬가지로 사기다. 즉 그 도식은, 메갈리아와 워마드는 페미니즘들에 속할 수 있지만 한남은 페미니즘에 대해서 감히 왈가왈부(맨스플레인!)할 수 없다는 식으로 작동한다. 한남에 대한 투쟁이라는 '하나'의 페미니즘 안에서만 페미니즘'들'이기 때문이다.

한남-강간 문화 프레임에 대한 비판을 곧 여성이 겪는 고통의 부정 및 남성 이데올로기의 정당화로 몰아붙이는 기가 막힌 흑백논리. 이는 논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내 편 들어주고 무조건 공감하라」는 징징거림이고 협박이다. 실제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지껄이는 소리기도 하다. 어쩌다 이런 유치한 짓거리가 공적 담론의 논리로 통용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을까? 하기야 역사나 진보 따위의 주문을 외우고 나면 「네 다리는 옳고 두 다리는 그르다」고 엄숙하게 선언할 수 있는 것이 세상사다. 이런 비판에 대해 똑똑한 페미니스트들은 다음과 같이 항의할런지도 모른다. 「<논리 없이 감정적으로 굴며 무조건적인 공감과 편들어주기를 요구한다>는 여성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아아, 모든 것을 성기로 볼 힘이 있다면 그 전에 징징거림 자체의 정당성에 대해 고찰하고 비판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고도 정당할 텐데. 이성과 논리에 대해 근본적인 거부감(무능력?)을 가지고 있는, 혹은 그 남근성을 거부한다고 말하는 그대들의 수준에 맞춰 말해주자면, 그 편들어주기의 요구가 가지는 폭력성, 그로 인해 생기는 또다른 희생자(소수성!)를 생각해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차라리 「논리와 팩트가 뭐가 중요하냐? 세상에 있는 것은 강자와 약자의 대립뿐이다. 따라서 약자를 위로하며 힘을 실어주는 것은 뭐든지 옳고, 약자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뭐든지 잘못이다.」라고 대놓고 뻔뻔하게 선언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한심하긴 해도 정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진보의 문제는 이분법적이고 단세포적인 약자주의와, 그를 온갖 화려한 개념적 치장 밑에 숨기는 지적 부정직의 결합에 있다. 얼마나 많은 정력이 그 알맹이 없는 기만에 놀아났던가?

남성 중심 문화에서 고통받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도를, 남성의 지배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이라는 구도로 교묘하게 혹은 멍청하게 단순화하고 왜곡했다는 것. 이것이 한남혐오 페미니즘의 토대다. 페미니즘이 남성 중심 문화로 인해 남성이 지게 되는 과중한 의무 및 희생 등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오히려 조롱하는 모습(뷔페미니즘)은 이런 전제에서는 필연적이다. 이런 구도에서는 남성은 결코 성차별의 피해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페미니즘(여성주의!) 운동의 대상이 될 이유는 없다. 그렇게 억울하면 국가에게 호소하던지. 물론 여기서도 「페미니즘은 남성들에게도 좋다」는 애초의 광고를 해명해주는 사람은 없다. 남성은 일방적 권력자이고 실제적 가해자이자 잠재적 범죄자다. 남성은 피해자도 혐오의 대상도 될 수 없다. 페미니즘은 이런 남성에 대한 저항이다. 이 저항은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다. 이에 반대하는 모든 이는 남성 이데올로기의 동조자고 역사의 반동이다. 한남이라는 두 글자가 이 페미니즘을 요약한다. 이 모든 특징들은 지금까지의 페미니즘 광고들과 정반대에 서 있다.

6. 한남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나?

바보 아닌가? 자기를 모욕하는 이념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믿다니. 아, 물론 성적 기호는 존중한다. 사도마조히즘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한남들을 '대표'해서 자기 몸에 채찍질을 하고 죄 많은 다른 한남들을 일갈하던 그런 한남들 많잖아. 여성에 대한 일반화는 아무리 조그맣더라도 죄악이지만 한남 운운은 아무리 거칠더라도 팩트다. 왜냐하면 내가 한남이라서 알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 나간 풍경을 숭고하게 포장하고 진보라며 강요해온 것이 페미니즘이었다. 채찍들과 기사들의 중세 페미니즘.

하지만 페미니스트들부터가 기만적인 광고 뒤에서는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지 않던가? 남성이 페미니즘에 대해 왈가왈부할 때마다 맨스플레인이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 되지 않던가? 남성들에게 굳이 페미니즘을 광고하고 설득하는 이는 이런 주장들도 동등하게 소개해야 마땅하다. 당연히 그에 대한 자기 입장도 명확히 밝혀야 하고. 그게 정당한 광고, 공정한 계약 아니야? 그러나 일단 써먹을 수 있는 머릿수부터 늘리고, 감춰두었던 문제가 터지면 뒤통수를 갈기는 혐오스런 짓거리로 일관해온 것이 또한 페미니스트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자매애만 있을 뿐 인간애는 없다. 그들은 스스로를 인간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든다(이 얼마나 페미니스트들이 좋아할 문구인가!). 그래서 성기에 대한 차별에 반대한다는 대의명분은, 성기에 의존하지 않고는 어떤 말도 생각도 하지 못하는 성기의 카스트제, '저항적' 성품제로 바뀐다. 입장 자격을 제한하는 모든 '그들만의 리그(정체성 운동)'의 운명이다. 본질적인 것은 강자냐 약자냐가 아니다. 나와바리에 의존하느냐 아니냐다. 정체성 운동이란 나와바리에의 정체성이다. 한남이 정체성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에 가담하려는 것은 현실적으로든 이념적으로든 희극이다.

7. 한남은 뭘 해야 하나?

페미니즘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날 것. 페미니즘은 원래 옳은 것이고 약자들의 저항인데, 저항을 하다보니 메갈이나 워마드 같은 과격 분자들이 생겼을 뿐이고, 그러므로 최대한 이해하고 편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것. 어떤 페미니스트도 일방적 가해자인 남성에 대한 저항이라는 편협한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허울 좋은 명분으로 오류를 정당화하고 폭력을 찬양하는 도덕적·인간적 파탄에서는 더더욱 자유롭지 못하다. 한남이라는 단어는 일상에서 공식 담론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며 한껏 정당화되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 페미니즘은 틀릴 수 없는 인권 운동이 아니고, 성평등 운동과 동의어도 아니다. 그것은 타당할 수도 있고 부당할 수도 있는 하나의 이즘일 뿐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페미니스트들은 어째서 은근슬쩍 감추고 이즘이 아닌 것처럼 행세하는 걸까? 머릿수를 불리기 위한 과장·허위 광고. 페미니스트들이 하는 짓은 늘 이런 식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퀄리즘이니 안티페미니즘이니 하는 허섭스러운 담론에 현혹되지 말 것. 잠시만 둘러봐도 그 수준이 페미니스트들에 비해 나을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이들은 가부장제가 무너진 시대의 보수주의자일 뿐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불만을 대변해줄 목소리가 이들밖에 없다며 의존하는 것은, 여성들의 불만을 대변해줄 목소리가 메갈리아밖에 없었다며 항변하는 한심한 작자들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우선 사실 관계에서 잘못되었고(정희진의 저 유명한 <"메갈리아는 일베에 조직적으로 대응한 유일한 당사자">처럼),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범죄다.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곳이 그곳밖에 없다고 해서 그 저열함에 침묵하고 동조하면, 이윽고 자기 역시 똑같이 저열해진다. 미러링의 귀중한 교훈이 아니던가? 처음에는 누구나 미러링을 적정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직 전술적으로 혐오 표현을 사용할 뿐 결코 혐오 자체를 받아들이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는 넘쳐나는 한남이다. 또한 자신의 뚜렷한 비전과 세계관 없이 누군가에 대한 반감으로만 뭉친 집단은 오래갈 수도 건강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퀄리즘이니 안티페미니즘이니 하는 소굴에서는 똑같은 혐오의 악취가 흐른다.

심지어 또다른 형태의 여성혐오로 빠질 위험성도 있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한남혐오 페미니즘에 동조하거나 적어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여성의 문제로, 여성혐오로 돌리는 것을 주의하자. 여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수준이 별로 높지 않은 거다. 평범한 남성이 다른 남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여성혐오적 고정관념을 의식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어떤 인간이든, 누군가가 자기 편을 들어준다고 여기면 쉽게 넘어가는 법이다. 그 속에서 여성은 머리 긴 남성일 뿐이고 남성은 머리 짧은 여성일 뿐이다(※ 여성은 머리를 기르고 남성은 머리를 짧게 잘라야 한다는 코르셋을 재생산할 의도는 없습니다).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도 안티페미니스트가 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되는 것이고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에 페미니즘의 약점이 있기도 하다. 분명 페미니즘의 열기는 뜨겁지만, 그 상당수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성차별이 없는 세상, 인간으로 대우받는 세상을 원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 막연한 갈망이 한남이라는 구체적이고 자극적인 프레임, 공포 마케팅에 포획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 개인, 보편성을 지극히 정직하게 관철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완벽하지는 않아도, 한남혐오 페미니즘에 대한 가장 모범적인 반격이다. 약자의 저항이라고 무조건 용납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약자를 잘못된 길로 호도하며 이용하는 자극적 프레임과 논리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용감하고 약자를 위하는 일이다. 필요한 것은 역사가 아니라 인간이니까.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진실이니까. 사실 페미니즘이야말로 한남을 절실히 요구한다. 그것은 강박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고 갈라놓지 않으면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을 성기로만 본다. 사실 그들 대다수는 자기가 진짜로 뭘 원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반대로 인간이기를 원하고 인간이기를 요구하자. 페미니즘식 향신료를 뿌려보자면, 누군가를 적대하고 나와바리를 설정함으로써만 작동하는 페미니즘은 얼마나 남성적인 동일성의 이데올로기인가? 인간, 개인, 보편성이야말로 끊임없이 자기를 넘어서는 모험이고 차이의 긍정이 아니던가? 오직 그 위에서만 페미니즘이라는 '도구'도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인간이라는 단어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 예를 들어, 인간이라는 단어야말로 도덕주의적 사제들의 숨겨왔던 꼰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페미니스트들의 문화 검열이 사제들의 검열로 이름만 바뀌는 시나리오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들은 지금까지 페미니스트들의 저항을 빙자한 채찍질에 동조해왔을 가능성도 높다. 「약자의 저항」이나 「성 상품화 퇴출」 정도의 포장이면 이들의 고매한 도덕적 양심은 페미니즘의 채찍질과 공존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개인주의적 상식의 불모지이자, 자신의 도덕이 곧 보편적 도덕이라 생각하는 저능아 모범생들의 천국인 꼰대민국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또한 한남들의 보수주의적인 사고방식도 지적해야 한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인간을 통한 해방이 아니라 이상적인 우파적 질서의 회복이다. 이는 젊은 남성들 사이에 널리 스며들어 있는 멘털리티로, 사회 현상에 대한 반응 전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퀄리즘과 안티페미니즘 담론이 위험한 것은, 이런 '사회 없는 개인-보수주의'라는 남성들의 멘털리티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특히 페미니즘이라는 구체적인 적과 맞서는 사이에 보수주의적 성향은 더 깊숙이 스며들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도 인간이라는 단어는 보수주의적인 기표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기표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정체성 운동인 한남혐오 페미니즘을 가장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대안이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고학력 미신에 대한 유일한 반박이기 때문이다. 그를 둘러싼 함정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냉장고 채소칸에 애호박 하나가 필요하다.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인간이라는 건 뭘까? 하고 코찡긋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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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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