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in #kr6 years ago

2015년, 작금의 시대정신은 ‘약육강식’인 듯하다. 2014년으로부터 물려받은 키워드 ‘갑질’은 여과 없이 계속되어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어린이집 보육교사의 폭력 행위며 성추행, 악질적인 뺑소니 사건 등 눈살 찌푸려지는 소식들이 SNS를 타고 대한민국 전역을 몰아치고 있다.

그런 세상 속에서도 나는 나대로 정말 바빴다. 엄살이 아니다. 학기가 끝나감에 학교 앞은 인적이 드물었지만 입영훈련 집체교육으로 계속 캠퍼스에 남아 있어야 했고, 집체교육이 끝남과 동시에 충북 괴산으로 입영훈련을 떠났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오자마자 인턴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2015년의 1월은 쉴 틈 없이 내게 몰아쳤다.

바쁜 일정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계획된 것이라 할지라도 정신 차리고 살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통근 시간이 거의 2시간 남짓, 이른 기상에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전철에 몸을 실었고 퇴근할 때면 ‘지옥철’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인파 속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적응될 무렵, 나는 몹시 지쳐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앉는 것은 고사하고 균형을 잡고 잘 서있을 자리만 찾아도 성공적인 귀가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날은 특히 사람이 많아서 그조차 어려웠다. 겨우 문 앞에 자리를 잡고 습관처럼 SNS를 켰는데, 역시나 불편한 사건사고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전철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다.

이상한 낌새에 차창 밖을 봤더니 전철은 한강을 건너고 있었고 나는 직감했다. “이 각박한 세상, 내 삶에도 기어이 사고가 터지는구나.” 동승한 승객들은 모두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기관사의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우리 열차, 지금 노을 지는 한강을 달리고 있습니다. 우리 열차, 조금 천천히 달릴 예정이오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잠시 아름다운 한강의 노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 열차, 조금 천천히 달릴 예정입니다.”

문득 무엇이 지나갔는지도 모른 채 달려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휴대폰을 넣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흐르는 강물이 노을의 붉은 빛을 머금어 반짝거리는 것이 기관사의 말대로 한강은 참 아름다웠다. 가로수의 가지가 새삼 앙상하게 느껴지는 것이 겨울의 풍경이란 이런 것인가 싶고, 옆으로는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펼쳐져, 전철 창문의 한 프레임 안에 나무와 강과 도시가 함께 펼쳐진 것이 참으로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버스를 갈아타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날 귀가는 평소와는 참 다르게 느껴졌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복을 많이 받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요즘 대한민국인데, 적어도 그 날 돌아오던 길에 느끼던 기분은 참 복스러웠던 것 같다. 어디로든 이동할 땐 지나치는 그 곳의 풍경에 집중하고, 누군가 같이 있을 땐 딴 생각하지 말고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고, 더울 땐 “아 덥다. 여자들 옷도 짧네, 신난다.”, 추울 땐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당기는 촉감을 느끼며 사는 것. 그 날 SNS상에 올라온 사건이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것처럼, 그 순간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일을 생각한다고 해서 딱히 더 좋아지는 일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그 전과 똑같은 일상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바쁘게 살아가고, 세상은 여전히 요지경이다. 하지만 그 날, 다람쥐 쳇바퀴 구르듯 반복되는 일상 속에도, 새로이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일상은 좀 더 나은 것이 되었다. 그러니까 지치더라도, 세상이 요지경이라도, 모두 부디 치열하게 살아있다는 걸 느끼는 삶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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