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3] 가볍고 순수한 기쁨을 향하여
가볍고 순수한 기쁨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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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 Bobin: La Folle Allure
<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1984Books, 2022, 1판 1쇄
헤르만 헤세가 나의 정신 언어라면, 크리스티앙 보뱅은 나의 감정 언어다. 함부로 닿을 수 없는 깊이로 시와 같은 산문을 풀어놓는 그의 글은 언제나 최고 수준의 가르침과 읽는 즐거움을 동시에 준다. 먼저 읽은 <환희의 인간>은 성스럽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했는데, 이번에 읽은 <가벼운 마음>은 사랑과 관련된 감정 스펙트럼을 너무도 투명하게 보여준다. 주인공의 첫사랑 늑대, 서커스단 로망, 단풍나무, 괴물, 그리고 요양원 할머니까지- 뤼시가 '가벼운 마음'을 획득해나가는 여정을 따라가며 그동안 자세히 들여다 보기 두려웠던 생각을 살펴보았다. '결혼은 감옥'이라는 흔하디 흔한 비유에 대해. 결혼을 결심한 열일곱의 뤼시에게 엄마가 해주는 말이 담긴 페이지는 현재 나의 상황과 맞아떨어지며 생생하게 살아움직였다. 파리의 결혼 생활. 그리고 그녀는 글을 쓰는 남편과 점점 멀어졌고, 관계가 전부 가짜라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사랑받기 위한 비법은 관계가 시작될 때에 있다.
무엇보다 사랑받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도, 갈구하지도, 원하지도 말아야 한다. (p. 27)
불행은 당신과 상대방의 음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이탈할 때 찾아온다.
우리가 겪는 가장 심각한 분열은 다른 어디도 아닌 리듬에서 나온다. (p. 43)
그냥 목소리에 다정함이 사라지고 무성의한 익숙함만 남았던 거지.
말하자면 사소한 거였어. 하지만 사랑은 다른 어디에도 아닌 사소한 것들에 깃들어 있거든. (p. 86)
사실 내 남편은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어.
하지만 아주 단순한 이유였단다. 결혼할 때 내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었어.
그런데 즐거움이 떠나 버린 거야. 그래서 이혼한 거지. (p. 87)
부부 생활은 바닥이 없고 거대하다.
어느 측면에서는 황폐해질 수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조용히 지속해 나갈 수 있다. (p. 116)
그녀는 자신의 질문들에 바람을 쐬어 주고 그 질문들을 응시하기 위한 시도를 이어나갔다. 몇 번의 순간적인 외도 후에 '괴물'이라고 부르는 다른 사랑을 만났고, 그날 곧바로 로망에게 모든 것을 말했다. 이슬비를 맞으며 걷고, 포장도로 위에 울리는 구두 굽 소리에 기뻐하고, 책에서 문장 하나를 뽑아내어 잠시 마음에 담고, 창밖을 바라보며 과일을 먹는 것. 그것 역시 속이는 거라고. 상대방과는 전혀 상관 없는 순수한 기쁨을 밖에서 얻기 때문이라고. 뤼시의 고백을 듣고 울다가 웃던 로망은 그후로 뤼시와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마음 먹는 데 3년이 걸렸다. 몇 사람을 타들어가게 만든 3년이었다. 그동안 로망은 문체가 바뀌고 출판도 하게 됐다. 끊임 없이 자신의 '수호천사'의 목소리를 따라가던 뤼시는 결국 남편도, 괴물도 아닌,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상태로 나아간다.
내게는 더 이상 아버지든 어머니든 남편이든 필요하지 않다. 그런 건 너무나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내게 필요한 건 단지 목덜미로, 피부와 블라우스 사이로 스미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는 것이며, 내 눈을 전나무의 짙디짙은 초록색으로 물들이는 것뿐이다. 나는 조금 전 풀밭 위에서 얼핏 보았던 종달새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종달새는 깃털과 노래의 떨림 속에서 온전한 자신이 될 권리를 누비며 땅에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p. 114)

사랑을 하면서 가장 난감한 상황은, 상대가 더 이상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릴 때일 것이다. 처음에 홀로 조용히 느끼던 비참함은 마음에 퍼지고 곰팡이가 된다. 그런 상태로 시간을 오래 끄는가 하면, 관계를 폭발시켜 소멸하는 단계로 건너가는 이도 있다. 모든 형태의 사랑이 '서로 다른 마음'으로 끝날 가능성을 염두해둔 채 흘러간다. 인정하기는 싫어도, 이것이 대부분의 사랑에서 보이는 보편적인 양상이다.
예전에 단호하고도 가볍게 떠난 이를 미워하고 원망한 적이 있었다. 화와 억울함, 슬픔이 뒤섞여 오랫동안 곯았는데, 나중에 나에게서 그와 비슷한 종류의 단호함과 가벼움을 발견했다. 스스로 정한 기준에 따른 객관적인 판단. 상대방이 틀리거나 잘못한 게 아니라, 나의 방향과 맞지 않아서 경로를 바꿀 수밖에 없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관계뿐만 아니라 많은 일에서 단호함과 가벼움은 함께 움직인다는 걸. 가볍기 위해서는 자기 기준에서든, 태도에서든 단호해져야 한다. 그렇게 단호한 사람만이 가벼움을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로망이 되어 가슴이 미어지기도 하고, 뤼시가 되어 후련해지기도 했다. 현실에서 타인은 타인일 뿐이다. 삶을 뚫고 나가는 일은 나의 몫이다.
두 가지 방향을 모두 겪은 사람이 되어 지금의 사랑이 조금이라도 오래 가도록 간절히 염원하는 게 웃기기도 하다. 유일한 방법은 감정이 고여서 썩게 하지 않는 거다. 그렇다고 다자간의 사랑을 해결책으로 먼저 들이미는 것도 멍청한 짓이다. 감당도 못할 것들은 함부로 출구가 될 수 없다. 상대의 존엄을 해치지 않으며, 인류애를 상실하지 않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할 수 있는한 가볍고 즐겁게 각자의 세계에 충분히 담겨 있다가 다시 서로를 향하여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 자신의 의지로 그 경계를 오가며 영원히 적당한 그리움의 상태에 머물도록 스스로 조절하는 것. 과연 가능할까. 이런 몸짓으로 우리가 영원을 조금 더 오래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한 바위에서 다른 바위로 폴짝 뛰어 깊은 강을 건너듯
한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 가겠다고 결심한다.
물이 튀고 몸은 서늘해져도, 결코 빠져 죽지 않는다. (p. 47)
연인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가면서 그의 친한 친구가 7년 연애 끝에 헤어진 이야기를 꺼냈다. 또 다른 친구도 7년 결혼 끝에 이혼을. 우리 둘 다 한번도 다른 누군가를 7년까지 만난 적이 없다. 그래서 그 감정의 양상을 짐작할 수가 없다. 도달하지 않은 미래. 우리는 무언의 유효 기간에 두려워하다가,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기로 했다. 서로가 너무 어릴 때 만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다시 한번 감사해했다. 장거리 연애의 위기도 분명 있었지만, 우리는 둘 다 독립적인 세계 안에 사랑의 유효 기간을 연장할 묘책이 있다는 걸 안다. 아이들이 놀이를 할 때 느끼는 가볍고 순수한 기쁨을 삶에서 놓아버리지 말자. 인생의 소용돌이 속을 실험하러 밧줄을 붙잡고 길을 나선다.
나는 글을 쓸 때 잉크로 쓰지 않는다. 가벼움으로 쓴다. 설명을 잘했는지 모르겠다. 잉크는 구매할 수 있으나 가벼움을 파는 상점은 없다. 가벼움이 오거나 안 오는 건 때에 따라 다르다. 설령 오지 않을 때라도, 가벼움은 그곳에 있다. 이해가 가는가?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여름비의 도도한 서늘함에, 침대맡에 팽개쳐둔 펼쳐진 책의 날개들에, 일할 때 들려오는 수도원 종소리에, 활기찬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음에, 풀잎을 씹듯 수천 번 중얼거린 이름에, 쥐라산맥의 구불구불한 도로에서 모퉁이를 돌아가는 빛의 요정 안에, 슈베르트의 소나타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가난 속에, 저녁마다 덧창을 느릿느릿 닫는 의식에, 청색, 연청색, 청자색을 입히는 섬세한 붓질에, 갓난아기의 눈꺼풀 위에, 기다리던 편지를 읽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이다 열어 보는 몽글몽글한 마음에, 땅바닥에서 '팡'하고 터지는 밤껍질 소리에, 꽁꽁 언 호수에서 미끄러지는 개의 서투른 걸음에. 이 정도로 해두겠다. 당신도 볼 수 있듯,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벼움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드물고 희박해서 찾기 힘들다면, 그 까닭은 어디에나 있는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기술이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p. 6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