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를 그리다) 길고 긴 산티아고 길에 점처럼 버려지다.

in #tripsteem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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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2017.6.24(39,340걸음)

조용하고 미스테리한 마을, 조용하고 미스테리한 알베르게에서 잘 자고 일찍 길을 나섰다.
이 마을, 이 알베르게에서 묵은 건 꼭 꿈만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발하려고 나왔는데 숙소에는 주인이든 종업원이든 아무도 없었다.
옌스는 콜라를 우리는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싶었지만 아무도 없어서 그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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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기다리면 주인이 나타나지 않을까하는 기대로 독일판 노홍철같은 옌스와 알베르게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으면서 늑장을 부렸는데, 끝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인 신혼부부는 언제나 조금밖에 걷지 않는데 오늘은 23킬로는 가야 첫마을이 나온다며 겁을 먹고 우리보다 일찍 길을 나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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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스와 함께 공립 알베르게 앞을 지나는데, 어제의 미국 할머니들도 짐을 챙겨 나서고 있었다.
정말로 두 사람만 그곳에서 잤단다.

메리 할머니는 우리를 만나자마자 며느리에게서 온 답장을 보여주었다.
우리와 함께 즐겁게 저녁 먹는 사진을 며느리에게 보내주면서 우리에게 부탁해 한글로 깜짝 문자를 보내놓은 터였다.
며느리도 한글로 답문을 보냈다. 모국어로 보내는 문자여서 편했는지 아주 긴 문자였다.

이렇게 우리는 다섯이서 숨은 마을 칼자딜라 데 로스 헤르마닐로스에서 출발해 오늘의 목적지인 만시나 데 라스 물라스로 떠났다.
왜 이렇게 마을 이름이 점점 어려워지는지 모르겠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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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게도 의미있는 날이다.
그동안 발에 생긴 물집 때문에 밴드를 붙이거나 붕대를 감고 다녔는데, 오늘은 모든 걸 다 떼고 걸을 만큼 상처가 거의 아물었다.
발가락이나 발꿈치에 잡혔던 물집에 새 살이 돋아 이제는 다시 굳은 살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픔이 거의 없었다.
붕대를 모두 떼고 나니 한결 발이 가벼워졌다.
이제 고통의 길은 끝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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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길에서는 걷는데 약간의 룰이 있다.
어제 저녁을 같이 먹고, 함께 술을 마시며 많은 대화를 하고, 같이 잠을 잤다고 해서 다음 날 걸을 때 꼭 나란히 걷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각자의 걷는 속도와 스타일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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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는 같이 속도를 맞추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쉬고, 함께 걸었다.
특별히 그러자고 한 것은 아니지만 서로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해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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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같은 일행이더라도 잘 걷는 사람이 먼저 카페나 레스토랑에 도착해 늦게 오는 일행을 기다렸다가 가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출발은 함께 하고, 그날의 목적지에서 만나는 경우도 있다.
일행이 아니고 산티아고 길에서 만난 친구인 경우는 걷다가 만나고 헤어지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어디서 밥을 먹을 건지 어디서 잘 건지도 서로 잘 묻지 않는다.
그냥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만나면 같이 차나 맥주를 마시고, 같은 알베르게에 묵게 되면 반갑게 인사하고 이야기하고 함께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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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스도 오늘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지만 우리 앞에서 잘 걷고 있다.
다리가 아파서 그간 조금씩밖에 안 걸었다고 했는데, 오늘은 첫 마을이 꽤 먼 거리에 있어서인지 부지런히 걷는 것 같다.
아름다운 스페인 아가씨를 찾아 떠나는 쾌활한 독일 청년의 모습으로 힘차게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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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와 아넷 할머니도 오늘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지만 우리보다 잘 못 걸으셔서 뒤에 쳐져 걷고 있다.
우리가 새벽 하늘을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하나 찍었는데, 그걸 전해줄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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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아침 하늘이 너무 예쁘다.
이렇게 새벽의 아름다운 하늘을 스페인 와서 자주 본다.
땅이 넓은 만큼 하늘도 넓어 보이는 건 착시일까?


아침 해가 뿅^^

게다가 새벽에 길을 나서면 언제나 이렇게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다.
좀 멀게 찍혀서 아쉽다...
며칠 전 베가에서 출발할 때 일출이 가장 예뻤는데, 아마도 몇번은 더 보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산티아고 길이 끝나기 전 꼭 해가 뿅!하고 떠오르는 멋진 동영상을 찍고 싶다.
아이폰에 있는 타임랩스 기능으로 찍으면 해가 힘차게 떠오르는 걸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쉬운 것은 베가에서 봤던 해의 크기보다 오늘 본 해의 크기가 좀 작아졌다는 것이다.
앞으로 점점 작게 보이면 멋진 동영상을 찍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해가 점점 작아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착시일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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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하고 어이없는 우리의 상황을 사진에 담아보려고 길에 주저앉아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은 아주 멋지게 나왔다.

다른 날도 그저 화살표만 보고 길 따라 하염없이 걸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정처없이 걷고 있다는 느낌이 더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전날도 그렇고 이날도 그렇고 가는 길 내내 집도 거의 없고, 중간에 카페나 레스토랑도 없고, 그런데 길은 넓게 잘 나 있고, 이 길이 잘못된 길 같지 않은데 순례자들은 한사람도 볼 수 없고, 사람들이 말한대로 정말로 첫마을이 아무리 걸어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전날 다음 마을까지 더 가겠다는 우리를 잡아준 최다환, 함지혜 커플에게 감사했다.
그들이 전날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으면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는 전날 해가 질 때까지 이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하염없이 늘어선 나무들..

그래서 우리는 결심했다. 다음날 레옹에 가면 꼭 산티아고 책을 사야겠다고.
무조건 노란 화살표나 조개 표시만 보며 걸으면 산티아고에 갈 수 있다는 우리의 생각이 아주 짧았다.
그걸 산티아고 길을 반이나 걷고 깨달았으니 우리도 참 대책 없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책을 사서 겸손하게 정보 찾아보며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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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을 거치대로 쓰려고 내려놓은 가방을 보니 갑자기 훅 버리고 가고 싶어진다.
아니 이제는 최소화된 짐이라 별로 무겁지도 않은 가방이다.
그러니 산티아고까지 같이 가야지.
가자~ 가방!

전날까지만 해도 첫 마을이 23킬로를 걸어야 나온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 경험으로 보면 언제나 목이 말라 죽겠을 때, 배가 고파 죽겠을 때는 꼭 카페나 레스토랑이 나왔었다.
하지만 이날은 그 룰이 좀 빗나간 듯하다.
게다가 아침에 숙소에 주인이 없어서 우리는 커피 한잔도 빵 한조각도 못 먹고 길을 나섰다.

그래도 우리는 어느 정도 순례에 익숙해져 있었나 보다.
이렇게 상상불가의 상황에서도 마음은 조급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계속 이야기했다. 이 길로 가면 산티아고가 나오는 건 맞아?
아니 왜 이렇게 아무 것도 없는 또다른 루트를 만들어 놓은 거지?
어젯밤에 잔 알베르게 주인이 사람들이 자기 알베르게로 와서 자고 밥도 먹게 하려고 화살표를 바닥에 막 그려놨나?
우리처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 화살표를 따라 와서 돌아가지도 못하고 다음 마을로 가지도 못하면 자기가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백가지 경우의 수를 이야기하며 걷고 또 걸었다.
아무리 그래도 답도 안 나오고 카페도 안 나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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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길고 긴 산티아고 길에 점처럼 버려진 듯했다.

이 글은 2017년 6월 10일부터 7월 8일까지 산티아고 길을 걸었던 우리 부부의 찬란한 추억이 담긴 글입니다. 사진은 대부분 남편(@lager68)이 찍었습니다. 글은 제가 썼는데 많이 미숙한 글입니다. 그럼에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산티아고를 그리다) 길고 긴 산티아고 길에 점처럼 버려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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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계신 남편분 어디선가 본듯 했는데 프로필 사진 얼굴로 하신 lager68 이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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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희는 부부 스티미언이랍니다.^^

가방이 무겁게 느낄 정도로 힘드셨군요

가방은 제게 주어진 저의 짐이지만, 언제나 가장 버리고 싶은 짐이지기 하더라구요.
짊어지고 갈 것과 버리고 갈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는 여행길이었습니다.^^

일출 광경이 예술이네요^^
전 군생활 이후 이렇게 오래 걸어본 일이 없어서 ㅎㅎ

군인들이 완전 군장을 하고 행군을 하는 것과 비슷한 고통이라고들 하더라구요.
전, 군생활은 안해본 거라 비교는 못하지만요.ㅋㅋㅋ

아득한 지평선에서
저도 점이 되고 싶습니다.
좋은 포스팅 감사드려요.

살면서 저런 사진 꼭 한장 갖고 싶었는데, 산티아고 가서 아주 많이 찍었어요.
너무 멋지죠??^^

봐도 봐도 멋지십니다~^^

아무래도 이국적인 분위기라 더 그런 거 같아요.^^

우리부부는 같이 어디 가도 내가 한참 먼저가서 기다리는 스타일입니다. ㅎㅎ

원체 운동을 좋아하시니까 그런가 봐요.ㅋㅋ
그래도 함께 갔을 때는 속도 조절해서 같이 걸어보세요.
보폭을 맞춰 걷다 보면 많은 걸 느끼게 되더라구요.^^

모르는 곳에서 두분만이 걷는게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하십니다^^

지도 서비스도 안되는 지역이어서 많이 당황되더라구요...ㅜㅜ

와~ 정말 감동적인 일출~ 멋진 하늘이로군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일출이라 더 감동적이었습니다.ㅋ

지평선으로 보는 일출이라니.. 우리나라에선 참 보기 힘든..ㅎ
정말 좋으셨겠어요 ^^

저렇게 멋진 걸 처음엔 출발을 매일 늦게 해서 못 봤답니다.
긴 여행에 많은 걸 얻으려면 정보 수집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아침부터 숙소 주인과 종업원들은 어딜 간걸까요? ㅎㅎ 마실 놀러갔나요?

산티아고 길을 반이나 걷고 깨달았으니

그래도 고생(?)하기 전에 알았으니 다행이네요!!

저희도 끝까지 그들을 찾지 못했습니다.ㅜㅜ
미스테리한 일이었네요...

사실 고생을 할대로 한 상태지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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