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창업史] #18 정이 많은 조선인

in #stimcity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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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정이 많은 조선인





펍의 맞은 편은 횟집이다. 사장은 중국 흑룡강성 출신의 조선족이다. 듣기로, 거기서 5~6년째 횟집을 운영 중인데, 코로나 사태 이전에는 중국인들이 줄을 설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대단히 낙천적인 성격이어서 하루하루의 매출 상황에 늘 걱정이 많은 내게 위안이 되어 준다.



“저도 처음 횟집 열었을 때 정말 어려웠습니다. 동네 상인들이 하나 같이 그랬어요. 여기서 횟집 하면 안 된다고. 자리 잡는 데 한 일 년 걸렸습니다. 그러니 느긋하게 마음먹고 견디세요. 이 일대에 이런 펍은 없기 때문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 잘 될 겁니다.”



간혹 손님들이 거기서 회를 배달받아 먹고 싶다고 하길래, 나는 그런 손님들에게 상관없으니 시켜 드시라고 했고, 몇 분이 실제로 시켜 드시길래 나는 횟집 사장과 아예 동맹을 맺었다.



"여기 손님이 사장님 집에 주문을 하면 10% 할인을 해주세요. 대신 나는 사장님 집에서 회를 먹고 2차를 하러 건너온 손님들에게 10% 할인을 해주겠습니다."



이 동맹은 그가 훨씬 더 이익이었다. 그 집에서 2차를 하러 넘어온 손님은 거의 없고, 그 집으로부터 회를 배달받은 손님들만 잇따랐으니까. 역시 술보다 밥이 우선인가.



10시 마감이 끝나기 직전 나는 저녁을 먹지 못해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담배를 피우러 나온 그에게 말했다. "아유, 배고파." 그는 말했다. "우리 마감 끝나고 10시 10분에 밥 먹슴다. 건너오시오."



이게 웬 떡인가 싶어 나는 마감 중인 매니저를 등지고 냅다 밥 먹으러 건너편 횟집으로 내달렸다. 횟집 사장이 직접 요리한 두부 조림, 파김치, 오이무침까지, 진수성찬이 기다리고 있었다. 게 눈 감추듯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있는데 바로 옆으로 공깃밥 하나가 더 올 뻔하더군. 나는 밤에 위를 가득 채우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극구 사양하고는 "잘 먹었습니다."하고 나왔다.



나는 그 집에 손님이 많으면 기분이 좋다. 그에겐 조국이지만, 어찌 보면 이역만리 타향에서 일구고 있는 횟집이니까. 게다가 그는 이웃의 빈 위장을 걱정해줄 정도로 아직은 조선인의 정이 남아 있다. 싸가지 없어진 한국인이 아니라 정이 많은 조선인.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20세기소년 창업史]

연재의 서문
#01 바누아투행 비행기
#02 낙관 패닉
#03 총체적 난국
#04 모든 것을 나의 탓으로 돌리는 생각
#05 작명
#06 생애 최초의 추방
#07 20세기의 사랑
#08 20세기의 운동
#09 20세기 정신
#10 너는 추방당했거든
#11 공식적인 추방 명령
#12 자가격리
#13 초반의 불안
#14 최초의 기적
#15 노가다
#16 함몰
#17 감정노동

[20세기소년 추방史]

20세기소년 추천사
#01 안갯속의 여행자
#02 분실
#03 근대 정신
#04 가짜 뉴스
#05 충동위로
#06 자유의 일상성
#07 민중의 사고방식과 언어
#08 시민 의식
#09 여행자의 눈
#10 고향
#11 용기
#12 인연
#13 메타포
#14 그리움
#15 극기
#16 짝
#17 길동무
#18 내일 일
#19 단절
#20 호의
#21 민족
#22 갑질
#23 도착통
#24 우연의 산물
#25 중국 음식점
#26 불쌍한 표정
#27 계획
#28 감시
#29 이유
#30 오르막
#31 장애
#32 동기
#33 목적지
#34 무뢰한
#35 폐
#36 탈출
#37 네 멋대로 해라
#38 전면 봉쇄
#39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민주주의
#40 의지의 표상
#41 국경
#42 스웨덴
#43 대관절
#44 술
#45 오독
#46 왔다리 갔다리
#47 시선
#48 도돌이표
#49 순간
#50 자연 활동
#51 자연과 문명
#52 자존감
#53 냉랭한 관계
#54 낭만적 무질서
#55 춤추면서 나가라
#56 방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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