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창업史] #03 총체적 난국
#03
총체적 난국
2020년 봄 바누아투 입국 불발 이후 벌어진 판단 착오와 좌절의 연대기에서 가장 중요한 얘기가 빠졌다. 나는 앞선 글에서 의도적으로 그 사태(!)에 대해 쓰지 않았다. 그건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도 심각한 사건이기에 따로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혼에 대한 얘기다. 어쩌면 이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고백이 되겠으나 어쨌든 고백도 자기 위로의 과정이 될 수 있기에 쓰기로 한다.
2020년 4월에 우리는 이혼에 합의했다. 24년간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기로 한 것이다. 이혼은 결혼 관계의 취소를 뜻한다. 더 이상의 혼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기로 부부 쌍방이 합의하고 법원의 결정문을 받아들게 된다. 그럼에도 여기서 내가 이혼의 이유에 대해 시시콜콜 서술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처사다. 왜냐면 우리가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 일방, 그러니까 나만의 해석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최대한 공정하게 쓴들, 그녀도 잘못이 있고 나도 잘못이 있다는 식의 양비론을 펼치거나 처음부터 잘 맞지 않았다는 식의 두루뭉술한 이야기만 쓸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유와 배경은 건너뛰기로 하자. 나는 이 글의 한자락이라도 전처에게 상처를 입히는 걸 원하지 않는다.
여하튼 이 이혼 결정 과정에서 내가 바누아투로 가기로 결심한 것이 아주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는 것 정도는 이혼 사유에 대한 우리의 동상이몽에서 예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바누아투 리조트 사업에 대한 낙관에 휩싸여 있었던 나는 이혼을 요구한 전처의 제안을 큰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대개 이런 경우, 이미 결혼 생활은 껍데기만 남아 있을 게 뻔하므로 어쩌면 이혼을 위한 적당한 핑계가 생겼다고도 말할 수 있다. 자신감이 너무 넘쳤던 나는 나의 유일한 부동산 자산이었던 아파트 한 채의 명의를 흔쾌히 전처에게 넘겼다. 재산 형성의 기여도를 따지고 분할하는 일 따위는 구차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나는 이혼 뒤의 여성이 남성보다 더 재정적으로 곤란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오지랖 넓은 쿨 가이가 되었다. 심지어 전처에게 줄곧 주어온 생활비를 이혼한 뒤에도 죽을 때까지 계속 주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그 약속은 불과 반년 만에 지킬 수 없는 것이 되었지만 말이다.
가정 법원의 판사는 아마도 이 대목이 이해가 되지 않았나 보다. 서로 한 푼이라도 더 갖겠다고 악다구니를 펼치는 이혼 커플을 많이 봤다면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판사는 전처 측 변호사를 통해 “이 사람이 진짜 이런 약속을 했는지 자필 확인서를 받아오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2020년 5월 나는 YTN 근처의 상암동 오피스텔로 옮겼다. 이후의 상황은 앞선 글에서 서술한 대로다. 나는 혼자가 되었고, 이혼 과정에서 재산을 모두 포기했으며 직업적으로 위기에 봉착했고, 결정적으로 갈 곳이 없어졌다. ‘총체적 난국’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20세기소년 창업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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