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트랄 리포트 춘자 _ 11 Q&A

in #stimcity4 years ago (edited)


2014년 봄부터 우울이 차곡차곡 소리 없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때는 이 땅의 누구나 그랬겠지만. 태연하게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던 겨울의 끝자락,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한 달 뒤엔 사촌 동생이 죽었다. 그리고 제법 견고해진 우울의 성이 와르르 무너지며 나를 덮쳤다.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세상에 보통의 죽음이 어디 있겠냐마는 노인과 어린아이의 죽음은 덤덤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지독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의 이종사촌 동생은 몹쓸 병에 걸려 오랜 시간 투병하다가 고작 여덟 살의 나이에 죽었다. 막내 외삼촌은 병으로부터 아들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지만, 결국 합병증이 그 애를 데려갔다. 그 애는 평생 유치원은커녕 가족과 병원 외에는 외부 접촉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삼촌의 부탁으로 한국에서 지내는 시간에는 동생의 친구 겸 가정교사가 되어 일주일에 두세 번씩 병원이든 집이든 찾아가 함께 놀고, 그림 그리고, 피리 불고, 노래하고, 또 틈틈이 한글 공부도 했다. 그 시간이 2년쯤 될 것이다. 동생이 앓던 병은 자가면역질환이었는데 발육이 정상적으로 되지 않아 또래보다 훨씬 몸집이 작았고, 약물의 부작용으로 온몸이 퉁퉁 붓거나 복수가 차서 배가 부풀기 일쑤였다. 그 애가 너무 빛나고 따뜻해서 가끔은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고 있는 그림자가 오히려 더 선명히 보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애가 가끔 까치발을 들고 베란다 창문 너머 놀이터를 내려다보며 오늘은 친구들이 몇 명 나왔네, 오늘은 친구들이 별로 없네 하며 천진난만하게 종알거릴 때는 참을 수 없이 슬펐다. 나와 함께 하는 한글 공부도 공부라고 그마저도 몸을 뒤틀며 하기 싫어하는 모습을 볼 때도 참을 수 없이 슬펐다. 고작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누비며 디즈니랜드에라도 온 것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도 참을 수 없이 슬펐다. 그 애와 내가 함께 보낸 시간은 우리 둘만 안다. 그 시간에는 언제나 우리 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남은 슬픔도 오로지 그 애만 안다. 슬픔에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죽음에 더 슬퍼할 이들, 더 힘겨워 할 이들을 생각하며 위로하기에 바빴다. 핸드폰 사진첩에 저장된 그 애의 사진을 정리해서 외삼촌에게 보내고 내 슬픔도 서둘러 잠가 두었다. 지금도 사진은 거의 꺼내 보지 않는다. 클라우드에 저장된 사진을 실수로 열었을 때는 황급히 창을 닫는다. 동생은 딱 한 번 나의 꿈에 나타났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딱하게도 나는 꿈속에서조차 무덤덤한 체를 했다.


두 사람의 죽음은 나에게 무언가를 남겼다. 이후 대체로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슬펐고, 괴로웠고, 궁금했고, 답답했다. 애도의 시간이 얼마간 흐르고 나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이 날 슬프게 하는지, 괴롭게 하는지조차도 알 수가 없어졌다. 알고 싶었으나 생각이 들어차는 것이 버거워서 생각을 비울 수 있는 일들에 골몰했다. 쥔 것을 놓아버리거나 나를 갉아먹는 선택을 하기도 했는데, 신기하게도 그러면 살맛이 나는 것 같았다. 친구들에게 몇 번이고 진지하게 비구니가 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물론 하도 답답하여 하는 말이었지만, 무엇보다 나는 그럴 위인도 못 되었다. 본격적으로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눈을 감은 채로 깨어 있었다. 처음에는 점을 찍어 놓고 점에 집중하되 집착하지 말라는 조언을 떠올리며 열심히 따랐지만, 어쩐지 점을 그리는 순간 집착이 시작되는 것 같아 곧 관두었다. 무엇이 맞는 방법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생각을 지우는 일에 열심이었다. 명상의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그때 처음 펜듈럼과의 대화도 시도했다. 도망치듯 떠난 여행에서 사 온 에너지 스톤 펜듈럼에 핑키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밤마다 대화를 나눴다. 한 뼘 길이의 줄에 매달린 핑크색 작은 돌멩이가 내 질문에 답하며 진자 운동을 하거나 오른쪽으로 돌았다 왼쪽으로 돌았다 했다. 질문에 대한 반응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반응의 크기도 점점 커졌다. 줄을 잡은 손가락에 타격감마저 느껴질 때는 좀 무서울 정도였다. 핑키의 대답은 언제나 'YES' 아니면 'NO'였는데, 그 점이 좋았다. 복잡한 이야기들은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잡한 것들은 대부분 가짜이고, 세상의 모든 진짜는 언제나 단순하다. 사실 그 대화에서는 질문하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언제나 나였다. 핑키는 내가 외면하려고 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대신 들려줬을 뿐이다. 용기를 내라고 했다. 겁먹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있는 힘껏 겁을 잃은 선택을 했다. 거의 모든 순간 뜻대로 했으니 후회할 일도, 남 탓 할 일도 없다.

요즘엔 명상도 잘 안 하고, 펜듈럼도 잡지 않지만, 10년 전에 라다크에서 만난 스님이 가르쳐 준 구루 린포체 만트라는 여전히 입에 달고 지낸다.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읊으라고 했는데 한창 명상을 하던 그때는 간절히 원하는 것보다 알고 싶은 것이 많았기 때문에 머릿속엔 질문을 떠올리고 입으로는 만트라를 읊곤 했다. 입 밖으로 소리 내는 순간 그것은 실체를 가진 어떤 힘이 되었다.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 조금 과장을 보태서 전지전능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만트라를 읊으며 노란 가로등 불빛이 흩어진 골목길을 걷고 있던 어느 날, 대답은 상상도 하지 못한 방법으로 느닷없이 날아왔다. 질문을 던지자 길 위에 선 나를 둘러싼 빛의 농도가 갑자기 옅어졌다.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서서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의 가로등 불빛만 까맣게 사라졌다. 내 질문을 들은 어떤 존재가 대답을 보내왔다는 사실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바로 알 수 있었다. 심장이 뛰었다. 나는 꺼진 가로등을 뒤로하고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다시 질문했다. 노란색 빛이 되돌아와 순식간에 번졌다. 고개를 돌리니 꺼졌던 가로등 불빛이 환하게 밝았다. 주먹을 꽉 쥐고 집까지 달렸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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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놀이터에서 놀아보지 못한 아이라니 너무 슬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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