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크루즈] 마법 고양이가 들려주는 이상한 나라 여행 가이드

in #stimcity3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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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보고 가이드를 하라고? 이봐 마법사 양반, 난 고양이야. 사람들이 고양이 말을 어케 알아듣나? 이 냥반이 현실 세계로 가더니 정신이 좀 어떻게 됐나 보네. 그 세계 인간들은 동물의 언어를 잊은 지 오래란 말이오. 그걸 벌써 잊었소! 뭐라고? 개중에 들을 줄 아는 인간들이 좀 있다고? 나쓰메 소새끼라는 양반이 번역을 좀 해 두었다고? 소새낀지 고양이새낀지 사람새낀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 그리고 인간들이 자꾸 우리 이상한 나라에 들락날락해서 여기가 통 시끄러워, 살기가 점점 어렵다고. 왔으면 가만히 즐기다 갈 것이지 왜 그렇게 담벼락에 낙서들은 해대는 거야. '선영아 사랑해~', '우리 결혼하자.' 실컷 해라. 결혼을 하고 사랑을 하려거든 니네 세상에서 실컷 하면 되지 왜 여기까지 와서 그 난리들을 피우냐고. 어.. 어디 갔어? 이 냥반 또 지 말만 하고 휘리릭~ 사라졌네. 나 참, 여전하구만.



아아.. 췍췍, 마이크 시험 중. 아, 네 감사합니다. 여러분. 마법 고양이 체셔입니다. 체스 아니고요. 췌스~ 아니고요. 체!셔! 네? 체했냐구요? 입이 시냐구요? 아닙니다. 체한 거 아니구요. 입 안 시구요. 체!셔! 자 따라해보세요. 체!셔! 아.. 이거 이렇게 말길을 못알아들어서야. 말만 알아들으면 뭐 해 소통이 안 되는데 소통이. 암튼 여러분, 이상한 나라로 여행을 가시려고 하는 거 맞죠? 마법사님이 보내서 오신 거 맞구요. 쯔쯧, 어쩌다 그런 꾐에 넘어가셨을까? 당최 쓸데없는 짓만 하고 다니는 마법사 양반 말에 어쩌다 혹하셨어 그래. 어리석긴. 그러니까 인간들이 욕을 먹는 겁니다. 아주 불쾌해요. 우리 이상한 나라에서는 인간들이 하등에 쓸모 짝이 없다구요. 아 그래도 좀 웃기긴 하죠. 개그맨도 아닌데 다들 좀 웃겨~ 옷 입고 다니는 꼬락서니도 그렇고, 씻지도 않고 말이지. 좀 씻어요. 여러분 좀 씻으라구요. 혀는 뒀다 뭐에 씁니까? 그 더러운 침 튀기면서 떠들어대지만 말고 좀 핥고 빨고 하란 말입니다. 으그 더러워 생각만 해도, 바이러스나 옮겨대고.. 아 자꾸 말이 길어지면 나만 피곤하니까 얼렁 가이드를 끝내고 전 가서 쉬어야겠습니다. 마법사 양반 부탁이고 하니까. 그 냥반 쫌.. 그래. 부탁하면 거절하기가 어렵단 말이야. 우리 고양이들이 앵간해서는 눈길도 안 주는 데 말이지. 다들 그 냥반이 부탁을 하면 마지못해서라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묘한 마법을 부린 달까? 뭐 인간적 매력이 있는 건 아니고 카리스마가 쫌 있어. 그래서 나도 거절하기가 쫌 그렇더라고. 언제 부탁할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자, 잡소리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갑시다. 그러니까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려면 여러분! 먼저 인간들이 가진 시공간에 대한 인식부터 싹 뜯어고쳐야 해요.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들은 3차원 공간에 살면서 정작 시간에 대해서는 여전히 1차원적인 인식에 갇혀있다는 말입니다. 마법사 양반은 그게 인간 차원의 유니크함이라고, 그 맛이 죽이는 맛이라고 하긴 합니다만. 우리 이상한 나라에서 보기에는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왜 고통과 억압을 사서 즐기는지 당최 이해를 할 수가 없단 말이죠. 그게 진화라나. 저차원에서 고차원으로 상승하는 것이 진화가 아니라, 저차원과 고차원을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하는 게 진화라고 하더군요. 전 동의할 수 없어요. 뭐하러 3차원에 삽니까? 답!답!하게시리. 말도 못 알아듣는 인간들이랑. 게다가 인간의 시간개념은 3차원도 아니야. 1차원. 1차원이란 말이죠. 수준 떨어지게.. 그게 무슨 말이냐구요? 아 뭐 설명한다고 알아는 들으실랑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스마트한 마법 고양이니까 그래도 함 설명을 해보죠.



저기 앞에 계신 빛나는 양반. 아 저기 너너 조명 반사 당신 말이요. 그래그래 해병대 잠바 입은 당신, 1차원이 뭐요? 뭐? 점? 점이라고?? 어허 이 양반 초등학교 어디 나왔어? 1차원이 선이지 무슨 점이야. 점은 그 자체로 면적을 갖는 거라고. 이거이거 인간들 지적 수준이 이 모양이니 이래서 어디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겠다고. 자, 잘 들어요. 1차원은 선, 2차원은 면, 3차원은 입체. 그래그래 3차원 입체 시공간 말이야.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가 3차원 입체 아니요. 이상한 나라는 몇 차원이냐구? 이상한 나라는 무차원입니다. 그래서 이상한 나라죠. 차원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1차원이었다가 3차원이었다가 아주 뒤죽박죽이지. 그래서 이상한 거야. 알아듣겠어요? 내 말을. 알긴 뭘 안다고 고개를 끄덕거려. 하루살이만도 못한 이해력을 가지고서는.



자, 여길 보세요. 내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해 볼게요. 인간은 말이죠. 3차원 입체 공간에 살면서 1차원적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어요. 그게 무엇이냐.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인간들 말로 선형적 시간개념. 그게 인간의 한계이자 마법사 양반 말로 유니크함이라는 거죠. 3차원의 공간에 살면서 1차원의 시간에 갇혀 있는 것. 이것 때문에 아주 복잡해지는 거야. 아니 단순해지는 건가? 암튼 1차원 시간관에서는 시간이 하나의 시간 축, 하나의 선을 따라서만 나아가는 겁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뭐 빠꾸를 하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미래로 왔다 갔다 하건 어쨌든, 시간의 축이 하나의 선상 위에만 존재하는 거죠. 그러면 2차원의 시간은 어떻겠소? 그렇지 매트릭스! 아 저 빛나는 양반 뭘 좀 아네. 전후좌우로 펼쳐진 경우의 시간망 '타임 매트릭스'가 격자로 쫙~ 펼쳐지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지금 그 그물망 위 어딘가에 있는 거지. 2차원의 타임 매트릭스에서 여러분의 좌표는 대각선으로도 뒤로도 앞으로도 옆으로도 마음껏 움직일 수가 있어요. 그러다 옆으로 놓인 시간 축으로 점프하면 그게 뭐다? 평행우주다 이 말이죠. '그래 난 선택했어!' 따단 따단 따 따따다단 '인생극장!' 뭐 그런 거 있잖아. 시간 축이 한두 개가 아니야. 양옆으로 앞뒤로 쫙 펼쳐져 있으니 무한하다고. 여러분의 인식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 말이죠.



그런데 왜 이러고 사냐고? 그니까. 내 말이. 왜 그러고 살아? 다른 시간 축으로 점프하면 될 일인데. 그게 마법사 양반 말로는 고통중독이라네. 어쨌든 다 자기가 좋아서 그러는 거라는데. 난 통 이해가 안 돼서 말이지. 아니 뭐 3차원 인간들은 다 SM매니아야? 채찍이 좋아? 왜 고통을 스스로 선택해? 하기 싫으면 다른 시간 축으로 '점프~' 하면 되잖아. 그게 뭐 어려워? 선택하면 되는 일인데.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고. 그니까 모두들 저 좋은 대로 살고 있다는 마법사 양반 말이 그게 틀린 말이 아니라니까. 좋아서 고통을 꼭 끌어안고 있는 거야. 아 에베레스트는 뭐하러 올라가겠어? 목숨 걸고 말이지. 물론 뭐 꼭 좋아서만은 아니겠죠. 인간의 시간에 대한 이해가 1차원에 고정되어 있어 그런 거 겠죠. 그래서 언제나 인간은 뭐다? 직진이다 이말이지. 과거는 바꿀 수가 없고 현재는 반복되고 정해진 미래를 향해서 직진이다 이 말이죠. 길이 없어서가 아니야. 선택을 바꿀 수 없어서가 아니야. 타임머신이 없어서가 아니야. 그냥 인간이 생각을 바꿔 먹을 수가 없는 거야. 그렇게 프로그램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1차원 시간 축을 못 벗어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3차원은 뭐다? 입체다. 전후좌우로 펼쳐진 매트릭스가 위아래로 또 무한히 쌓여있는 거지. 이게 뭐냐? 다중우주다 이 말이죠. 2차원의 시간에서는 인간으로서의 그대가 다양한 평행우주적 시간 축을 경험할 수 있다면, 3차원의 다중우주에서는 인간도 될 수 있고 고양이도 될 수 있고 나무도 될 수 있고 코뿔소의 코딱지도 될 수가 있다는 말인 거죠. 물론 만수르도 될 수 있어. 좋겠다. 돈 많아서. 다 가능한 거예요. 1차원의 시간개념만 벗어나면. 세상의 모든 시공간이, 경계가 없이 무한한 하나의 큐브에 들어 있는 거란 말이에요. 이걸 인간 말로 뭐라 그러던데? 알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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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이런 형태를 상상한 사람도 있다는데
아인슈타인의 스승이라고 하지 아마.
빛보다 빠른 물질이 없으니
인간의 삶이 저 원뿔안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하던데
뭐 그건 사람 생각이고 고양이는 액체라 어디든 가지 ㅋ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요? 괜찮아요. 그게 이해가 가는 게 더 이상한 겁니다. 하루살이한테 백날 내일을 설명해 봐요.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런데 여러분이 굳이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겠다고 하니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겠다고 하면 일단 시간 개념부터 바꿔야 한다는 건 피해 갈 수 없는 사실이거든.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마법사에게 속았다며 환불해라 내 인생 돌려놔라 컴플레인이나 할 테니,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이상한 나라 여행은 꿈도 꾸지 말아달라 부탁을 하는 겁니다. 자꾸 불쌍한 마법사 양반 귀찮게 하지 말고. 그 냥반 요즘 꼴이 말이 아니야. 살이 자꾸 빠져. 스트레스를 많이 받나 봐. 그 냥반 스테레스 받으면 지팡이 타고 이상한 나라 PC방에 와서 계속 넷플릭스만 봐. 그리고 눈물을 뚝뚝 흘려. 슬퍼서, 감동해서 우는 게 아니라, 자기는 스트레스 받으면 머리카락에서 검은 물이 빠진데 그게 눈으로 흘러나온다는 거야. 까만 눈물. 그래서 머리가 하얗게 셌어. 젊은 양반이 벌써 말이지. 그니까 여러분, 굳이 이상한 나라를 여행해야겠다 싶으면 내 말을 좀 새겨 들으란 말입니다. 엄한 마법사 잡지 말고.



자자, 지금부터가 진짜 본론인데 저~기 지구를 걷는 양반, 저 뒤에 쌓아놓은 책들 좀 가져오시오. 자, 이 책이 뭐냐 하면 <어쩌다 크루즈>라는 책인데.. 아아 진정들 하시고. 뭐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 아니요. 이게 이 책이 잘 나왔어. 내가 책 팔아먹자고 그러는 게 아니고, 이 책이 이상한 나라 여행기로 꽤 괜찮게 나왔다 이 말이요. 뭐요? 커미션 얼마나 받냐고? 아니 뭐 일한 보상이야 받아야지. 근데 난 뭐 별거 없어. 여러분이 포스팅에 보팅 좀 해주면 그게 다야. 그런데 왜 나서서 그러냐고? 아 그게 마법사 양반이 하도 부탁을 하길래. 뭐 나도 이 책을 오는 길에 좀 읽어 봤는데 재밌긴 하더라고. 꽤 두꺼운데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거든. 아 그리고 책 홍보 좀 하겠다는데 뭐가 그리 불만이유. 이상한 나라 가이드북이 많지가 않아. 있어도 다 옛날 책이고 게다가 크루즈 여행기는 더 없어. 요즘 다들 비행기 타고 가지 배 타고 가는 인간이 어디 있나? 그런데 이 책 작가가 그 짓을 했더라고. 그래서 우리 이상한 나라에서도 다들 신기해하고 그랬어요. 자자 좀만 기다려 보세요. 이상한 나라 여행하는 방법이랑, 여행경비 조달하는 법도 내가 친절하게 다 알려 줄 테니까.



자, 책을 일단 펴시고. 몇 페이지더라? 아 지구를 걷는 양반 뭐해요? 빨리 책 안 나눠주고. 워워~ 네네 금방 끝나요. 일단 책을 받으셨으면, 어디로 갔냐 어디로 갔냐 아 왤케 안 찾아지지.. 아아~ 찾았다. 찾았다! 279페이지! '오늘의 가난은 어제한 여행의 값' 이 챕터를 펴시고, 자자 제가 읽겠습니다. 모두 조용~ 쉿!


학교생활과 아르바이트로 바빠 함께 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미안했는지 랄레는 집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위해 직접 요리를 해 주었다. 넓적한 페스츄리 위에 햄과 치즈를 얹은 피자는 만들기도 간단하고 재료비도 싸서 돈 없는 대학생들이 자주 해 먹는 음식이라고 했다. 단출한 재료지만 맛도 좋고 칼로리까지 높으니 허기진 배를 쉬이 채우기에 적절했다. 처음 시도라고 자신 없어 하며 만들어 준 태국식 커리는 레스토랑에서 파는 것처럼 맛있었다.

"랄레, 이거 진짜 맛있다. 요리 천재가 따로 없네!”

정말 맛있어서 외친 감탄사였지만 그보다 랄레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터져 나온 말이었다. 긴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여행자의 생활을,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따뜻한 환대가 고맙기도 했고 1유로에 바들바들 떠는 랄레가 안쓰럽기도 해서 같이 장을 볼 때면 재빨리 카드를 꺼내 계산했으나 그녀는 한사코 거절하며 자신의 몫 반절을 기어이 돌려주었다.

“젠, 너는 신용카드로 여행을 하고 있잖아. 내가 이걸 받을 수는 없어.”

신용이라는 걸 담보로, 가지고 있지도 않은 돈을 미리 쓰게 해 주는 마법의 카드 덕분에 이 여행을 가까스로 이어 가고 있다는 걸 랄레도 알고 있었다. 돌아가서 갚아야 할 돈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 더 바락바락 우기지는 못했다. 그저 떠날 때 엽서 한 장과 랄레가 줄곧 피워 대던 담배 몇 갑을 선물했을 뿐이다. 그마저도 곤란하다며 극구 사양하던 랄레에게 버스 놓치겠다는 핑계로 던지다시피 건네고 서둘러 떠났다.



그리고 마틴의 이야기.


베를린에 사는 마틴 역시 랄레와 마찬가지로 친구들과 같이 셰어 하우스에 살고 있었다. 그리 커 보이지 않는 집 거실에는 서너 명의 친구들이 늘 북적였다. 마틴이 한 명씩 소개해 주었지만 늘 구성원이 달라져서 이름을 잘 외우지도 못했다. 대충 세어도 최소한 여덟 명은 사는 듯했다. 마틴은 마지막 학기 페이퍼를 쓰며, TV 다큐멘터리 자료조사 일을 하고 있었다. 일은 재밌지만 월급이 적어서 여기에서 오래 일하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10년 전 나 역시 다큐멘터리 막내 작가였던 걸 생각하니 닮았다고 생각한 적 없는 우리의 모습이 처음으로 겹쳐 보였다. 새벽같이 일어나 온종일 밖에서 일하고 저녁에 들어와서는 시간을 쪼개어 조깅까지 하며 꽉 짜인 하루를 보내는 마틴의 생활에 내가 끼어들 틈은 없어 보였다. 나는 마틴이 신경 쓰지 않도록 낮에는 베를린 곳곳을 알아서 쏘다니다가 저녁 늦게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마지막 밤, 마틴이 시간을 내어 베를린의 밤 문화를 소개해 주겠다고 나섰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엔티크한 분위기의 LP바였다. 병맥주를 하나씩 시키고 앉아 잠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댄스 스테이지로 자리를 옮기려는데 마틴이 빈 맥주병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마틴, 병은 왜 챙겨?"

"술 살 때 병 보증금이 포함되어 있거든. 병을 가져다주면 0.5유로를 받을 수 있어."

마틴이 빈 병 두 개를 주인에게 내미니 그는 1유로를 바로 돌려주었다.

마틴의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고 춤을 추며 노는데 혼자 분주한 마틴이 이따금 눈에 들어왔다. 마틴은 술을 사 마시지도 않으면서 이리저리 오가며 맥주병을 모아 바에 가져다주고 돈을 받고 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버리고 간 빈 병이 곳곳에 널려 있었기에 병을 모으는 건 어렵지 않았다. 힙한 클럽에서 힙하게 차려입은 빈 병 팔이 소년이라니! 크지도 않은 클럽에서 마틴은 눈치도 보지 않고 몇 번이고 빈 병을 팔았다. 그 장면은 연출된 코미디 같았다.

오늘의 우리는 가난하다. 어제는 어제가 된 오늘을 충만하게 즐기기 위해 크루즈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예정된 가난이 우습지만 비참하지는 않다. 어제를 즐겼고 그 순간의 대가가 지금의 가난일지언정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회가 다 뭔가. 그 어제가 지금의 고단함을 이기게 하는 힘인 것을. 수고로운 하루의 끝에 그들은 지치고 힘든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지나간 여행을 떠올리거나 다음 여행을 구상할 때면 다시금 눈이 반짝였다. 여행자는 길 위에서 가장 생동할 수밖에 없다는 걸 둘을 보며 다시금 실감했다. 그들을 보며 자연스레 10년 전의 나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과거가 아니다. 내가 그들의 미래인 것도 아니다. 어제 때문에 오늘이 가난하지만, 여전히 내일의 여행을 꿈꾸는, 계속 이렇게 살아갈 것이 분명한 여행자일 뿐이다. 우리는 언젠가 다시 바다 위에서 만나기로 했다. 대륙에서 대륙을 이동하는 배 위에서. 그때의 우리는 누구보다 자유롭고 충만한 오늘을 함께 보낼 테지.



흑흑 ㅠㅠ 좀 감동적이지 않아? 안타깝기도 하구. 그러게 인간 세계란.. 어쨌든 이 마법 고양이가 여러분에게 가이드해 드리고 싶은 말도 같습니다. '어제는 어제가 된 오늘을 충만하게 즐기기 위해 크루즈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예정된 가난이 우습지만 비참하지는 않다.' 어제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오늘, 내일이라는 오늘 모두가 3차원 입체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하나라는 것이죠. 장면과 환경은, 변화하는 입체 시공간 안에서 끝없이 움직이지만, 그 속에 존재하는 나는 언제나 한결같이 나 하나인 것이죠. 그러므로 신용카드를 긁고 있는 나와 그 카드값을 지불하고 있는 나, 그리고 카드값을 지불하지 못하고 연체자가 되어버린 나. 모두 하나의 알레프, 3차원 입체 시공간 안에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우주를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대의 선택이죠. 하지만 이 책의 작가는 분명히 알고 있어요. '그들은 나의 과거가 아니고 내가 그들의 미래인 것도 아니란 것'을 말이에요. 어떤 미래의 내가 신용카드값을 지불했기에 오늘의 내가 신용카드를 긁을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의 선후는 내가 정하는 겁니다. 1차원의 선형적 시간 축에 갇혀, 오늘 카드를 긁어버린 나와 카드값을 갚지 못해 연체의 늪에 빠져드는 어떤 내일의 나를 연결시키는 버릇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그대는 영원히 이상한 나라를 여행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카드를 긁으라구요? 아니요. 그대의 시간 축이 카드값을 무리 없이 지불하는 미래와 연결되어 있는지, 연체로 골머리를 앓는 과거에 붙들려 있는지 먼저 확인하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것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거예요. 오늘의 가난을 어제 한 여행의 값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 신용카드를 긁을지언정 충만한 마음과 경험으로 또 다른 충만한 미래의 시간 축과 자신의 오늘을 연결시킬 수 있는 자. 그런 이들만이 이상한 나라를 여행할 수 있는 겁니다.



왜 그대는 그대 자신을 신용하지 못하죠? 카드회사는 그대를 믿는데 그대는 왜 자신을 믿지 못한 채 도전하길 두려워하죠? 마법은 자신을 신용하는 이들에게만 효력을 발휘합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겁쟁이들이 덥석 마법의 세계로, 이상한 나라로 뛰어들었다간 패가망신을 면치 못하는 거예요. 0.5차원 림보의 시간 감옥에 갇혀 버리는 거예요. 이상한 나라의 붉은 여왕은 언제나 말씀하셨죠. '세상에 게으른 자는 없다. 에너지가 없을 뿐' 게으른 사람은 없어요. 마음에 에너지가 고갈되었을 뿐이죠. 원하지 않는 시간 축에서 시간을 소모하고 있을 뿐이구요. 인간들이 참을 수 없어 하는 건 가난이 아니라 지루함이거든요. 우리 고양이들이야 지루함이 일상이지만.



3차원 세계의 인간으로서,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한 시간 축을 사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이지만, 오늘 충만하다면 어떠한 미래와 링크되어도 아무 문제 없다는 자존감과 자신감을 가진 이들이 용기 있게 이상한 나라를 찾아 옵니다. 보세요. 이 책 표지의 인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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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크고 당당합니까? 그는 자신의 두발로 버티고 서서 10만 톤이 넘는 크루즈를 머리에 지고 있어요. 떡볶이나 먹고 죽겠다며 방구석에 자빠져 있는 요즘 인간들하고는 아주 차원이 다르지요. 이 정도는 돼야 이상한 나라를 여행할 수 있는 겁니다. '선영아 사랑해~' 낙서만 좀 하지 않는다면 더 좋겠지만.



자, 그대들은 충만한 오늘을 위하여 불안한 내일을 걷어내고 빈 병이라도 주울 각오가 되셨습니까? 잘 모르겠다구요? 그러면 이 책 한번 사서 봐. 여기 이 작가가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나아갔는지 좀 읽고 생각해 보란 말이오. 이 멍청하고 가여운 인간들..





마법 고양이에게 부탁하는 게 아니었다. 박람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누군가는 마법 고양이의 말투를 트집 잡아 인간모독, 명예훼손으로 청와대 신문고에 청원을 넣겠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마법 고양이가 포르쉐를 타고 다니는 사진을 발견했다며 SNS를 도배하기도 했다. 이에 가만 있을세라 네티즌 수사대는 마법 고양이의 학폭 관련성과 이상한 나라로의 위장 전입, 사료 구입과 관련된 탈세정황 등을 포착했다며 관계기관에 고발장을 접수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영악한 마법 고양이는 진즉에 눈치를 챘는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상한 나라에도 수소문을 해보았는데 아무래도 액체로 형태를 변화해 붉은 여왕의 와인 저장고 어딘가로 숨어 버린 듯하다고 전해왔다. 지 잘못은 아는지. 다만, 이상한 나라로서도 여행자들이 급감해 나라 경제에 타격을 입지 않을까 염려가 많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걱정이 팔자인 개미들의 의견일 뿐이었지만.



이러려던 게 아니다. 인간의 시공간 개념에 대해 설교를 해달라고 마법 고양이에게 부탁을 한 게 아니었다. 그런 얘기를 해봐야 누가 이해하겠나. 다들 1차원의 시간 축에 갇히고 싶어 이 우주를 선택한 건데. 게다가 이렇게 어렵고 긴 얘기는 요즘 아무도 듣지도 읽지도 않는다. 그냥 책 구매 이벤트로 SNS 셀카 모델이나 좀 해달라는 거였는데. 요즘 워낙 냥이들이 핫하니 마법 고양이라면 히트 좀 하겠다 싶었는데. 내 실수다. 설명이 부족했나? 현실 세계에 너무 오래 있었나 보다. 고양이 말이 어눌해졌다. 그러나 뭐 어쩔 수 있나. 마법 고양이는 자기 하고 싶은 말밖에 할 수 없다는 걸 오랜 인간 생활에 지쳐 잊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박람회장에서 마법 고양이의 시간개념에 대한 설교를 듣고 무언가를 깨달은 이들이 연락을 취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이상한 나라에 갈 수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문의를 해오고 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이상한 나라로 가는 방법 중 가장 확실한 방법은 풀만투르社의 호라이즌 호를 타는 것인데 이 배가 최근 코로나 사태 등으로 은퇴를 해 버렸다. 뭐 1990년생이니 오래되기도 됐다. 게다가 이상한 나라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으니 호라이즌 호의 나이는 가늠을 할 수가 없을 정도긴 하다. 나는 이 책에서 호라이즌 호가 은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뭉클했다. 그간 적어도 120만명 이상의 이상한 나라 여행객들을 태우고 바다를 누볐을 호라이즌 호는 이름 그대로 현실 세계와 이상한 나라의 경계를 수도 없이 건너다녔다. 주로 지팡이를 이용하는 나는 그 배를 탈 일이 없었지만 역사 이래로 많은 여행자들이 마법사들의 초청을 받아 호라이즌 호를 타고 이상한 나라를 수도 없이 여행했다는 소식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랬던 배가 은퇴를 했다니. 인간 세상의 나이로는 마법사보다 한참 어린 배가 은퇴를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니 그 노고가 떠올라 마음에 감동이 저며왔다. 얼마나 난리들을 쳐 댔을까? 갑판을 뛰어다니며 난 못 참겠다고, 바다가 무섭다고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며 울음을 터뜨리는 철없는 여행자들. 갑자기 집에 두고 온 가족들의 안위가 걱정된다며 배를 멈추지 않으면 바다에 뛰어들겠다 엄포를 놓는 두려움에 휩싸인 순례자들. 이상한 여행을 선택해 놓고서도 사사건건 사실관계, 과학적 합리성, 논리적 모순을 따지고 드는 귀찮은 학자들. 예산을 충분히 알려주었건만 빠르게 줄어드는 통장 잔고에 이런 거였으면 시작도 안했다고 사기 운운하는 겁쟁이 도전자들. 그 갈등과 높은 언성, 후회와 한탄을 수도 없이 듣고서도 묵묵히 바닷길을 걸어 여행자들을 실어 날랐을 호라이즌 호의 노고가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오래된 배로 하여금 노정을 계속 할 수 있게 한 것은 아마도 이 책의 작가와 같이 자존감과 자신감으로 가득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마음 같아서는 모든 크루즈 여행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어 준 호라이즌을 위해 120만 명을 모두 모아 은퇴 파티를 열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은퇴한 배는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든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호라이즌의 은퇴 길을 함께한 것이 다행이었다고도 생각했다.

'쉽지 않았을 텐데 수고 많았어'

_ <어쩌다 크루즈>, 젠젠



작가의 이 말이 마치 은퇴를 앞둔 미래의 마법사를 향한 말 같아 더 뭉클했다. 그래 나도 언젠가는 호라이즌처럼 마법사 노릇을 마치고 은퇴할 날이 오겠지. 마법사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며 용기 있게 이상한 나라를 탐험한 작가 젠젠은 나의 은퇴 파티도 열어줄까? [스팀시티]의 120만 시민은 마법사의 은퇴 파티에 와줄까? 기왕이면 은퇴한 호라이즌의 선상이면 좋겠다. 그때의 마법사는 빵 바구니에 깔린 흰 천과 붉은 테이블 냅킨으로 만든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핑크색 수트를 차려입고서는, 머리에 사일런트 댄스파티용 헤드셋을 끼고 미친 별 춤을 추리라. 작가 젠젠은 영화 '타이타닉'의 로즈의 드레스를 닮았다는 글 속 그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마법사를 맞아주기를. 그리고 랄레와 마틴, 빌, 스티브, 노만 할아버지 삼총사와 멕시코의 카르멘, 덴마크의 위니 할머니, 그리고 존과 위키 모두를 초청해 할 줄 아는 말이라곤 한국말과 방언뿐인 마법사에게 소개시켜 주면 좋겠다. 그러면 마법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래봬도 제 덕분에 여러분들의 인연이 이어진 겁니다. 제가 젠젠에게 크루즈 여행을 추천했거든요.'라고 거드름을 피워볼 텐데. 그러면 우리는 모두 기쁘게 울며 웃을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우리는 손에 손을 맞잡고 앞으로 앞으로 노래를 부르며 강강술래를 돌아볼 텐데. 그러면 우리는 모두 더이상 이상한 나라가 아닌 좋은 나라의 시민이 되어 서로에게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할 텐데.




Will you still love me
when I'm not longer
young and beautiful?

내가 더이상 젊고 아름답지 않아도
여전히 날 사랑할 건가요?

웅장하게 시작하는 사운드는 점차 가냘프고 아슬아슬한 선율이 되고, 영원하지 않은 젊음과 아름다움 앞에 신경질적인 데이지의 모습은 음악과 어울려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드레스를 입고 크루즈 메인 로비에 당당하게 서 있을 때만큼은 '오늘이 나의 가장 젊고 아름다운 날'이라는 사실을 새삼 되새기곤 했다. 박제할 수 없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지금 누릴 수 있는 만큼 정성껏 누리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하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소멸하는 것에 연연하며 슬퍼하는 순간에도 나의 가장 젊고 아름다운 시간이 흐르고 있으니까.

땀을 뻘뻘 흘리며 함께 춤을 추었던 로저와 사일런트 파티에서 만난 이름 모를 할아버지의 격렬한 춤사위를 다시 떠올렸다. '내가 젊고 아름답지 않아도 당신은 여전히 날 사랑할 건가요?'라는 가사를 '당신이 젊고 아름답지 않아도 여전히 춤을 출 건가요?'로 바꾸어 보았다. 상상 속에서 두 사람이 대답했다.

"아무렴. 춤은 모두에게 평등하니까. 우린 계속 춤을 출 거야."

_ <어쩌다 크루즈>, 젠젠



이제는 마법사가 대답할 차례,



그녀가 묻는다.
"아무도 당신의 글을 읽지 않아도 여전히 글을 쓸 건가요?"
"아무렴. 글 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우린 계속 글을 쓸 거야."



그녀가 다시 묻는다.
"이상한 사람이란 소리를 들어도 계속 마법사를 할 건가요?"
"아무렴. 나는 이상한 나라의 마법사니까."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누가 먼저 한 말인지 모르는 감사의 인사를 남긴다.



"마법사의 이상한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과감히 다른 시간 축으로 점프해 준 작가 젠젠에게, 그게 비록 자신의 운명이었을지라도 또한 그러지 않았더라도 훌륭한 작가가 되었을 거라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스팀시티]의 이야기, 춘자의 이야기, 마법사의 이야기 그리고 당당하게 두발로 버티고 서서 자신의 삶에 도전하는 모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들의 이야기를 열어 주어서 고맙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마법사 되길 참 잘했다고 오랜만에 뿌듯했다고, 진심을 가득 담아 인사를 남긴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블록체인에.."







[choonz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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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님! 너무도 재밌고 감동적인 리뷰입니다. 웃다가 울었네요. 계속 당당하게 두발로 버티고 서서 도전을 이어가겠습니다. 크루즈 여행의 마지막은 앨리스 스프링스에서 리코더를 부는 저의 모습일테니 말이에요.

그럼, 마법사는 옆에서 기타를 ~

춘자님은 플룻을! 리코더 연습 많이 해놔야겠어요!

Hello mm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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