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자, 우리

in #stimcity3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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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有)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두 사람의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여자의 시간은 점점 어려지고 남자의 시간은 점점 늙어가고. 테넷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이 영화의 거꾸로 흐르는 시간은 테넷의 그것처럼 Rewind되지는 않는다. 나이는 점점 어려지지만 하루 단위의 시간 내에서는 순행한다. 논리적으로 보면 테넷처럼 분, 초 단위로도 역행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의 하루 단위는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대처럼 순행한다. 설정이니까 그렇다고 생각하고 넘어가자. 그런데 실제로도 그런 게 아닐까?



우주의 평형감각에 따라, 순행하는 우주가 있다면 그 반대로 역행하는 우주가 존재한다는 이론이 있다. 이 영화와 테넷도 그런 이론에 기초한다. 그러나 시간 따위는 없고 우리는 그저 공간을 이동해 다니는 것뿐이라면, 시간은 역행하기도 하고 순행하기도 하며 전후좌우로도 움직이고 지그재그, 사방팔방으로 진행하기도 한다. 어젯밤 꿈처럼. 그러니 의식이 경험하는 시공간은 실제로도 뒤죽박죽이다. 그걸 현실감이 단단하게 붙들어서 서사를 부여하는 것이다. (영화 '토탈리콜'의 가상현실 서비스를 사용 중이더라도) 부여된 서사에 따라 우리는 마치 늘 그래왔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천연덕스럽게 지금을 인식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꿈속에 공주였던 너가 현실의 공주가 아니듯, 어제의 너는 오늘의 너가 아니고, 어제의 너와 오늘의 너는 같은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잠깐 정신줄을 놓은 너와 정신 차린 너가 같은 시공간에 머물고 있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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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남자의 타임라인



그래서 이야기가 중요하다. 삶의 서사는 우리의 뒤죽박죽인 세계를 하나로 꿰는 '아리아드네의 실'이다. 놓치면 의식은 길을 잃게 되고 마침내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 두 세계를 연결하고 있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우주에 살고 있지만 5년마다 한 번씩 30일간만 조우한다. 그러나 남자의 시간은 순행하고 여자의 시간은 역행하기에 20대의 서로를 만나는 것은 딱 1번, 30일뿐이다. 그들은 30일간의 애틋한 연애를 한다. 그리고 각자의 시간의 흐름을 따라 만나자마자 이별을 하게 된다.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 있다고 해서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같은 시공간에서 서로 조우하고 있지만 시간의 흐름은 각자 다르다. 그래서 조우하는 시공간 역시 짧거나 길다. 스치듯 지나가기도 하고, 영원할 것 같다가도 어이없이 종료되고 만다. 그러나 만난 이들은 모두 인연因緣의 법칙에 의해 돌고 도는 어떤 시공간에서 또 연결되어 있다. 영화 속 여자와 남자도 그렇다. 5년 만에 1번씩 만나게 되는 그들은 각자의 다른 시공간 속에서 서로를 구원한다. 35살의 남자는 5살의 여자를 폭죽 사고에서 구하고, 마찬가지로 35살의 여자는 5살의 남자를 불길 속에서 구해낸다. 너와 나는 2021년에 만나고 있지만 이미 영겁의 세월 동안 끊임없이 조우해 온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서사가 어떻게 부여되는가에 따라 그것은 매우 지독하거나 매우 애틋하거나, 사랑스럽고 그리우며 원망스럽고 미움이 가득할지 모른다.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관계도 있겠지)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는 계속 만난다는 것이다. 어린 마법사는 이 사실을 불현듯 깨닫고 생각나는 모든 인연들에게 용서의 전화를 걸었던 적이 있다. 그 뒤로는 착하게 살고 있다. 착하게 산다는 의미는 진심을 다하고 있다는 말이다. 어차피 계속 만나게 되니 진심을 다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거짓일 테고,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용서를 구해야 할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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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또 만났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면, 영화 속 남자가 35살에 폭죽 사고로 부터 구한 5살의 여자는 그가 20살에 만난 그녀가 아니다. 그것은 각각 독립된 시공간에서 일어난 다른 사건이다. 현실감이 부여한 서사가 그것을 생의 연속된 역사로 인식하게 할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매일 다른 너를 만나고 있는 거다. 인정하기 싫어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살면 미쳐버릴 테니, 오늘의 너는 어제의 너고 내일의 너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실체는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가 원하는 건 서사, 사랑의 이야기 그 자체이니까.



그래서 내가 만나는 너는 '환상 속의 그대'인 것이다. 그것이 인간 생의 아름다움이고 우리의 영혼이 선택한 드라마이다. 그러니 우리는 굳이 이미 심취해 있는 배역에서 빠져나올 필요가 없다.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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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족구왕



그래서 족구왕은 드라마가 끝나기 전, 이생을 떠나기 직전 구원을 얻었다. 그는 30세기에서 돌아온 마법사처럼 2063년에서 온 미래인이다. 직장암에 걸려 죽게 된 그에게 천사가 나타나 '당신은 우주에서 가장 지루한 삶을 살았다'며 그를 20대로 돌려 보내버렸다. 하필 20대 초반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군대를 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족구를 사랑했다. 그래서 군대에서 열심히 족구를 했다. 그리고 복학한 캠퍼스에서도. 그의 못다 이룬 꿈은 족구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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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다가 다시 돌아왔으니 이번에는 말 그대로 죽을 힘을 다해



영화는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다. 그런데 하필 영화의 배경이 된 캠퍼스가 마법사의 모교라 설레며 영화를 보았다. 기억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2년간 생활했던 기숙사와 꽃이 만발한 캠퍼스의 전경, 밤마다 검은 세계를 물들이던 음대 가는 길의 가로등 불빛, 정적을 감싸고 돌던 중앙도서관의 책 냄새. 나는 캠퍼스를 사랑했다. 돌이켜 그때를 생각해 보면, 기숙사에서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가슴이 설레였던 기억이 난다. 철저한 아싸였던 마법사라 눈 떴다고 누가 불러주지도 갈 데도 없는데, 그때는 그렇게 아침이 설레였다. 지방 캠퍼스라 수업이 끝나는 대로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적막한 캠퍼스를 사색하며 걷던 기억과 계절의 변화와 상관없이 따뜻하며 촉촉했던 대기의 촉감. 도서관에 처박혀 보고 듣던 핑크 플로이드와 에리히 프롬 그리고 샘이 깊은 물이 마법사 감성의 70%를 만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사뿐사뿐 걸어 도서관에 갔다. 책장 뒷편 도서 대출목록에서 계속 발견되는 같은 이름에 가슴이 설레였다. 누군가 같은 책을 읽고 있다니. 보물찾기하듯 책들을 뒤적였다. 기왕이면 이름처럼 향기롭기를. 그러나 우연히 마주치는 행운 따위는 없었다. (아, 마법사에게도 천사가 나타나 그때로 돌려 보내주어야 한다. 닥치는 대로 고백하고 다닐 텐데) 열람실 마감 시간이 되면 비어있는 음대 피아노 연습실에 들어가 석양이 드리우는 피아노에 기대앉아 CD 플레이어로 유재하를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고 하늘이 까매지면 기숙사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는 모든 유리창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예술대의 불빛이 까만 밤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 밤을 지새우며 무언가에 집중하는 그 청춘의 열정 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복 없는 마법사의 캠퍼스 라이프는 얼마나 한가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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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지나다니던 학생식당 앞 금잔디동산,
저걸 못 해봤으니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도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뭐가 그렇게 설레였을까? 캠퍼스 커플도 못 해봤는데. 그러나 족구왕 역시 그게 그렇게 서러웠는지 20대로 돌아와서는 '살면서 본 가장 아름다운 여자에게 고백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물론 결론은 언제나 그렇듯, 청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어쨌거나 '족구왕'과 '사랑 고백'의 꿈을 이룬 그는, 족구 내기로 따낸 벤츠를 타고 미래로 다시 빽투더퓨쳐 한다. (나도 데려가지)



2063년이면, 족구왕이 사랑을 고백했던 그녀 역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겠지만, 2063년의 그녀가 20대의 그녀가 아니듯 지루한 인생을 마감할 뻔했던 족구왕 역시 후회스런 20대의 그가 아니다. 그는 홀로 생을 반대로 돌아서 20대의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꿈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었던 2063년의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을까?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시공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우주의 정거장에서 서로를 조우한다. 그것은 처음이지만 마지막이다. 그래서 소중하고 그래서 가슴 아프며 그래서 아름답다. 그러니 나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할 수밖에. 진심이 아니면 어차피 내일은 없으니 얼마나 후회스러울까? 그러나 나의 이야기 속에서 너는 여전히, 언제나, 다시 만나고 또 만나질 테니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드라마 속 너는 잔인했더라도 초월 된 시공간의 우리는 모두 하나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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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나, 마법사 멀린이라구! 모두들 잊은 건 아니겠지?



마법사는 생의 본질을 깨닫고는 하루하루가 두렵고 하루하루가 아쉬워졌다. 다시 만날 테니 이별은 두렵지 않지만, 오늘의 너는 내일의 너가 아니니 최선을 다할 수밖에. 그러나 마법사 자신을 위해서는 인생의 서사를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한다. 언제까지고, 비참하고 짜증 나는 서사로 덕지덕지 발라진 시공간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우주가 갈라진, 다른 서사와 다른 시간의 흐름을 선택한 너에게 안녕을 고한다. 우리는 짧게 만났더라도 다시 만날 테니 아쉽더라도 질척거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내일의 너는 오늘의 너가 아니니 나는 이 순간의 너를 뜨겁게 사랑하련다. 그러다 보면 마법사의 서사와 연결되는 모든 인연들이 마법사를 뜨겁게 사랑해 주겠지. 그러다 보면 모든 영혼들이 각자의 시공간에서 서로 뜨겁게 사랑하겠지. 그렇게 다르지만 비슷해지는 서로의 이야기가 하나의 책에 모두 담기겠지. 그때에는 족구왕도 소공녀도 마법사도 모두 행복하겠지.



그때까지 잘 지내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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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후회가 없고 그녀는 울고 있다



휘리릭~







[위즈덤 레이스 + Movie100] 008.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족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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