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7-12 여전히 살아 있는 백선엽의 망령, 다부동 전투는 제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의 공적이다.
26- 7-12 여전히 살아 있는 백선엽의 망령, 다부동 전투는 제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의 공적이다.
다부동 전투가 낙동강 전선을 혼자서 막아낸 것 처럼 알려지고 있다. 백선엽을 전쟁 영웅으로 만들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백선엽은 사실 당시의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 중에서 가장 활약이 미흡했던 지휘관이다. 그는 전쟁발발이후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전쟁초기 한강방어선을 구축하자는 김홍일 장군의 요구도 거부하고 후방으로 단신 후퇴했다.
전쟁 초기 제1사단은 중화기를 모두 상실하고 사단은 사실상 해체되고 연대장에 의해 철수했다. 김종오의 제6사단이 중동부 전선에서 노획한 북한군 중장비로 겨우 무장을 할 수 있었다. 낙동강 방어선 구축까지 제1사단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흔히들 말하는 낙동강 돌출부는 낙동강 서남부의 영산지역을 말한다. 지금은 마치 백선엽의 제1사단이 있던 왜관지역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낙동강 방어선은 전사연구에 많은 인사이트를 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군은 여전히 낙동강 전선에서 어떤 전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고 있다. 아예 방기를 한 것이다. 한국군이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원인중의 하나는 백선엽의 책임이 크다. 원래 전사연구는 각군에서 해야 한다. 육군은 지상군 전사를, 해군은 해전사를, 공군은 공군전사를 연구하여 이를 바탕으로 각군의 발전방향을 잡아가야 한다.
한국은 기형적으로 국방부군사편찬 연구소라는 것이 있고, 이조직은 처음 만들어질때 해공군 군사연구소의 인력 소요를 받아서 만들었다. 해공군 전사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해공군전사를 연구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육군본부는 거부했다. 그래서 육군군사연구소가 존속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국방부 군편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그나마 육군군사연구소가 남아서 전사연구를 위한 기초작업을 해왔다.
각설하고 최근 여전히 백선엽의 영웅만들기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백선엽이 남긴 엄청난 유산 덕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때를 맞춰 백선엽의 다부동 전투를 띄우기 위한 시도가 자행되고 있다.
낙동강 전투에서 다부동 전투는 매우 의미가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아래의 전투상황도를 보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낙동강 전투에서 가장 위험하고 심각했던 전투의 순서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낙동강 서남부 전투(마산 ,의령, 창령 지역)
2, 동해안 지역 전투(안강 기계 포항 방면)
3, 영천지역 전투
다부동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왜관 대구 방면 전투는 낙동강 전투에서 여타의 다른 지역 전투보다 치열하지 못했다.
아래의 전투상황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다부동 전투에 대한 기록은 왜곡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의 육전사연구회가 편찬한 자료는 당시의 다부동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책은 1980년대 한국전쟁으로 번역되었다. 당시 군사정권에서 이 책을 엄청나게 찍어서 분배했다. 유감스럽지만 한국의 군인 중에서 이책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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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7일
대구전선에서는 제1기병사단이 303 고지를 탈환함으로써 북괴 제3사단에 일격을 가했으며, 대구 상주간의 도로로 남하한 북괴 제13사단이 다부동 정면에 대해 강한 압박을 가해와 다부동은 위급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8월 18일
그러나 대구 북쪽의 다부동을 중심으로 한 한국 제1사단의 진지는 북괴 제13, 제15 사단의 공격을 지탱할 수 없게 되자 워커 장군은 대구로 이동시켜 놓았던 미 제27연대를 다부동 지구의 한국군 제1사단 진지 중앙에다 투입시켰다. 아날 밤부터 전후 7회에 걸친 다부동에 대한 부괴군의 야간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날 처음으로 대구 시내에 북괴군의 포탄이 떨어졌다. 한국 정부는 부산으로 천도했고, 이에 당황한 피난민들은 역으로 몰려들었다. 이제 대구에는 내외로 위기가 들이 닥쳤다. 특히 유학산을 중심으로 하여 북괴 제15사단과 사투를 거듭하고 있던 한국 제1사단의 좌측방이 곧 붕괴될 것 같은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북괴군 전선사령부는 제15사단을 영천방면으로 전환시키는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
즉 이것은 의성-신령-영천간의 도로를 따라 공격하던 북괴 제8사단이 한국 제6사단의 반격을 받고 공격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부대를 교대시키기 위해서 전용한 것이다. 이에 따라 대구에 대한 압박은 급속히 감소되었다. 그리고 한국 제1사단의 좌측방도 위기 속에서 구출되었다.
8월 19일
다부동 지역의 제27연대와 한국 제1사단에 대한 부괴 제1, 제13 사단이 전날 밤에 가해온 야간 공격이 치열했기 때문에 워커 장군은 마지막까지 밀양에 대기시켜 놓았던 미 제23연대이 주력을 다부동으로 추진시켜 미 제27연대의 후방에다 배치하여 방어종심을 증가시켰다.
8월 21-23일
21일에서 23일까지 다부동의 제27연대에 대한 북괴 제1, 제13 사단의 야간공격이 집요하게 계속되고 있었는데 24일, 미 제27연대는 북괴군의 여섯번째 야간공격을 격퇴시킴으로써 다부동 전이ㅡ 전투도 결말이 난 것 같았다.
24일 이후 전전선은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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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지도에서 한국군 제1사단의 정면을 뚫고 북한군이 다부동까지 진출한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한국군 제1사단은 뚫렸고 당시 마이켈리스 제27연대장은 백선엽을 강력하게 질책한다. 그에 관한 내용은 여기에서는 생략하겠다.
아래의 전황지도는 한국전쟁이 종료된 이후 영국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만든 것이다. 지금까지 전황지도 중에서 가장 잘 그린 것같다.
할일이 많은데 아직 백선엽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진실을 사라지지 않는다.
백선엽은 당시의 사단장급 지휘관 중에서 가장 무능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정식적인 군사전문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고 중대급 이상의 정규전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가 잘한 것이라고는 빨치산 토벌같은 작전이다. 그것이야 만주에서 독립군 토벌작전을 수없이 한 경험 때문일 것이다.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은 여전히 백선엽을 전쟁영웅으로 떠받든다. 그것은 그들이 전쟁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성을 해야 한다. 그리고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부끄러워하지 않고 반성도 하지 않는다. 나는 3군사관학교 통합에는 반대한다. 그러나 육사를 폐지하고 새롭게 장교양성과정을 만들자고 한다면 찬성한다. 이미 현재의 육군사관학교는 엘리뜨 군사전문가를 만드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군대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장군이 필요하다. 엘리뜨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엘리뜨 군인이 없으면 군대는 전쟁에서 진다. 그것은 만고 불변의 진리이다. 군대에서 천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클라우제비츠가 한 말이다.
백선엽을 떠받드는 것은 무능력자를 천재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서도 위대한 군인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백선엽이 너무 오래살아 한국전쟁을 왜곡하는 바람에 뛰어난 역할을 했던 군인들은 모두 잊혀지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다부동 전투는 백선엽의 제1사단이 잘못해서 발생했고, 미제27연대 마이켈리스 대령의 뛰어난 전투지휘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다. 백선엽은 사실 다부동 전투의 잘못에는 관련이 있지만 승리에는 별로 관련이 없다.
백선엽은 남의 승리를 도둑질했다.
흔히들 말하는 낙동강 돌출부는 낙동강 서남부의 영산지역을 말한다. 지금은 마치 백선엽의 제1사단이 있던 왜관지역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IMG_0909.JPG](https://cdn.steemitimages.com/DQmUvTzhiZCUBvuUThY9AxYVNgw8gKAgqd1ECvuFyV7C2JD/IMG_0909.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