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맛

in #life6 years ago (edited)

평화로운 저녁시간이다.
오랫만에 틀어놓은 클래식 라디오 방송이 해질녘 넉넉한 여유로움을 더한다. 오늘은 부엌 창가 쪽에서 바라다 보이는 노을 빛을 받으며 저녁식사를 하였다. 매일 매일의 날씨와 기온, 하늘이 다르듯이 해지는 풍경도 매번 다르다. 붉게 물드는 노을을 만나는 일은 더 귀하다.
오늘은 촉촉히 물이 베인 도화지에 빛나는 노랑과 붉은 붓을 찍어 그은 듯, 부드럽게 하늘이 노을 빛으로 물들며 혜성이 나아가듯 저녁 해가 황홀하게 지고 있다. 저녁밥 한 수저에 노을 풍경 한 수저 먹고, 보고 했다.

어제 시원하게 하루 종일, 밤새 쏟아져 내리는 여름 장마 비.
정말 오랫만이었다. 쏴아- 하고 소낙비 같은 시원스런 세찬 비... 그렇게 하루 내리고 오늘은 하늘도 공기도 참 맑다.
오후에 내리 쪼이는 햇살 속을 산책하며 더운 열기를 받으며 여름의 맛을 느낀다.
직사광선의 따가움과 나무 그늘에서의 쉼. 강하게 내리 쪼이는 햇빛에 땅도 땀을 내는건지... 여름은 땅의 열기를 받으며 유독 땅냄새, 풀냄새가 짙다. 그리고 사람냄새.
이 곳 아파트 정원에 여름이라 꽃도 시원한 색으로 피는 건지 파란 수국이 한 창 피어있다. 그리고 넓은 드레스를 입은 고개를 떨군 공주님 같은 연보라 꽃들도 은은하게 피어 땅냄새, 흙내음 가운데 향기로운 여름 꽃향기가 섞여 들어올 때 참 신선하다. 한걸음 한걸음 걸으며 나무 그늘과 햇살 속을 번갈아 걷다... 어디에서 부턴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결에 그간의 열기가 싹 씻긴다.

"어떻게든... 고된 하루가 밤 바람의 시원함으로 씻기는 순간.
저기서부터 불어오는 살랑 바람이 내 손 끝에 놀다 갈 때
날아오를 것만 같은 이 사뿐한 마음
보이지 않지만 내 삶을, 지금을 나를 바꾸어 놓는.. 이것은
어떻게 표현할까. "

_나의 기쁨 중에서

여름이 오기 시작하면 유독 먹고싶고 입맛을 돋우는 반찬이 있다.
요즘은 뭐가 제철인지도 분간이 안가지만... 그 옛날 시골 어릴 때 먹던 입맛인지 "오이지 무침"을 무척 좋아한다. 특히 엄마가 꼭 짜 버무린 오이지 무침은 침이 고이게 한다. 최고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세상의 모든 최고의 음식은 어머니표라고 하겠지만.
요즘 여름이 들어서 다행히 동네 절인 오이를 파는 곳이 있어 사다가 우리 큰 언니의 솜씨로 오이지 무침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엄마표 다음으로 최고인 우리 큰 언니의 솜씨로 여름의 맛을 알아가며 여름을 맛나게 나고 있다.

새콤달콤매콤...오이지 무침에
보라색 가지볶음,
고소한 우엉조림에
상큼발랄 무생채, 오이피클,
싱싱한 상추 쌈채소... 오이, 풋고추에
고추장 팍-
찍어 먹는 맛!
그리고 볶아도 부쳐도 끓여도 다 맛있는 호박과 감자!

지난 어린 시절... 저녁 준비 할 때쯤 엄마가 호박하나 따오라고, 파 뽑아오라는 심부름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신선한 제철 채소들을 먹고 자란건가 싶다. 집 앞 평상에서 어둑어둑 해질 때 모여앉아 먹던 저녁 밥상이 생각난다. 늦게까지 논일, 밭일 하시고 들어오셔서 어머니는 식구들 저녁 상까지 차리시고...얼마나 고된 시절이셨을까. 온 식구들이 호박잎 푹 담궈 같이 먹던 된장찌게도 생각나고, 평상에 불던 더위를 식혀주던 저녁바람도 생각나고... 내 종아리에 달려들던 모기도 탁 때리던 생각이 나는 저녁이다.

어머니, 아버지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이 햇빛과 비와 바람과 땅의 자양분으로 자란 이 여름의 맛을 온전히 누리매 감사드리고,
땀 흘리며 가꿔주신 손길들... 온전히 이 밥상에서 만나기까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여 준 이름 모를 손길들에 감사드리며... 밀리고 밀린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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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다 읽고 나니 나도 집안 한 구석에 해가 지는 걸 보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뒹글고 싶네요. 석양을 보며 식사와 가족과 사람에 대한 감사가 저를 무장해제시켰나봐요. 난 안먹어도 되고 그냥 쇼파에 벌러덩 누워서 발만 까닥거리며 쉬고 싶어요.
한참을 쉬고 나서 엄마 된장이 있는 밥을 먹고 싶네요. 구수하고 매콤한 냄새가 내 영혼을 취하게 할꺼예요. 덕분에 정신이 쉬었네요.
감사합니다.

주말인데 오나무님 잘 쉬고 계신가요?:) 쇼파에 벌러덩 누워 리모콘 막 돌리며 그야말로 뇌를 한쪽에 꺼내놓고.. 멍 때리는 휴식이 생각나네요 이 곳에서 조금 쉬셨다니 넘 기쁘구요 비오는 주말인데 편안한 주말 보내시길 바래요 감사합니다~

온 식구들이 호박잎 푹 담궈 같이 먹던 된장찌게도 생각나고

이거 좋아요^^

저희가 4남매에 가족이 많은 편이였어요.. 동그란 상에 다모여 붙어앉아 식사를 했었죠 :)
댓글 감사드리고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화분의 파 질라다 라면에 넣어먹던 생각이 났어요.

아... 라면 땡기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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