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휴대폰 선물’ 거부한 최초 시의원, 역경 딛고 의회로 돌아오다

in #kr6 years ago

[인터뷰] 내란음모 조작 사건 극복하고 주민 지지 이끌어 낸 윤경선 당선인

“아이고,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다 도와주신 덕분이에요.”

민중당 윤경선(53) 수원시의원 당선인이 21일 그가 거주하는 수원 금곡동 LG빌리지를 찾아간 기자를 50m 정도 마중 나간 자리에서 만난 7명의 주민들에게 모두 축하 인사를 받았다. 윤 당선인을 마주친 주민들의 표정은 환했다. 그는 “당선이 확정되고 1500통의 축하 문자, 카톡(카카오톡)을 받았다”며 “일일이 답장을 하느라 당선 이후 3일 동안 다 합해서 8시간 정도 잤다. 선거 운동 기간보다 더 바빴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아파트) 3, 4단지에서 51% 지지율이 나왔다”며 “제가 사는 동네에서 득표가 많이 나온 게 가장 좋다”고 했다.

윤 당선인은 2인 선거구인 수원시마선거구(금곡·입북·당수동)에서 10,028표(32.6%)를 득표해 12,400표(40.28%)를 받은 더불어민주당 조미옥 후보와 함께 당선했다. 6,080표와 2,273표를 받은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후보의 표를 다 합해도 윤 당선인에 미치지 못할 정도의 큰 차이였다. 민중당의 경우 후보자들의 TV토론 참여가 원천 봉쇄되고 언론의 주목도 거의 받지 못하는 등 열악한 상황에서 선거를 치렀는데, 이 상황에서도 윤 당선인이 의미 있는 지지를 받은 셈이다. 윤 당선인은 “당선하고 싶은 제 간절함과 당선을 시키고 싶은 주민들의 간절함이 통했다”고 말했다.

삼성 휴대폰 선물, 외유 해외연수, 의정비 인상 반대하다 보니 어느새 ‘왕따’

윤 당선인의 삶은 비교적 간단하게 4글자로 정리된다. 한결같다. 지난 1983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86년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서 야학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를 바꾸는 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야학에서 만났던 노동자들을 잊지 못하던 그는 서울 성수여중 교사직을 그만두고 24살 나이에 수원 필립스전자에 입사하게 된다. 삼성전자에도 입사해 노조를 결성하고 싶었지만, 대학교 졸업 학력을 감춘 위장취업자를 가려내는 회사 분위기 탓에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기업에게 위장취업자는 회사의 이익을 사업주 대신 노동자에게 돌려주고자 현장에 투신한 불온세력일 뿐이었다. 그는 2004년 “노조 활동하면서 열심히 투쟁해도 정치가 변하지 않으니 현실이 바뀌지 않더라”며 정치권(민주노동당 입당)에 발을 들여놓게 됐고 2006년 첫 당선을 했다.

정치인으로서의 삶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원칙을 지킬수록 동료 의원들 사이에서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됐다. 지난 2006년 그가 시의원이 된 직후 동료 의원 35명과 삼성전자 수원공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삼성전자는 의원들에게 당시로선 고가인 54만 원짜리 최신형 휴대폰을 36명 전원에게 선물했다. 총가격이 1,944만 원이었다. 삼성은 관행이라고 설명했다. 이때 처음으로 휴대폰을 거부한 사람이 윤 당선인이었다. 그는 “제가 단순해서 ‘비싼 건 뇌물이다.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며 “동료 의원들이 ‘너만 깨끗하냐’고 하면서 나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동료 의원들의 반응에 당황했다”고 회상했다. 윤 당선인이 나서면서 삼성 측의 휴대폰 선물은 사회적인 문제로 떠올랐고, 시의회는 휴대폰을 전량 삼성전자에 반납했다.

윤 당선인은 휴대폰 거부를 계기로 시의회에서 왕따가 됐지만 주눅 들진 않았다. 이듬해에는 “시의원은 돈(을 바라보는 것)보다 봉사자가 돼야 한다”며 의정비 인상 안건 상정을 반대했다. 참석한 32명의 시의원 중 인상을 반대한 의원은 이번에도 윤 당선인이 유일했다. 온천욕, 양털깎이 쇼 관람 일정이 포함된 외유성 해외 연수도 “시민 혈세 낭비”라며 전면 거부했다.

내란음모 조작 사건도 극복한 ‘민원 해결사’

지난 2013년에는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이 찾아왔다. 국정원은 프락치를 동원해 민주노동당의 후신인 통합진보당 경기도당의 5월 12일 강연 내용을 입수, 400개가 넘는 단어를 왜곡·조작해 내란음모 사건을 터뜨렸다. 2012년 대선 댓글 조작이 드러나면서 박근혜 정권의 정당성에 구멍이 생긴 직후였다. 전년도 부정경선 논란이 해소되지 않으면서 진보진영 사이에서도 입지가 좁아진 진보당을 겨누는 공작이었다. 이상호 수원진보연대 고문 등 2명의 이 지역 활동가가 구속되면서 수원 지역은 직격탄을 맞았다.

윤 당선인은 “진보적인 사람들조차도 (진보당원을) 배제하는 등 가장 힘든 시기였다”며 “제가 활동하는 인터넷 카페에서도 제 이름이나 사진을 빼 달라고 했고, 평소 친했던 이들도 친한 척 안 하거나 ‘정치인 윤경선은 끝났다’고 조롱했다”고 회상했다.

인생의 묘미는 전화위복인 것일까. 이때부터 윤 당선인의 진가는 톡톡히 드러났다. 바로 주민들의 뜻을 실현하는 ‘민원 해결사’로서 더 적극적으로 다가갔던 것이다.

윤 당선인은 왕따를 당하던 의원 시절부터 주민 현안 해결에 집중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신도시인 지역의 버스 노선 연장을 위해 자가용을 버리고 6개월간 버스를 타고 다니며 불편사항을 조사할 정도로 열성이었다. 수시로 시청 대중교통과를 찾았고, 담당 공무원은 “윤경선한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결국 노선 연장은 관철됐다. 우회전 차선 확보 등 도로 정비부터 복합 문화공간·수영장 유치 등 많은 정책이 그의 손을 거쳐 이뤄졌다.

의원직을 그만두고서도 주민들 민원 해결은 계속됐다. 그는 지난 2010년 지방선거에서 58표 차로 낙선하고도 ‘수원 호매실고등학교 조기 개교’ 등 주민들과 한 약속을 지키고자 교육청을 찾아다니며 예산을 확보했다. 상하수도 기반시설 문제로 조기 개교에 어려움이 생기자 현역 의원을 만나 설득했고, 부지를 최종 확정할 수 있었다.

지난 2016년 겨울, 윤 당선인은 LG빌리지 입주자 대표회의 회장 선거에 출마해 72%의 득표로 당선했다. 3,234세대가 거주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이끌어 낸 것이다. 윤 당선인은 “주민들이 도로 차선 그리기, 화장장 부지 이전, 쓰레기 치우는 문제, 눈 치우기, 과밀학급 문제, 휴대폰 안 터지는 문제, 도로 턱, 비 오면 비탈면 무너지는 것, 일하고 월급 못 받는 것, 퇴직금 문제 등 저를 만나면 다 얘기한다”며 “어렵고 힘들 때, 일이 안 풀렸을 때 저를 찾아주는 것이 고마웠다”고 말했다.

윤 당선인은 “예전에는 다들 안타까우니까 저에게 당을 바꾸라거나 무소속 후보로 나오라는 얘기를 했다”며 “그러나 이번에는 주민들 사이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시의원이 돼야 한다’는 의지가 컸다. 꾸준히 한결같이 산 것이 당선의 비결”이라고 했다.

다음은 주요 일문일답이다.

  • 수원지역은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자도 있고, 박근혜 정부 때 해산된 통합진보당 후신인 민중당 입장에서 선거를 치르기 어려웠던 환경으로 알고 있다. 10,000만 표를 넘게 획득해 2인 선거구에서 당선했는데, 비결은 무엇인가.

“저도 제가 왜 당선이 됐고, 표를 많이 받았을까 생각을 해봤다. 재수 없게 들릴 수 있겠지만, 꾸준히 한결같이 살았다는 것 때문이지 않을까. 2016년부터 동네에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민원이나 화장장 문제 같은 현안을 꾸준히 해결하고 싸워왔다.

국회의원과 달리 시의원의 경우 시대를 선도하는 공약은 많지 않다. 주민들 민원, 주민들을 만나며 들은 얘기를 정책에 반영했다. 정책 설문조사나 주민 인터뷰도 했다. 선거 운동 기간 이전에도 100개 정도 단체 사람들을 만났던 것 같다.”

  • 선거운동은 누구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 당선 이외에 다른 목표도 있었는가.

“주민들을 만나는 과정은 함께 일할 사람을 찾는 과정이다. 시의원이 돼 함께 일할 사람들이나 단체 등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선거운동을 함께 해준 사람이 500명 정도 된다. 지역의 주요한 여론주도층, 선거에 관심 있는 분들을 만나는 것은 최우선이었다. 그분들은 제가 왜 당선이 돼야 하는지를 주변에 알리는 등 적극적으로 함께 했다. 앞으로 이 분들과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기 위한 풀뿌리 자치운동 모임을 만들고 싶다. 주민들의 힘이 커져야지만 민주주의가 발현될 수 있다. 선거 운동 목표는 당연히 당선이었다.”

  • 주민들이 선거운동을 함께 해준 것이 인상적이다. 선거운동 기간 감동적이거나 기억에 남았던 일화가 있으면 소개를 해달라.

“매 순간순간이 감동이었다. 우리 지역에서 10년 동안 저를 지지해주신 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처음으로 저에게 ‘정보과 형사들이 저를 도와주지 말라고 했었다’고 고백을 하시더라. 그러면서 ‘이번엔 꼭 돼라’고 하셨다.

무엇보다 주민들이 제 당선을 간절히 원했다. 제가 2010년 지방선거에서 58표 차로 떨어진 적이 있다. ‘우리 동네를 위해 일할 사람이 시의원이 돼야 하는데, 안타깝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분들과 제 마음이 하나가 된 것 같다. 예전에는 당을 바꾸거나 무소속 후보로 나오라는 얘기를 많이 했다. 다들 안타까우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일을 하는 사람이 시의원이 돼야 한다’는 의지가 컸다. ‘이번엔 꼭 될 것이다’는 격려가 주문처럼 들렸다.”

  • 주민들 사이에서 민중당에 대한 경계가 없었나. 내란음모 사건이 발생한 뒤인 2014년에 21.9%의 득표율로 낙선을 했는데, 그때와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하다.

“주민들은 이미 경계를 뛰어넘었다. 당에 대한 호감도 높아졌다. 우리 동네에서는 저를 뽑은 만 명 중 1,000명이 넘는 분이 민중당을 뽑고 응원해줬다. 너무 기뻤다.

당을 핸디캡으로 보고 있는 주민들은 ‘당을 보고 뽑나. 사람을 보고 뽑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저를 주변에 소개했다. 예전엔 종북정당 논리가 컸지만 이번엔 ‘윤경선 대세론’이 일찍 만들어졌다. 이미 4월부터 ‘윤경선이 당선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새로 이사 온 분들은 민중당을 아예 쳐다보지 않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려고 했다.”

  • 주민들은 당선인의 어떤 모습을 보고 호응을 한 것 같나.

“앞서 말했지만 꾸준함이었다. 저와 함께 명함 돌리는 사람이 4명이었다. 제 남편이랑 딸 2명이 구석구석 다니면서 주민들을 만났다. 딸이 하루에 38,000여 걸음을 걸었다. 입북동이라는 동네에서는 후보가 민중당 밖에 없냐고 할 정도였다. 다른 정당은 보도가 되니까 주민들에게 익숙하지만 우린 그렇지 않다. 10번을 만나야 저를 찍어주는 것 같다. 간 데 또 갔다. 명함을 얼마나 뿌렸는지 모르겠다. 유권자(48,844명)의 2배 이상 명함을 뿌린 것 같다. 양질 전환 아니겠는가.”

  • 선거운동 기간 전에도 지역에서 다양하게 주민들을 만났을 것 같다. 당선을 위해 그간 어떤 활동들을 해왔는지 설명해달라.

“지역아동센터도 했고, 동네 크고 작은 민원을 함께 해결했다. 제가 시의원이 아니더라도 주민들이 저를 찾아왔다. 제가 시의원을 해 공무원들을 잘 알고 있으니 저에게 자주 민원을 얘기했다. 도로 차선 그리기, 차선 확보, 수영장 건립, 화장장 부지 이전, 버스 노선 문제, 쓰레기 치우는 문제, 눈 치우기, 과밀학급. 수인선 지하화. 휴대폰 안 터지는 문제, 도로 턱, 비 오면 비탈면 무너지는 것 등 민원이 있을 때 저를 만나 얘기한다. 근로기준법 등 노무사나 변호사에게 할 얘기도 저에게 한다. 월급을 제대로 못 받았거나 함바집에서 밥값 못 받은 얘기, 퇴직금 문제 등도 저에게 얘기한다. 주민들이 고맙게도 어렵고 힘들 때, 일이 안 풀렸을 때 저를 찾아줬다.

이외에도 마을 공동체 행사, 학교 운영자 모임, 향우회 등 지역 모임을 열심히 갔다. 가서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냥 조용히 있다가 오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갔다. 제가 가톨릭 신자다. 선거 운동 기간 중에도 성당 구역 모임을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기본에 충실히 하는 것, 그런 걸 본다.”

  • 민중당의 경우 기초의원에 11명 당선되는 등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선거였다.

“이번 선거 쉽지 않다는 것은 이미 예측됐던 일이다. 우리는 당 지지율이 없지 않나. 민주노동당 지지율 10%, 통합진보당 지지율 5% 등 비빌 언덕 없이 선거를 해야 하는 데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먼저 준비하고 힘을 쏟는 수밖에 없다. 저는 작년 1월부터 1년 6개월 이상 선거를 준비했다. 작년에 가족회의를 했다. ‘이번에 어려운 선거다. 가족들도 선거에 나서야 한다’고 얘기했고, 일찌감치 결심하고 달라붙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동지들이 그런 결심을 못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의원을 했던 분들이 먼저 나서야 했는데 출마 안 한 분들이 많다. 어려움이 예측됐던 선거에서 결심하고, 뚫고 나가려는 마음이 부족했다. 3개월 선거 준비한다고 유의미한 결과 나오길 기대하는 건 공짜를 바라는 일이다. 계속 많이 만나야 한다. 많이 만나야지만 깊숙하게 만날 수 있다. 이번 선거 결과는 지난 10년 활동의 결과다.”

  • 수원 지역은 민중당의 활동이 많았던 지역이다. 내란음모 사건이나 박근혜 정권의 종북몰이로 지역 활동이 많이 위축되진 않았나. 지역 내 진보진영 안에서도 힘들었던 일이 많았을 것 같다.

“2012년 통합진보당 경선 논란이 있었고, 2013년 내란음모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정말 어려웠다. 많이 숨었다. 외부활동에 덜 나가게 되고, 사람들도 덜 만났다.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조차도 왕따, 배제를 했다. 제가 활동하는 인터넷 카페에서 이름이나 사진을 사용하지 말라는 얘기도 나왔다. 친한 사람도 눈길을 피하며 친한 척을 안 했다. 함부로 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치인 윤경선은 이제 끝났다’고 조롱하고 폄하하고 공격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 극복 계기는 무엇인가.

“어려울수록 더 많이 만났다. 우리가 잘못한 게 없지 않나. 진실은 밝혀지고, 정의가 세워질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 동네에선 ‘샤이(shy) 윤경선’이라는 말이 있다. 40대 초반의 한 분은 저에게 ‘배제 대상인데 얘기하다 보니 좋은 사람이더라’는 말도 했다. 저의 의정활동이나 그간 활동 때문에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저를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말해 준다.

직접적인 극복 계기는 2016년 때 있었다. 아파트 관리소장이 화장장 이전을 요구하는 주민들 30여 명을 고소하는 일이 있었다. 비리는 차라리 참을 수 있지만, 주민들을 건드리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대부분이 아이 엄마들이었다. 경찰서에 가보지 않은 30대 엄마들에게 출두장을 보내는데, 누군가의 가정을 파괴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관리소를 찾아가 싸웠다.

그해 입주자 대표회의 회장 선거에 나갔다. 시의원 출마는 결심을 했는데, 과연 아파트 대표 선거에 나가서 당선할 수 있을지 고민이 있었다. 저에 대한 공격이 많을 때였다. 주민들 중에서도 ‘통진당 사람이 대표인 것이 부담된다’는 의견이 있었고, 나도 그게 걱정이 됐다. 반대로 주민들을 믿고 해보자는 얘기를 해주는 분들도 있었다. ‘샤이 윤경선’을 믿고 출마를 했다.

실제 ‘종북 빨갱이’, ‘아파트 재산이 당으로 들어간다’와 같은 얘기가 아파트 내 돌았고 부착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선거를 하니 투표를 한 세대 중 73%가 저를 찍었다. 1300세대가 저를 믿어준 것이다. 공무원들도 제가 대단지 아파트에서 당선되는 걸 보고 너무 놀라워했다.

지역 운동가들도 저를 응원해줬다. 수원에서 한 목사님은 내란음모 사건이 터진 이후에 단체 예배 시간에 저에게 간증하라고 하시더니 ‘예수님도 내란 범이었다. 예수님이 당했던 것과 똑같이 이석기 의원이 탄압·핍박받고 있다’고 해줬다. 젊은 당원들은 더 열심히 몸으로 활동했고, 지역에서도 위상이 조금씩 회복됐다.

어느 주민이 ‘다른 당 입당할 생각 없느냐’고 묻더라. 저는 제 꿈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고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그것을 극복해야 바꿀 수 있다고 답했다. 착하고 열심히 일한 사람이 잘살고, 억울한 일 없는 세상을 꿈꾼다. 큰 꿈을 꾸는데 힘들지 않으면 이상한 것 아니겠는가.

저는 이번 선거에서 희망을 봤다. ‘자유한국당 아웃’ 구호도 먹혔고 사람을 보고 뽑자는 인물론도 먹혔다. 시대가 변한 것이 정말 느껴진다. 우리가 이 기회를 타야 한다. 대중 속에 뿌리 박히면 된다.”

  • 최근 재판 거래 등 박근혜 정권 때 청와대와 사법부에서 내란음모 사건이나 통합진보당 해산에 부당하게 개입한 일이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일단 일반 주민들은 내용을 잘 모른다. 그럼에도 이석기 의원을 비롯해 내란음모 사건에 관련된 분들이 사면·복권돼야 이 모든 게 해결된다. 아직까지 우리는 내란 범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최근에 통일운동을 해온 인사들의 방북 신청이 불허됐고, 전교조도 여전히 법외노조다. 만만치 않다. 결코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아야 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좋은 기회일수록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정세가 변하는 시점에 기회는 온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계속했기 때문에 저는 그 기회를 잡았고, 다른 당원들도 그래야 한다. 지역 현안도 더 열심히 해결하고 통일운동에도 나서고 더 적극적으로 하자.”

  • 노동운동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떻게 정치에 입문하게 됐고, 시의원에 도전하게 됐나.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열심히 투쟁했지만 정치가 바뀌지 않으니 현실이 변하지 않더라. 2004년 민주노동당에 가입해 2006년 비례 후보로 당선됐다.”

  • 과거 시의회에서 삼성 휴대폰 선물을 반납하거나 의정비 인상에 홀로 반대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부담은 없었나.

“제가 단순하다.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 비싼 걸 받으면 뇌물이라고 생각했다. 과일상자 하나도 선물로 받지 않았다. 앞날에 대한 예측은 없었다. 오히려 동료 의원들의 반응에 당황했다. ‘너만 깨끗하냐’고 왕따 당했다. 싸늘했다. 저와 얘기를 하지 않았다.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 회장에 당선된 이후에도 선물을 받지 않았다. 소고기 선물이 왔는데 돌려보냈다. 공무원들은 오히려 이런 저를 좋아하더라. 마을 지지자 중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데, 나중에 ‘왜 도와주냐’고 물었더니 ‘제자가 수원시청 공무원인데 윤경선 같은 시의원 한 명은 있어야 한다’고 해서 도와준다고 하더라. 자녀가 시청 공무원인데 저보고 꼭 당선돼야 한다고 했다는 분도 있었다.”

  • 시의원 시절 못했던 일들에 대한 아쉬움도 있을 것 같다. 꼭 실현시키고 싶은 정책이 있는가.

“대중교통 체계를 바로잡고 싶다. 지방자치 단체와 버스 회사가 유착해 주민들을 위한 행정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버스 노선의 경우 동수원과 서수원 격차도 심하다. 제가 있는 곳은 서울 가는 버스 노선이 사당역으로 가는 것밖에 없다. 전철도 아직 안 들어왔다. 동수원과 서수원 격차를 해소하고 싶다. 시에서부터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나서고도 싶다. 공동주택에 대한 지원이나 어린이 놀이터 안전·위생 문제도 시에서 책임질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안전이나 위생 문제는 민간에만 맡겨놓으면 안 된다.

지역구 의원이기 때문에 지역을 대변하는 역할을 확실히 하겠다. 주민들과 함께하는 의정활동을 하겠다. 주민과의 간담회도 자주 열겠다. 주민 목소리를 많이 듣는 것뿐만 아니라 주민들을 우리 동네 문제 해결 주체로 세우는 의정활동을 할 것이다. 주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는 데 적극적인 모습 자체가 희망이다.

개인적으론 방북을 해보고 싶다. 과거에 동료 시의원들과 북한 개성에 갈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저는 시의회 일을 하느라 가지 않았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방북이 끊길 줄 누가 알았나. 기회가 오면 꼭 가고 싶다.”

인터뷰 끝나고 함께 간 식당에서 사장과 직원은 모두 윤 당선인을 반겼다. “지역에도 사무실 내야지?” 등 관심도 구체적이었다. 한 직원은 “물김치가 맛있다”는 윤 당선인의 말에 종이에 레시피를 적어 제조법을 두 번이나 알려줬다. 식당을 나서자 한 상가에서 일하던 주민이 큰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인사를 했다. 주민들의 환영을 받는 윤 당선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취재 과정의 쏠쏠한 재미였다. “대중 속에 뿌리 박히면 된다”고 강조한 그가 얼마나 구석구석 지역을 누비고 다녔을지 주민들의 표정에서 어렴풋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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