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커피잔

in #kr6 years ago

L의 소개로 알게 되어 (지금은 사라진)본점 시절부터 드나들던 단골 카페가 있었다.

지금과 사뭇 달랐던 분위기의 그 본점은 들어서자마자 아주 장인의 향기를 풍겼는데, 그곳에는 분위기 뿐만 아니라 정말로 커피 장인인 장신의 커피쟁이 M이 있었다.

그 커피숍을 찾을 때마다 늘 열에 여덟 M은 손님 응대와 동시에 여러가지 잔을 바에 늘어놓고 테이스팅 중이었고, 나머지 이 는 커피콩을 포장하거나 정리, 진열하던 중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M과 L은 서로 이름은 모른 채, 하지만 이미 단골이었던 L은 자주 그 테이스팅에 참여했다. 그 덕을 보아 나도 여러가지 커피 맛을 볼 수 있었고, 자연히 M과 통성명을 하고 대화를 나누며 우리 셋은 친구가 되었다.

M이 커피를 다루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그 자체가 예술이었다. (‘행위’예술이라 제한 짓지 않고 싶다, 그 결과물인 커피 또한 예술이었기 때문에!) 커피에 집중하는 M의 눈빛은 지금 이 세상에 그와 그 앞의 커피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듯 해 나는 감탄했고, M이 참 좋았다. (나는 살짝 오타쿠-타쿠 인 경향이 있어... 커피타쿠인 M의 타쿠가 된 것.)

특히 뛰어난 커피 전문가이면서도 결코 상대방에게 으스대거나 가르치려드는 기색 전혀 없이, 순수한 낯으로 상대의 눈높이에서 커피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는 M과의 대화가 나도 즐거웠다. 내가 한국에 갈 때마다 커피를 선물해주거나 꼭 인삿말을 전하는 마음 따뜻한 친구이기도 했다.
사업 규모가 커지고 본점이 사라진 후에도, M이 있는 지점을 자주 찾으며 그의 커피를 향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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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얼마 전부터 M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바빠서겠지 라고 넘기기엔 M이 꽤 오랫동안 보이질 않았다. M에게 연락해도 답이 없어, 그 지점의 다른 친구 J에게 M의 소식을 물어보니, 그가 사고를 당해 더이상 커피를 하지 않는다고... 나와 L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더랬다.
나는 아마도 M이 더이상 커피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에게 더 집요하게 연락하지 않고 있다.

M의 커피 은퇴는 현 인류의 손실이라 생각하기도 물론 하지만, 그 친구가 그렇게 좋아하고 행복해했던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됐단 점이 더욱 안타까웠다. 자세한 속사정은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는 아마 생을 잃은 듯한 기분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보았다.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만 할 순 없다는 슬픈 사실을, M을 떠올리며 또 곱씹는다.
또 한편으론, 살아가는 도중에는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나기 마련이기에 경기가 끝났을 때 많은 사람들 앞 단상 위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사람만이 반드시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나단 의미는 아니라고, M을 비추어 재확인한다.
그러니, 나도 지금 이 순간의 내 전부를 잃게 되지만 그게 내 삶이 실패한다는 의미는 아니며, 마찬가지로 어찌어찌 내가 어떤 일을 이루게 된다 하더라도 그게 나 혼자 잘나서 된 것만이 아님을 꼭 꼭 기억하면서... 담담히 겸허히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자고 마음을 다져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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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길어요~ 어차피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고.. 앞으로 또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화이팅 하시죠^^ 결국 모든 일은.. 순리대로.. 흘러가게 되더라구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hwangmadam 님 말씀대로 정말 어떤 일이든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고, 또 그만한 이유가 있겠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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