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혈'에서 '온혈'로 중앙대학교 새내기 딸을 보며

in #kr3 years ago

'의혈'에서 '온혈'로 중앙대학교 새내기 딸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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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앞에 특정한 수식어를 붙이는 경향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모르겠는데 내 생각엔 박정희 이후 30년 대한민국을 지배한 군사 문화의 자연스런 침투다. 80년대 군대 갔다 온 사람은 부대 앞에 촌스런(?) 수식어를 붙여 고래고래 고함쳐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필승 연대니 무적 중대니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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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고대’니 ‘애국한양’이니 하는 호칭들은 결국 거기에서 나왔다고 본다. 그리고 9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FM’은 신병 데리고 노는 신고식과 85% 이상의 일치도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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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문화라고 나쁜 건 아니고 이 포스팅의 주제도 아니니 넘어가자. 그런데 그 호칭 가운데 가장 특이한 이름이라면 단연 중앙대학교를 들 수 있다. 집회에서 중앙대학교 친구들이 등장하면 신입생들로부터 항상 비슷한 질문이 나왔다. “쟤네들은 어느 학교에요? 무섭다.” 대문짝 깃발에 시뻘건 붓으로 ‘의혈중앙’이라고 쓰고 나오니 무서울(?)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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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의 교훈은 ‘의에 죽고 참에 살자’다. 이 교훈이 가장 찬란하게 동시에 참혹하게 빛을 발했던 것은 역시 4.19 때였다. 한강 건너 흑석동에 있는 중앙대학교 학생들이 광화문에서 벌어지는 시위에 참석하려면 한강 도하 작전을 펼쳐야 했다. 한강다리라고는 한강대교 딱 하나만 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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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중앙대학생들은 임영신 총장의 만류를 무릅쓰고, 흑석고개와 한강다리를 막아서는 경찰과 소방차를 뚫고 한강 다리를 건넌다. 그리고 대학 가운데 최다 사망자 (6명)를 낸다. 서울대와 같은 수다. (서울대는 7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1명은 서울 사대부고생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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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 여학생들의 활약은 도드라진다. 4.19 유공자로 선정된 여성 5명 중 3명이 중앙대생이었다. 총탄이 난무하고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가는 시위 현장에서 중앙대생들은 서울 시내 대학 가운데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고 그 가운데에는 여학생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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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들은 태극기를 들고 경찰 앞에 나아갔다. “이 깃발에 총부리를 겨누는 자 반역자다.” 어지간한 경찰들도 총부리를 고수하지는 못했으리라. 하지만 역시 창의적인 경찰은 그럼 개머리판을 쓰겠다는 듯 개머리판으로 여학생들의 머리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의에 죽고 참에 살자’ 플래카드를 들고 선봉에서 시위에 나섰던 법대 여학생 서현무는 그렇게 곤죽이 되도록 맞은 후 2개월 뒤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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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교 행정학과 68학번으로 입학한 학생이 있었다. 그의 피도 어지간히 의로웠다. 그리고 대충 사는 거짓 삶에 익숙지 못했다. 그는 유신 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두 번이나 학교에서 쫓겨났다. 집이 넉넉한 것도 아니어서 그야말로 오갈데없는 넝마주이도 하고 포도밭에서 머슴살이도 했다고 하며 세월을 엮다가 1980년 학교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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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왔으나 봄같지 않았던 그해 1980년. 그는 후배들 수천명을 이끌고 흑석동 중앙대 캠퍼스를 떠나 한강다리를 건너 서울역으로 진격한다. “의혈이 한강 다리는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 고 그들은 한강을 보면서 되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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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지만 역사는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바뀌는 건 아니어서 1980년의 중앙대생 한강 도하 이후 역사는 어둡고 괴로운 쪽으로 흘렀다. 우리 현대사 최고의 빌런 전두환의 등장이었다. 당연히 행정학과 68학번, 12년 묵은 ‘배후 조종자’는 학교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그는 농민의 길을 택한다. 그가 백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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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좋은 세상이 와서 광주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됐지만 그는 “죽은 사람들도 있는데 살아남은 자가 무슨 공을 따지겠느냐”라며 손사래를 쳤다. 후배 운동권들이 무얼 하면 출세하고 어찌하면 국회의원이 될까 ‘짱구를 굴리는’ 동안, 우리 밀 살리기 운동에 앞장서고, 전국가톨릭농민회 부회장으로서 농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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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박근혜 대통령이 공약한 ‘쌀값 수매가를 가마당 17만원에서 21만원으로 올리겠다’는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민중대회 참가했다가 현장에서 물대포를 맞아 쓰러졌고 317일만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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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는 수많은 ‘의혈’이 필요했다. 그만큼 강퍅하고 힘있는 자들이 제멋대로 굴려 했고 악행을 저질렀기에 그에 맞서려면 ‘맨주먹 붉은 피’처럼 절실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 시기에 중앙대생들은 시뻘건 글씨로 ‘의혈’을 대문짝만하게 써붙인 깃발을 흔들며 스스로의 위용을 과시하며 자세를 가다듬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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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죽고 참에 사는 것은 이제나 저제나 쉬운 일이 아니고 평생 동안 교훈을 지키겨 산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아직 중앙대학교는 ‘의혈’의 이름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리고 딸아이가 그 ‘의혈’의 일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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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했고 역사가 다르다. 소심하고 이기적인 부모로서 나는 딸아이가 피끓는 젊음 시절에 그 ‘의혈’을 과시할 일이 가능한 없기를 바란다. 물론 본인의 결단과 선택에 따를 일이지만 1960년과 1980년과 1987년 겨울이 다시 되풀이되지는 않기를 희망하고, 그런 분노의 세월이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두 손을 모으는 것이다. 다만 이제 의혈의 일원이 되는 딸아이를 비롯한 그 동년배들이 의혈의 무게는 버린다 해도 차갑고 냉정한 시대, ‘온혈’(溫血)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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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불의에 맞선 의혈의 시대는 갔을지 모르나, 자기 이익 외에는 돌보는 것이 없고 공정을 빙자한 기득권 쟁취와 사수의 의지 밖에는 강렬할 것이 없는 시대는, 그리고 그런 냉기가 지배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따뜻하고 배부른 사람들의 천국과 부족하고 아쉬운 사람들의 지옥으로 갈라지게 마련이다. 한 공간에 있으나 섞이지 않고 서로 말은 통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천국과 지옥이란 사실상 그 자체로 지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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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생 부모 생활하면서 ‘태정태세문단세’ 식으로 외웠던 ‘대학 서열’을 다시금 떠올린다. 그 서열에 따라 목 매고 어느 지점에 있는지에 눈에 불을 켜고 자연스레 뭔가를 우러러보고 천연덕스레 뭔가를 내려다보게 되는 나 자신에 여러 번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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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학생이 되는 딸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겠다. 우러러보지도 말고 내려다보지도 말고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의식적으로라도 조금 더 따뜻한 ‘온혈’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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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따님의 입학을 축하드립니다~

의혈중앙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군요.
저도 의혈, 2학년 되는 제 딸도 저와 같은
문과대 의혈입니다.
'온혈'이란 이름도 멋지네요~

저도 의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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