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만두집 쇠고기탕면

in #kr6 years ago

2000년대가 막 열렸을 때 저는 <리얼코리아>라는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맛집을 소개하는 <그곳에 가면>이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좀 과장일지 몰라도 이 코너는 저녁 시간대 맛집 프로그램의 원조였다고 생각합니다. 편성 쪽에서 “왜 맛집 코너를 저녁에 하느냐.”면서 거부 반응을 보였으니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죠. 당시 방송 상식으로는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놓은 지역 특산물 음식상 앞에서 리포터가 와구와구 먹으면서 맛있다고 찬사를 연발하는 게 음식 프로그램이었고, 그건 아침 방송에나 어울리는 포맷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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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희는 컨셉이 다르다고 우겼습니다. “우리는 맛집을 소개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음식을 매개로 음식을 만드는 사람과 그 음식 먹으러 오는 사람들의 끈끈하고 진솔한 삶의 이야기다."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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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곳에 가면> 코너를 맡은 PD며 작가들은 악착같이 '사연이 있는 식당'들을 하염없이 찾아 나섰습니다. 또 음식 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생생한 삶의 소리들을 포착하려 발품과 말(言)품을 허다하게 팔았지요. 참으로 우직하고 순박하기 일쑤였던 (당시에는 협찬 방송은 상상도 못했던 때인지라) 우리의 주인공들은 (즉 식당 주인장들은) 판에 박은 듯 머리를 긁으며 이런 질문을 해 왔었습니다. "우리가 방송 꺼리가 돼요?" 한 감수성 예민한 PD는 역시 똑같은 질문을 해 온 주인장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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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이력이 역사고, 아저씨의 음식이 문화고, 아저씨의 마음이 사람을 움직입니다." ,

이 말을 한 PD는 지금 세상에 없습니다. 아쉽게도 먼저 세상을 떠난 그가 술자리에서 이 얘기를 했을 때 PD와 작가 모두 환호했습니다. 우와 맞어! 멋있어! 나도 써먹어야지! 우오 너 멋있다..... 등등 그러면서 크게 웃었습니다. 결코 우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통쾌해서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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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 보일까 꼭꼭 숨은 식당들, 희미한 소문을 따라 먼길 마다않고 찾아들었던 퀴퀴한 냄새 나는 맛집들, 최소 한 평짜리도 있었던 좁디좁은 식당들을 애써 찾아다녔던 이유를 '한 큐에' 꿰뚫어버리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너무나도 평범하기에 쉽게 흘러 보내는 우리의 일상, 그 속에 알알이 박혀 있는 별빛의 의미를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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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절판됐을 겁니다 이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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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선정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기준은 다름아닌 '역사'였습니다. 맛도 중요하고 손님 많은 것도 빼놓을 수 없으며 주인의 캐릭터도 무시못할 일이지만, 그 조건들 다 충족하지 않더라도 서울 시내에서 2-30년 역사를 지녔다는 곳이면 무조건 '콜!'이었지요. 서울 시내에서 2-30년 버텼다면 그 자체가 맛의 보증수표라고 보았고, 아무리 무뚝뚝한 주인장이라도 그 역사 속에 실린 사연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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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아무리 손님이 줄을 서고 번호표를 받아 대기하는 곳이고 그 사장님이 탤런트급의 끼를 가진 사람이라 해도 신장개업한지 석 달 된 곳이라면 그곳은 아이템 후보에 감히 끼어들 여지가 없었지요. 하지만 단 한 번, 아주 예외적으로 신장개업한지 석 달 된 중국집을 촬영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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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처음 그 아이템을 들고 왔을 때 저는 눈꼬리를 장비처럼 치켜뜨며 작가를 노려 보았습니다. “장난하나?” 그러나 작가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따박따박 PD의 노기를 진압해 나갔습니다. . 신장개업은 신장개업이로되 알짜배기 신장개업은 아니고, 종로 청진동 해장국 골목에서 수십년 장사를 하던 노부부가 10년쯤 전 가산을 총정리해서 홍콩으로 갔다가 무슨 연유인지 다시 한국에 돌아왔고, 그 아들까지 가세하여 가게를 열었다는 것이 그 설명의 골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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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입니다. http://nodelay.tistory.com/252 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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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 연남동에 위치한 가게를 찾았을때 부부는 만두를 빚는 중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만두와는 크기에서 재료까지 완연히 다른 중국식 만두는 그 집의 오랜 자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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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동에서 이 만두 제일로 유명했다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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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한 바깥 양반과 달리 화통한 성격에 중국인다운 왁자지껄한 말투에다가 생면부지의 방송사 카메라 앞에서 들뜰대로 들뜬 안주인이 자기 집 자랑에 포문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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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두 우리 중국 할머니들 전족 같다고 해서 발 만두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옛날 청진동에서 이거 먹을라고 사람들이 줄 섰어 해요. 한 번 먹어 볼래요? 만두 속을 몇 '다라이'를 해도 해 저물기 전에 다 나갔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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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해요 저거 해요 우리 사람... 하는 만화에서나 보던 '왕서방' 말투로, 청산리 벽계수로 이어지던 자랑의 물결이 그 방향을 살짝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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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들은 쇠고기탕면을 잘해요. 쇠고기탕면은 홍콩에서 자장면 같은 거. 알아해요?" 그러더니 그녀는 주방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중국어로 그 아들을 불러 냈습니다. 주방 밖으로 나온 아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모자지간이라고 하기엔 나이 차가 많지 않아 보입니다. 영문을 물으니 어머니 나이 열 여섯, 아버지 나이 열 아홉 때 시어머니가 중병이 들어 아들 장가가는 것을 보고 죽겠다 하여 일찍 결혼을 했더랍니다. 중국 시어머니나 한국 시어머니나 그 심정은 다르지 않구나 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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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블로거 소리산의 <길따라 맛따라> 사진입니다. 제가 찍었을 때 주인장과 아드님 사진이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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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의 중병 덕에 사춘기도 채 벗어나지 못하고 시집을 와야 했던 안주인에게 “그래도 어머님이 시집을 와 주셔서 시어머니는 편히 눈 감으셨겠어요.” 라고 인사치레를 했는데 제꺽 돌아오는 답에 그만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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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감으시긴요. 웬걸 나이 아흔 살까지 사시다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아 여자의 일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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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는 뜻밖에 명이 길었던(?) 시어머니 봉양하며 자식 넷을 기르며, 수십 년 동안 청진동에서 만두와 호빵 장사를 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한때는 4층 빌딩을 지을 정도로 융성했었다는데 왜 홍콩으로 떠났느냐고 물으니 지금까지 장강의 물줄기처럼 그 말의 흐름이 끊임이 없던 어머니, 홀연 말문을 닫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침묵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지금까지 얌전히 만두만 빚고있던 아버지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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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이다 뭐다 하는데 중국 사람이라고..... 너무 걸리는 게 많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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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캐묻진 않았지만 수십 년 터전을 팔아치우고 가재도구 짊어지고 홍콩으로 전 가족이 떠나 버릴 정도면 무언가 범상치 않은 사연이 있었겠지요. 화교들이 토지 소유나 매매 등 재산권 행사에 있어 심대한 제한을 받아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재개발에서 수십년 삶의 터전을 박차고 어디론가 떠날 정도로 섭섭한 일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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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또 다른 의문에 생각이 미칩니다. 대관절 그들은 왜 '걸리는 것 많은' 땅에 되돌아온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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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늙은 안주인은 머지않아 아까의 활기를 되찾았고 그 큰 목청으로 청진동 시절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해장국 골목 청진동에 얽힌 그녀의 추억은 편집에서 다 잘릴만큼, 필설로 옮기기 귀찮을만큼 많더군요. 그 이야기를 들어 주다가 얼핏 어떤 생각이 나서 카메라를 바짝 안주인에게 들이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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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리운 청진동 옛 친구들한테 한 마디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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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안주인은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똑바로 하고 옷깃을 여민 후 헛기침까지 크음 내뱉고는 난데없는 가게와 사람들의 이름을 줄줄이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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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담배가게 언니, 쌀 파는 김씨 아저씨, 돼지고기 좋은 거 골라 주던 철수씨, 나 시집왔을 때 많이 도와 줬던 연탄집 영이 언니, 미장원 최씨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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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일줄 모르는 그녀의 리스트 읊기를 적절하게 차단을 해야 한다 생각을 하면서도 저는 결국 기나긴 이름들을 듣고만 서 있었습니다. 수십 명의 이름은 족히 부르고서야 그녀는 목이 메어 인사를 전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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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돌아왔어요. 나 고향에 왔다구요. 언제 한 번 갈께요. 다들 잘 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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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으며 저는 왜 이 가족이 다시 돌아왔는지의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이곳은 실로 매정하지만 지우기 어려운 '고향'이었던 겁니다. 화교 동네 연남동답게 손님은 한국 사람 반 중국 사람 반이었습니다. '하오츠! (맛있다)'와 '맛 조타~~'가 번갈아 작은 홀을 울렸고 이 집 아들이 만두에 이은 비장의 무기로 낸다는, 얼큰하면서도 독특한 중국 향을 지닌 쇠고기탕면이 서울 한켠에 터잡고 살아가는 한중 양국 사람들의 젓가락을 사로잡았습니다. 쇠고기탕면 한 그릇을 든 채 일단 먹어 보고 일하라며 강권하던 노부인의 말을 저는 선명히 떠올리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 입에도 잘 맞을 거예요. 우리 나라 사람 쇠고기 국물 좋아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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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odelay.tistory.com/252 향미 우육탕면입니다.

그녀에게 '한국'은 평생 스며들지 못하는 외국이었지만 또 평생 세금을 내며 부모 봉양하고 아이들 길러낸 '우리나라'였습니다. 그녀의 엇갈림 속에는 그 어느 쪽에도 굳건히 발을 디디지 못한채 불안하게 서 있는 그녀 자신이 담겨 있는 듯 했습니다.

'한국 사람'과 '우리나라 사람'...... 왜 그 말이 그토록 제 가슴에 무겁게 내려앉았는지 모를 일입니다. 평생 한국 사람이 아니면서도 '우리나라' 사람으로 살았던 그녀들의 삶의 혓바늘이 거기에 돋아 있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올림픽 개막식에 섰던 다문화 합창단을 꾸리면서 그 등을 치는 놈이 있었던, 우리'가 아닌 이들에게는 유별나게 혹독한 '한국인'의 일원으로서 제발이 저렸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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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빠져들어서 순식간에 읽어버렸네요... @sanha88님의 포스팅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지만, 필력이 상당하십니다. 군더더기도 없고, 사람이 빨려들어가게 하는 마력이 있네요. 부럽습니다. 다음 포스팅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식당 얘긴 좀 많은데.... 찬찬히 풀어 보죠

빨려들듯이 순식간에 읽혀 질 만큼 재미도 있고 글 솜씨도 뛰어나시네요 ㅎㅎ즐겨찾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 즐겨 찾을 곳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요즘 점점 감정이 말라가서 여자친구조차 로보트가 아니냐 할 때가 많은데 이 글 읽으며 울컥울컥했습니다. 음식이랑 음식을 만드는 사람 이야기는 씁쓸하면서도 아련하고 또 구수하네요. 문득 어머니랑 통화하고 싶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

와우..저런 사연이 있는 집이군요
우리나라사람..참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저도 한번은 가보고 싶군요

네.... 저도 두어 번 더 갔는데 맛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니 갑자기 "사장님 나빠요"가 생각이 나는군요. 맛깔스러운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또 많이 배우기도 하구요. ^^;

격려 감사합니다... ^^

우와... 사연이 있는 식당 소개를 글로도 맛나게 하시는군요. 누군가의 역사와 문화의 이야기. 잘 봤습니다.

우와... 잘 읽었습니다.
글이 살아있는 것 같네요. 머릿속으로 상상이 되요 ㅎㅎㅎ
정말 진솔한 삶의 이야기입니다!

처음부터 집중돼서 읽었네요ㅎㅎㅎ긴 글을 끌고 나가시는 집중력이 대단하십니다...! 덕분에 좋은 글 읽고 가요^0^

와....... 향미....

어디 가도 볼 수 있는 청진동 뼈해장국이더라구요. 음식과 음식을 만드는 이의 역사, 생각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만든 방송. 모두 어우러져 감동이 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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