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선구자의 비극 - 창랑호 납북

in #kr5 years ago

1958년 2월 16일 창랑호 납북과 신용욱

부산에서 떠서 서울로 가던 KNA 소속 여객기 ‘창랑호’가 하이재킹됐다. 승객 31명과 승무원 3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 중 납치에 가담한 사람은 남파공작원을 비롯한 5명 (2명은 협조 내지 방조)이었다. 그들은 공군 정훈감 등 군인들을 때려 실신시키고 총기로 조종사를 위협하여 기수를 북으로 돌렸다. 그 후 국제적 압박과 호소를 통해 납치범들을 제외한 승객들은 돌려보내졌지만 비행기는 반환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가장 크게 타격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KNA 사장 신용욱일 것이다. 그도 꽤나 사연이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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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 많은 조선인들도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의 주인공 안창남 이후 많은 이들이 창공에 도전했다. 1925년에는 권기옥이 중국 운남여학교 제1기생으로 졸업, 비행사 자격을 취득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가 탄생했고 1926년에는 이기욱 비행사가 서울에 경성항공사업사를 설립하여 최초의 민간항공사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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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일본항공사들에 의해 한국을 경유하여 만주와 일본을 연결하는 민간항공노선들이 수립됐다. 1930년대 이후가 되면 비행기가 조선 하늘을 날고 조선 땅에 내리는 것이 그렇게 귀한 일만은 아니게 됐다. 그 비행기 조종사들 가운데 신용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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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생이었던 신용욱은 스물 두 살 나던 해 1922년, 일본 오꾸리(小栗) 비행학교를 마친다. 그 1년 선배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이었다. 안창남이 창공을 날면서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이 많았다면 신용욱은 비행 자체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1등조종사 자격증을 획득한 이후로도 그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 했고 도오아 항공전문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아예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조종사 면허까지 따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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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지만 그는 비행기에 미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비행을 좋아했고 거기에 평생을 바친다. 그는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출신이었다. 1925년 그는 고향의 신림면 평월리 공터 주변에 비행기를 끌고 착륙하는 묘기를 선보인다. 활주로가 닦이지 않은 울퉁불퉁한 공터로의 착륙이었다. 구름처럼 몰려든 고창과 인근 지역 사람들은 환호를 올리며 하늘에서 내려온 고향 사람을 환영했다. 그는 이후 조선항공공업회사를 만들어 비행기를 생산하는 등 한국 항공 산업의 초석을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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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런 일은 그는 비행기 말고는 관심이 없었던지 안창남처럼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는커녕 친일파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는 비행기로 일본군을 실어 날랐고 비행기를 헌납하기도 했다니 혐의를 벗기 어려운 친일파 인사인 셈이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선정한 708인의 친일파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내놓은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에 모두 그 이름을 올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그의 기술과 경험은 이 나라의 항공산업의 역사에 중요한 줄기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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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후 최초로 “Korea”의 이름을 단 항공사를 설립한 것은 그였다. 1948년 대한국민항공사 (KNA)가 신용욱에 의해 그 깃발을 올린 것이다. 신용욱은 이승만의 양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을만큼 이승만과 밀착해 있었다. 그는 1950년 처음으로 국회의원까지 됐고 이후 내리 3선을 한 것이나 100만 달러 이상의 외화 사용이라면 대통령 결재가 필요하던 시절 그가 미국에서 DC3기 3대를 구입해 올 수 있었던 것이나 그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 주는 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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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이 됐어도 그의 비행에의 열망은 그치지 않아 1953년 그 자신도 온갖 심혈을 기울여 이 사업을 키워 나감으로써 일등비행사로 부터 탁월한 항공사업인으로 전환의 계기를 맞은 것이다. 1953 년에는 비행시간 3천 시간을 돌파해 미국 민간항공연맹으로 부터 무사고 비행기록 표창을 받은 최초의 동양인이 됐고 헬리콥터를 들여와 그를 조종하며 논밭에 농약을 뿌렸던 첫 사람이었으며 1956년에는 처음으로 한미(韓美)항공협정 체결을 성공시켜 미국 보잉사로 부터 1백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내는 등 기염을 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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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행운의 날개는 거기까지였다. 그가 얻어왔던 비행기 석 대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창랑호 우남호 만송호였다. 우남은 대통령 이승만의 호(號), 만송은 부통령 이기붕의 호, 창랑은 정치인 장택상의 호였으니 신용욱이라는 사람의 정치적 밀착도를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이 창랑호가 1958년 2월 16일 북한 공작원들이 이 비행기를 납북한 것이다.

온 나라가 세계 최악의 가난에 시달리던 무렵,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된 사람들이 손으로 헤아리던 즈음, 항공사란 적자투성이의 기업일 수 밖에 없었고 집까지 팔아 가며 버티던 신용욱에게 비행기 납북은 크나큰 타격일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전 해 만송호가 사고로 파손된 상황이었기에 운행 가능한 비행기는 우남호 하나만 남게 된 것이다. 즉 자산이 1/3으로 줄어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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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욱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비행기를 도입하고 시애틀 노선을 수립하는 등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사세는 기울어지고 있었다. 신용욱 자신도 국회의원에서 낙선했고 4.19가 터져 정치적 후견인이라 할 이승만을 잃었고 5.16 군사 쿠데타 이후에는 부정축재자로 몰리는 위기 끝에 한강에서 몸을 던져 그 삶을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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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되자마자 일본에서 스틴슨 4인승 비행기를 배에 싣고 와서는 바로 조립하여 하늘로 떠올라 한반도를 가로질러 김포공항에 내리고 다시 기수를 부산으로 향하여 왕복 비행을 성공시킨 후 득의양양하던 신용욱, ‘사장님’이라고 부르면 ‘기장님이라고 부르라!’고 화를 내던 한국항공산업의 개척자 신용욱은 슬프게 삶을 마감했다. 비행기를 너무 좋아했지만 그러다보니 권력자들에게 다가갔고 그 권력이 바뀔 때 스스로의 처지도 조락할 수 밖에 없었던 비행사. 그와 함께 KNA는 군사정권에 의해 국영 ‘대한항공공사’로 바뀌게 된다. 또 하나의 역사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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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인하대학교에는 신용욱이 들여온 마지막 비행기 우남호가 전시돼 있다. 그 후 대한항공에 인계되어 1971년까지 운용되며 총 36,216시간이란 비행 기록을 남기고 퇴역했으며 인하대학교에 기증되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 우남호만큼은 영욕의 세월을 살았던 한때의 주인 신용욱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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