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로

in #kr6 years ago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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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대학생들이 부르던 노래 중 가장 감명 깊은 노래라면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로>를 들고 싶다. 통일이 주제이긴 하나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백두산 여행 가자’에서 벗어나 있고 엄숙한 백두한 혁명 정기와도 동떨어져 있으며, “기어이 우리 대에 조국 통일 이룩하자”는 친구들에 영하 30도짜리 냉소를 날리던 나도 서슴없이 기탄없이 부를 수 있던 노래였기 때문이다. 그 노래 자체가 하나의 예술적, 역사적 완결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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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찾사의 목소리로 다시 듣는.

노래를 하다 보면 관련된 역사적 기억들이 슬라이드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표현할까. 하여간 ‘시각적인’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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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 무엇으로 남았는가 남에 유채꽃 북에 진달래 흐드러져
이 땅에 흘린 피로 맺혀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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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비목>의 뒷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넘었어도 전방의 들판과 산자락에는 희생자들의 백골과 유품들이 널려 있었다고 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뚫린 철모 구멍 위로 꽃은 피어났으나 백골들은 채 썩지 않고 어둠 속에서 도깨비불을 피웠다. 또 급박한 전투 와중에 엉성하게 매장하고 나무 표지판을 꽂아놓은 간이 무덤들도 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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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방에서 장교로 근무하던 한명희라는 사람이 순찰 중 돌무덤 하나를 발견했다고 했다. 원래 십자가 위에 철모를 걸었던 것 같은데 철모는 이미 땅에 뒹굴고 있었고 십자가 비목은 썩어 쓰러질 판이었다. 장교는 그를 발견했을 때의 느낌을 후일 가사로 옮겼고 라디오 PD가 됐을 때 숙직실에서 작곡가 한 명과 쿵짝을 맞춰 노래를 만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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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얼마나 많이 죽었을까. 당시 제주도 훈련소를 나서던 병사들이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는 기록 필름을 본 적이 있다. “이 몸이 죽고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저 신병들 중에 몇 명이 살아남아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꽃 같고 별 같은’ 사람을 추억할 수 있었을까. 그런 신병들은 북한에도 산더미였을 것이다. 어디 전쟁 중이었을까. 해방 뒤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려 죽고 죽이며 전쟁이라는 악마의 아가리로 굴러 들어갔던 사람들의 시신 위에 피어난 유채꽃과 진달래꽃은 또 얼마였을지.


“온 누리 온 몸 흔드는 함성 눈부신 노동과 투쟁의 열매로
아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로”


판타지도 이런 판타지가 없어서 더 볼까 말까를 망설이고 있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던가. “빼앗기면 되찾을 수 있으나 내주면 다시 찾을 수 없다.” 옳은 말이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한국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주먹 한 번 휘둘러 보지 못했다. 그런 나라는 존재 가치가 없다.”라고 비아냥을 날릴 만큼 황제와 고위 귀족들은 밥상 갖다주듯 나라를 넘겼고 그 댓가로 편안하게 살다가 죽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내주지 못하겠다는 듯 농민, 나뭇꾼, 숯장수들이 일어나 싸웠고 배운 만큼은 값을 해야 한다는 지식인들이 “우리는 빼앗겼을 뿐 내주지 않았다.”며 일어나 싸웠다. 해방은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연합군이 이긴 결과라고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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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자도 아나키스트들도 사회주의자들도 골수 공산주의자들도 ‘민족 해방’을 위해 싸웠고 해방에 환호했다. 1945년 8월 16일 경성형무소 문이 열리고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정치범들이 석방돼 만세를 불렀을 때 그 만세 소리에는 어찌 균열이 있었을까. 백두에서 한라까지 한라에서 백두까지 그 눈부신 환호에 일점 어그러짐이 있었을까. 그러나 우리 선대는그 하나됨을 유지하지도 못했고 평화롭게 헤어지지도 못했고 기어코 하나를 만들겠다며 서로간에 죽고 죽이기 시작했다.


“이 얼마나 참혹한 고통인가
남과 북의 원한 강물져 흐를 때
우리는 해방의 나라로 가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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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근무가 많았던 지역 특성상, 신병 훈련소에서는 해안 침투 간첩을 잡았을 때의 특전에 대해 교육했다. 그 챕터의 제목은 <한 마리 잡자>였고 ‘한 마리를 잡으면......’ 이하 받게 되는 포상휴가와 상금,‘ 대학 입학 특전 등등이 쓰여 있었다. ‘한 마리’는 곧 간첩이었다. 한 나라의 영토를 몰래 침범하는 간첩에게 온건한 나라는 없을 테지만 ‘한 마리’라는 표현은 눈을 아프게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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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내려온 ‘여러 마리’들이 저지른 만행 또한 만만치 않았다. 지금도 한국 진보 일부는 조작이라고 믿고 있는 이승복 사건에서 공비들이 어린아이의 입을 칼로 찢고 그 연약한 이를 돌로 깨부순 이유는 자신들의 체제에 반대한다고 선언하는 꼬마에 대한 분노와 증오였다. 또 그들의 부모나 형제 중에서 전쟁 와중에 미군의 폭격으로 가루가 됐거나 국군에 의해 죽음을 당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고, 더 들어가면그들의 부모나 형제는 자신들에 반하는 ‘반동’들을 몰아세웠고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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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을 뜨고 무찌르고 철퇴를 내리고 초전박살하고 피바다가 된다와 불바다가 먼저다다로 맞섰던, 같은 말 쓰는 동족끼리 서로 대가리에 뿔 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었던 그 격렬한 원한, 선지피같은 적대감. 그걸 넘어서기란 참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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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와서 부라보콘을 건네 받은 북한 사람은 이런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남한이 만들어낼 리 없다고 의심했고 북한으로부터 수해 물자를 제공받은 남한 사람은 쌀이나 천이나 질이 별로라고 헐뜯었다. 이벤트의 감동은 종종 파스처럼 뜨거웠으나 용도를 다하면 역시 다 쓴 파스처럼 휴지통으로 처박혔다. 최소한 그 적대감이라도, 여차하면 저놈이 나를 칼로 찌를지 모른다는 공포감이라도 강물에 흘려 보내야 했다. 두 나라가 합치든 말든 그에 앞서서 우선 과거로부터 ‘해방’돼야 했다.


온 누리 물불로 아름다운 세상
치욕인 산 울음인 산 떨쳐 일어나
아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로


우리 해방의 나라 기억하리라
산천초목 영원한 기쁨의 나라
온 누리 부활로 피어오르니

지금도 철조망이 가로막힌 곳이 많지만 80년대 우리 해안선 곳곳은 그야말로 철조망으로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아무리 경치 좋은 곳이라도, 다시 없는 절경에도 철조망 가시는 빈틈없는 흉터로 시야를 가렸다. 수년 만에 같은 곳을 찾았을 때 철조망이 사라진 풍경이 얼마나 시원하고 아름다웠던지. 금수강산까지 가지 않더라도 평범한 산과 바다, 하늘과 땅에 가로놓이고 둘러처지고 쌓아올렸던 차가운 벽은 얼마나 드높고 살벌했던지, 그리고 우리는 그에 얼마나 익숙했던지,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는 모습에 얼마나 놀라웠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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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중국 선수들에게 패배 직전까지 몰렸지만 한 점 한 점 따라가 기어코 중국을 꺾어 버렸던 남북 단일팀 선수 유순복을 기억한다. 한 점 한 점 올라갈 때마다 펄쩍펄쩍 뛰어오르던. 그리고 역시 비슷한 높이로 뛰어오르던 젊은 날의 나.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때 처음 선보였던 북한 여성 응원단이 돌아갈 때 그를 환송하던 부산 사람들은 통제벽을 무너뜨리면서까지 돌아가는 북한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고자 했다.. 그저 더 보고 싶어서. 더 같이 손을 흔들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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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이 사랑으로 만나는 세상
투쟁이 염원으로 만나는 세상
아 통일의 땅에 우리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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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를 처음 배울 때 선배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투쟁이 사랑으로 만나는 세상. 투쟁이 염원으로 만나는 세상.... 가사는 죽이는데 과연 이런 세상이 가능할까.” 그렇게 죽일듯이 싸우고 실제로 죽였고 전쟁이 끝난 뒤 65년 동안에도 기상천외 신출귀몰 용의주도하게 서로를 누르려 하고 꺾으려 하고 서로간의 목숨을 취했던 역사가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염원으로 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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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문은 지금도 남아 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북한의 도발로 상처입은 이들, 세상을 등져야 했던 이들의 가족이 즐비하고 북한 사람들의 가슴에도 상처는 깊고도 다양한 꼴로 남아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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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에 대한 답은 하나의 질문이다. “계속 그렇게 살 것인가.” 60년대애는 명태 잡겠다고 동해바다 거슬러 오르는 어선들 때문에 남북한 해군이 붙었고 2000년도에는 꽃게 잡다가 근 백 명의 남북청년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계속 그렇게 살 것인가. 계속 죽음의 백조가 머리 위를 날고 일상적인 훈련에도 비상을 걸어야 하며 미국인들이 철수하는지 안하는지 조마조마 지켜 봐야 하며, 자식들 군대 있을 동안은 별 일 없기를 바라면서 그저 임진각 앞에서 통일전망대 망원경 앞에서 감회에 젖는 표정 몇 번 짓는 것으로 분단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듯한 삶을 계속 살아야 할 것인가 내 자식들도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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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백 번 천 번을 생각해도 ‘그렇지 않다’이다. ‘이렇게는 못 산다’이다.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이다. 이제는 죽일 듯이 달려들던 투쟁을 사랑으로 제지해 볼 때다. 미친 듯이 격돌해 온 투쟁의 고삐를 염원으로 잡을 때다. 수십년 간 지연돼 온 평화에 대한 사랑,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보다 큰 행복의 염원이 투쟁심을 대신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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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란 단순히 남과 북이 합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합치지 않으면 어떤가. 그저 서로 다르게 살아온 두 나라이지만 비슷한 지향과 가치를 향해 함께 나아가고, 사랑과 염원의 대상을 같이 바라보는 과정, 그 자체가 통일이 아니겠는가. 함께 번영하면 그만한 통일이 어디 있겠는가. 때가 돼서 합치면 더할 나위없이 좋을 테고

목울대 높여 노래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읊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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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이 사랑으로 만나는 세상
투쟁이 염원으로 만나는 세상
아 통일의 땅에 우리 가리라”

가보자. 오래 가지 못한 길. 어떻게든 가야 할 길. 이 길이 아니면 어디에도 이를 수 없으나 이 길을 가지 않고 맴돌아 왔던 세월을 이제는 뒤로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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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철쭉은 겨울에 피었지
동지들 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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